출향인 인터뷰 - 사람이 희망이다<10>
수필가·국제펜클럽 회원 월산 윤항중 예비역 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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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향인 인터뷰 - 사람이 희망이다<10>
수필가·국제펜클럽 회원 월산 윤항중 예비역 장군
  • 장윤수·김경미 기자
  • 승인 2015.08.13 1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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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가·국제펜클럽 회원 월산 윤항중 예비역 장군

“자랑스러운 홍성의 아들로 남고 싶다!”

30여년을 군에 복무하다 1993년 1월 육군 소장으로 예편한 윤항중 장군(75)은 “평소 군(軍)을 주요한 ‘국민교육 도장’의 하나로 생각해왔다”고 말했다. 윤 장군은 모 부대의 부대장으로 재직 중에 군 간부와 군무원, 장병, 군인 가족들을 ‘가나안 농군학교’에 입소시켜 근검절약 정신을 일깨워 주는 등 올바른 가치관 확립을 위한 교육에 남다른 관심을 보여 왔다. 이밖에도 윤 장군은 ‘소년소녀 가장 돕기’, ‘고등학생 기능교육’ 등 각종 대민지원사업을 통해, 군 내부의 의사소통 활성화와 적극적인 사고방식의 전파, 명랑한 영내 분위기 조성에 앞장서 왔기에 주위에서는 그를 ‘항상 새로워지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 ‘마음이 따뜻하고 강직한 멋진 군인’으로 평하고 있다.“6.25 전쟁당시 저는 초등학교 3학년이었죠. 국군의 집요한 공세로 수세에 몰린 패잔병 ‘빨치산’들이 위기의식을 느껴 백월산 계곡으로 숨어들었을 때, 요란한 경적과 군가로 기세등등하게 질주하던 국군장병이 탑승한 차량이 빨치산 토벌작전에 투입되더니 잔적을 완전 소탕하고 우렁찬 함성과 군가, 그리고 대한민국 만세를 함께 부르던 모습을 보며 감동을 받았습니다. 이후 군인을 동경하고 직업군인이 되었죠.” 윤 장군은 “전승을 알리는 밤하늘에 높이 솟구치는 오성신호탄과 장병들의 우렁찬 함성이 두고두고 잊히지 않는다”며 “그러한 이유로 전역 후 문인으로 등단한 뒤 필명을 월산(月山)으로 사용하고 있다”고 밝혔다.

 

 내 고향 홍성·홍성고 재학 추억 잊지 못해
 백월산 오르며 올리던 간절한 기도 이뤄져
 30여 년간 군복무 후 육군 소장으로 예편
“앞으로도 근면 성실한 삶 계속 살아갈 것”

윤 장군은 홍성에서 출생해 초·중·고를 거쳤고 육사 4학년 졸업반이 되던 해인 1964년에 온 가족이 고향을 떠나 서울로 이사했다. 윤 장군은 “33년간 직업군인의 길을 걷는 동안 자주 고향을 찾지는 못했지만 산과 바다, 그리고 철새가 있는 내포(內浦)의 중심인 충절과 기개의 고장인 내 고향은 홍성임을 언제나 자랑스럽게 여겨왔다”고 말했다. 이어 “어릴 적 틈나는 대로 백월산을 오르내리며 병정놀이에 심취하며 호연지기를 기르기도 했고, 백월산 정상에 오를 때면 두 손을 모아 하나님께 간절한 소망을 갖고 기도를 드리기도 했다”고 말했다. “제가 드린 첫 번째 기도는 이 나라를 지키는 군인이 되고자 육사에 입교하게 해주십사 하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아름답고 마음씨 고운 시우미 양을 미래의 반려자로 택하여 주십사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마침내 그 두 가지 기도가 모두 이뤄져 하나님께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릅니다.”

윤 장군은 “고3 시절 어느 날, 우연히 조양문(당시 동문)앞을 지나다가 수많은 군중들에게 둘러싸인 채 수줍은 듯 얼굴에 홍조를 띠고 그림 그리기에 여념이 없던 여고생을 보고 꽤 그림처럼 예쁘다고 생각하며 부러운 시선으로 쳐다본 일이 있었다”면서 “바로 그녀가 오늘의 나의 아내인 시우미 시인”이라고 밝혔다. 지난 1959년 10월 10일 교육의 날에 관내 초·중·고등학생이 모두 함께 모였던 홍성여고 교정에서 윤항중 장군(당시 홍성고3)은 홍성고등학교를 대표하는 모범학생으로, 아내 시우미 시인(당시 홍성여고 1)은 충남도내 미술 특선학생으로 함께 나란히 표창을 받게 됐고, 그것이 인연이 돼 오랜 연애 끝에 결혼을 하게 됐다.“홍성고 재학 3년간 특히 잊을 수 없는 일은 우리에게 수학을 가르쳐주셨던 이영환 선생님의 헌신적인 봉사입니다. 우수자 50명을 엄선해 ‘정우회’라 명하고 자비로 과외를 강행하셨던 이 선생님 덕분에 당시 저희들의 수학실력은 전국에서도 수준급이었다고 자부하고 싶습니다. 제가 육사 입교 시 수학 200점 만점을 획득한 것도 우연은 아니었겠죠.”

이어 윤 장군은 “성악에 뛰어났던 음악적 자질을 높이 평가해 주시고, 멋과 정서와 낭만을 함께 일깨워 주셨던 고 현영원 음악 선생님을 또한 잊을 수 없다”고 말했다. ‘오 솔레미오(O Sole Mio)’, ‘망향’, ‘그리운 금강산’ 등의 노래를 부르던 추억을 떠올린 윤 장군은 “미술엔 젬병이어서 그림솜씨가 형편없지만, 정말 고매하셨던 조중현 미술선생님을 특별히 존경해왔던 것도 오랜 기억으로 남는다”고 밝혔다. 또 윤 장군은 “사나이로서 의리가 없다고 판단한 ‘누군가’를 때려눕혀 주겠다며 역도, 아령, 권투 등으로 체력단련을 열심히 해 ‘공부도 잘하고 싸움도 잘하는 놈’으로 알려지게 됐다”고 말했다. “제가 고등학교에 다니던 50년대 후반에는 철모르고 날뛰던 그 옛날 방과 후 주먹다짐 장소로 홍주의사총 잔디밭에 자주 드나들었죠. 서로의 패권을 판가름하는 일대일 주먹 싸움에 정의의 심판관으로 불려 다녔던 적이 꽤 여러 번 있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저는 싸움보다는 상호 화해에 주력했음도 덧붙이고 싶습니다. 또 홍성제일감리교회 성가대원이자 고등부 회장으로 학교의 말썽꾸러기 문제아들을 예외 없이 교회로 전도하다보니, 한때는 고등부 회원이 무려 77명에 이르러 마치 홍고의 골칫거리 집합소를 방불케 한 적도 있었습니다.”

이 밖에도 윤 장군은 “홍성고 3학년 시절, 경희대(당시 신흥대)에서 주최한 전국 고교학력경시대회에 유홍무, 강정평, 김정현, 오흥식 등 친구 네 명과 함께 한 달간 합숙훈련을 하고, 홍고의 명예를 걸고 단체전에 응시해 5등을 해 등록금과 입학금 전액면제 특전을 제시받기도 했다”고 말했다. 이어 “‘잃어버린 추석명절’, ‘친구의 이별’, ‘나의 기쁨’ 등을 글로 써 작가지망생으로 제법 유명해지고, 장래 훌륭한 문학청년으로서의 자질도 인정받았던 기억도 새롭다”고 말했다. “육사 생도시절 4년간 축구선수로 활약하며 강인한 투지력과 뜨거운 전우애, 끈질긴 인내력을 배양했다”는 윤 장군은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나 자신을 위하여 무척 많은 땀을 흘려왔음을 떳떳하게 고백하고 싶다”고 말했다. 이어 “그동안 자랑스러운 홍성고교 졸업생(14회)으로 육군 소장이 돼 제1야전군의 군수지원 업무를 담당하는 군수지원 사령관직을 끝으로 33년간 파란만장한 직업군인의 길을 마감하면서, 늘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과 자주 찾지 못하는 내고향 홍성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하고, 고향 친구, 친척, 친지, 선후배들이 더욱 건승 발전함을 염원하면서 나 자신의 기대에 부응코자 보다 열심히, 숨 쉬는 날까지 소임완수에 노력함은 물론 알찬 결실을 위해 정진하고자 한다”는 뜻을 밝혔다. 

윤 장군은 “세월이 여류(如流)라, 극사광음(極似光音)이라더니, 어느새 장성한 두 아들의 부모가 되고 나이 70대에 접어드니 정말 세월이 유수와 같음을 재삼 실감케 된다”고 말했다. “저는 ‘늘 하나님께 감사하며 머리엔 지혜를, 얼굴엔 미소를, 가슴엔 사랑을, 그리고 할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희망을 잃지 않고 성실하게 살아가자!’를 가훈으로 삼고 있습니다. 또 현역 재직 당시 ‘부하에게 충성하는 간부가 되자!’는 슬로건으로 지휘통솔에 솔선수범했으며 ‘권력에 아부하지 말고, 물질에 비굴하지 말며, 명예에 집착하지말자!’를 평소의 좌우명으로 삼아왔습니다. 또 ‘명예는 상관에게, 공훈은 부하에게, 책임은 나에게!’ 라는 원칙하에 근면 성실한 삶을 살아오고 있으며, 이러한 저의 삶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입니다!”
 


월산(月山) 윤항중 장군은… 
1941년 충남 홍성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줄곧 홍성에서 보냈고, 1965년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했으며, 지난 1979년에는 경남대 경영대학원에서 산업경영학 석사과정을 이수했다. 30여 년을 군에 복무하다 1993년 1월 육군 소장으로 예편했다. 파월 맹호 소총 중대장시절(1971) 중대원의 신상을 낱낱이 파악해 당시 이화여고 교장 정희경 여사(현 청강학원 이사장)에게 단체 위문편지를 주선해 장병의 사기앙양에 크게 기여했으며, 5공수 특전여단(흑룡부대) 인사참모시절(1975) 장병의 철도 무임승차 근절에 적극 노력한 공로로 서울지방 철도청장(이원전)으로부터 철도청 창설기념일(1975. 9. 18.)에 감사패를 수여받았다. 육군대학 교관시(1978) 교수법 경연대회에서 최우수 교관으로 선발돼 ‘방어시 공세행동’이란 주제로 전군 순회교육을 실시, 국방장관 표창을 수상했다.

전역과 동시 저술한 수상록, ‘아들아! 나는 청춘을 군인으로 살았다!’가 국방진중문고(제351호, 1995. 03.)로 선정, 전군에 보급돼 군 장병에 널리 읽히고 있으며, 하인리히 하이네 탄신 202주년 기념 저작대상(문예춘추)을 수상했고, 수필가로 문단에 등단해 조선문학 문인회원, 한국문인협회 회원, 국제펜클럽회원으로 작품 활동에 열중하고 있으며, 파월 장병 전상지체절단장애자 집성촌인 ‘평화용사촌’의 명예회장, 한국실버산업진흥원(www.ksipc.org)의 초대 이사장(겸 원장)으로, 서울시지체장애인협회 후원회 상임고문, 중앙경제신문 명예회장 및 논설위원, (주)KTmos 퍼실리티 회장, (주)비젼텔의 명예회장직을 수행하고 있다. 또한 보령시 주산면 삼봉리에 위치한 ‘시와숲길공원’에 건립된 ‘한국 현대문학 100주년 기념탑(부탑)’명단에 윤항중, 시우미 부부의 이름이 등재돼 있다.

<이 기획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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