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마다 새해가 되면 남들 즐겨 가는 해맞이 대신에 인적 끊긴 역사의 현장을 돌아보곤 한다. 웅대하고 장엄한 일출을 보며 한해의 무사안녕을 기원하는 대신에, 잊히고 버려졌던 것들을 돌아보며 마음을 새롭게 일깨우고자 함이다.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 발각되어 처형당한 성삼문 선생의 유허지는 홍북면 노은리 초야에 묻혀 있었다. 사당인 충문사와 사육신의 위패를 모신 노은단, 부친 성승 장군의 묘소가 여윈 겨울 햇살 아래 후손의 방문을 반기는 듯하다. 민족의 충신들이 기지개를 켜며 의식 속으로 다가오는 순간이었다. 내 안의 소중한 가치들이 오랜 침묵을 깨고 수런수런 옛이야기를 나누며 나오는 것 같다고나 할까.
북소리 둥둥 울려 사람 목숨 재촉하는데 / 고개 돌려 바라보니 해는 지려 하는구나 / 황천에하여는 주막 한 곳 없다 하니 / 오늘밤은 뉘 집에서 쉬어 갈꼬? <성삼문 절명시>. 부친이 눈앞에서 고문당하여 죽고, 어린 아들이 심한 태질로 죽어가는 것을 보면서 선생의 혼은 터지지 않았으랴! 멸문지화를 감당하고 불사이군의 절의를 지키며 형장으로 향하는 대장부의 비장함이 절절하기만 하다. 권력과 살생에 눈이 먼 무리들에게 저주를 퍼부을 만도 한데, 선생은 속세의 연을 넘어 다가올 미래를 품은 것일까? 동료들에게 남긴 말을 보면 단절의 벽을 넘어 이미 화합의 세계에 이른 듯하다.
“그대들은 새 임금을 받들어 태평성대를 열어가시오. 나는 돌아가 지하에 가서 옛 임금을 뵈올 것이오.”
성삼문과 신숙주에 대하여 충신과 변절자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다. 그러나 선생의 마지막 말은 논쟁을 의미 없는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돌이킬 수 없는 역사적 상황 앞에서 선생이 할 수 있는 건, 지는 해의 업고를 안고 들어가 새 시대를 축복해 주는 일이었다. 어찌 보면 인생 자체가 이해관계의 대립 속에서 상대를 흠집내면서 우위에 설려는 싸움의 연속 아닌가. 그러나 살다보면 나를 낮추고 양보의 미덕을 발휘해야 하는 대승적 순간이 있는 것이다. 당리당략에 승선하여 상대호 침몰시키기에 급급한 위정자들의 행태는 여의도 한복판이나 자치의정에게나 여전히 아쉬움으로 남았던 한해였다.
60갑자 가운데 33번째로 돌아오는 병신년의 ‘33’이란 숫자는 ‘임금이 백성의 무병장수와 평화를 바란다’라는 뜻이라 한다. 승과 패의 취사선택이라는 역사의 엄연한 시각이 있는데도, 선생의 죽음을 공동의 선을 위한 양보의 미덕으로 보려는 것은 한해가 시작되는 길목에서 화합의 세계를 꿈꾸어보는 나의 무리한 바람인 것일까. ‘역사의 양지로 나오지 못한 자, 달빛에 젖어 신화가 된다.’ 언젠가 지리산 등산로 입구에 쓰인 낙서를 보며 선생이 떠오름은 어인 일인가. 이는 능지처참되어 팔도 각지로 흩어진 선생의 육신이 후대의 정신으로 되살아난 것이 아닐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지만 선생은 후세의 영혼을 비추는 은은한 달빛으로 살아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