巧言令色, 鮮矣仁, 인(仁)은 성실함 가운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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巧言令色, 鮮矣仁, 인(仁)은 성실함 가운데 있다
  • 손세제 <철학박사>
  • 승인 2018.11.05 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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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 아카데미
사진 출처= https://image.baidu.com

曾子 曰 “吾日三省吾身. 為人謀而不忠乎? 與朋友交而不信乎? 傳不習乎?” 증자가 말했다. “나는 매일 3가지 일로 나의 몸을 살핀다. 남을 위해 일을 꾀하면서 진심을 다하지 않았는가? 붕우와 더불어 교제하면서 믿음으로 대하지 않은 점은 없었는가? 나는 하지도 않으면서 남에게 익히라고 전한 것은 없었는가?”

증자(曾子)는 공자의 고족제자(高足弟子)다. ‘사기’ ‘중니제자열전’에 의하면 “증자는 무성현 남쪽(南武城) 출신이다. 자(字)는 자여(子輿)이고 이름(名)은 삼(參)이다. 공자보다 46세 적었다. 공자께서 효도(孝道)에 능통하다고 여겨 학업(學業)을 전해줬다. 효경(孝經)을 지었고 노(魯)에서 죽었다.”

논어의 편집자들은 전송을 취집(聚集)할 때 해당 전송의 유래 혹은 제작처를 분명히 하기 위해 호칭(呼稱)에 몇 가지 구분을 뒀다. 예를 들어 공자가 제자의 이름을 직접 부른 경우에는 이름(名)을 사용하고 제자들이 서로 부른 경우에는 ‘자(字)’를 사용했다. 제자들의 행적을 기록한 때에도 ‘자’를 사용했다. 이에 대해 군주(혹은 집정자)가 호명(呼名)한 경우에는 이름(名)을 사용했다. 공문 밖에서 전해지던 이야기에서 취한 경우에는 별명과 이름을 혼용했다. 제자의 출신국과 이름을 합해 해당 제자의 이름을 기록한 경우도 있다. 공자에 대한 호칭도 예외가 아니다. 공문 내에 전해오던 이야기에서 취한 경우에는 어김없이 ‘자(子)’라는 호칭이 등장한다. 이에 대해 공문(孔門) 밖에서 전해지던 전송에 대해서는 ‘공자(孔子)’라는 호칭을 사용했다. 군주와 대화한 경우는 존경의 표시로 ‘공자’라는 호칭을 사용했다. 반면 공자 본인이 밖에서 있었던 일을 제자들에게 말해 후대에 전해진 경우에는 화자(話者)에 ‘자(子)’라는 호칭을 사용해 전송의 유래를 분명히 하고자 했다. 한편 공자가 자신의 이름을 자칭한 경우에는 휘(諱)하지 않고 공자의 이름(丘)을 그대로 사용했다. 외부의 인사가 공자에 대해 언급한 경우에는 ‘부자(夫子)’라는 말을 사용했는데 부분적으로 ‘군자(君子)’라는 호칭을 사용한 예도 있다.

위 문장에서는 증자에 대해 삼(參)이라는 ‘명’을 사용하지 않았다. 자(子輿)를 사용하지도 않았다. 공문 내에서 전해지던 전송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이 전송은 어디에서 취한 것일까? 열쇠는 증(曾) 다음에 자(子)를 덧붙인 것에 있다. “증자”라는 존칭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곧 ‘증자’를 받드는 학단(曾子學團)에서 제작된 전송이라는 뜻이다. 증자 문하에서 대대로 구전(口傳)돼 오던 전송이 있었는데 논어를 편집할 즈음에 그 제자들이 논어 편집에 참여하면서 삽입했다는 뜻이다.

증자(曾子)는 요즘 말로 하면 ‘Mr.曾’ 곧 ‘우리 曾先生께서 말씀하시길’이라는 뜻으로 해석하면 무리가 없을 것이다. 그 曾선생께 말씀하길 ‘나는 매일 같이 3가지 일로 나를 살폈다’고 했다 한다. 첫째 남을 위해 일을 도모하면서 혹 충(忠)을 다하지 않은 적은 없는지, 둘째 붕우(朋友)와 교제하면서 신(信)을 저버린 예는 없는지, 셋째 자신은 하지도 않으면서 남에게는 익하라며 전한 것은 없는지, 매일 같이 이 3가지 일로 자신을 성찰했다고 한다.

‘충(忠)’이라는 글자는 마음(心)에 ‘중(中)’을 품고 있는 형상이다. ‘중’은 네모난 땅(囗) 한 가운데 말뚝(丨)을 박은 모양에서 취한 글자인데 마음을 뜻하는 ‘심’자와 합해 읽으면 ‘불편부당(不偏不黨)함이 없는 마음’이라는 뜻이 될 것이다. 곧 마음속에 ‘공정함(justice, fairness)’이 있다는 뜻이다. 법원에 가면 마당에 ‘저울’을 조각한 상(像)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른바 ‘천칭(天秤)’이라고 하는 것인데 송사(訟事)를 다룰 때는 치우침이 없어야 한다는 뜻이다. 판결에 임하는 자가 지녀야 할 마음의 도덕 곧 ‘양심(良心)’을 ‘저울’에 담아 표현한 물상(物像)이다. 치우침이 없이 양심에 따라 임하는 것, 이것이 바로 ‘충’의 함의다.

지난 해 우리는 촛불 혁명을 경험했다. 그때 정치권의 일부 인사들이 ‘우리가 ‘충’을 바쳐야 할 대상은 국가가 아니라 대통령이다‘는 말을 해 논란이 된 적이 있다. 그러나 이들이 말한 충이 ‘충’이 아님은 앞에서 말한 ‘충’의 함의에서 분명히 알 수 있다. ‘충’은 ‘의(義)’를 행하는 경우에만 사용될 수 있는 말이다.

두 번째 증선생은 붕우와 교제하면서 ‘신’을 저버린 적이 없는지 고민했다고 한다. ‘붕(朋)’이란 글자는 ‘뜻을 같이 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뜻을 같이 하는 무리’라는 뜻의 ‘붕당(朋黨)’이라는 말이 나왔다. 대개 이 글자는 ‘육(肉)’자를 겹쳐 쓴 것이기 때문에 ‘동족(同族) 혹은 족속(族屬) 가운데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이라는 의미가 강한데 옛날에는 씨족 혹은 부족끼리 연합해 국가를 이뤘기 때문에 다른 씨족의 사람과 구분하기 위해 위와 같은 글자가 만들어지게 됐을 것이다. 이에 대해 ‘우(友)’는 ‘우(又)’자가 겹쳐진 것으로써 오랫동안 관계를 맺어 친해진 사람(親舊)들끼리 서로 왼손과 오른손을 맞잡고 사이좋게 일 한다는 뜻이다. ‘붕’ 자와 마찬가지로 회의문자(會意文字)에 속하는 글자다. 동족의 친구를 ‘붕’이라고 하는데 대해 이 ‘우’자는 동족이 아닌 친구에게 사용했다. 군주의 부름을 받아 조정에 나가게 되면 향당(鄕黨)을 벗어나게 된다. 그때 외지에서 만나 뜻이 일치해 사이좋게 지내게 된 사람, 이런 사람을 ‘우’라고 불렀다. 그러다 뒤에 이르러 서로 다른 씨족과 부족들이 하나의 국가 사회로 통합 재편되면서 이러한 구분이 사라지게 됐다. 그때부터 동족 친구에게도 ‘우’라는 말을 사용하고 동족 출신이 아닌 친구에게도 ‘붕’이라 말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붕우’라는 말이 ‘뜻을 같이 하는 친구’라는 뜻으로 널리 사용된 것도 이때부터다. 다만 증자 당대에는 아직 이러한 구분이 일상화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때만 해도 각 나라들은 고유한 문화와 정체성을 지니고 타국과 대립하며 국가 사회를 이뤘다. 하긴 ‘국가(國家)’라는 말도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이 하나로 통일되기 전(漢이전)에는 사용되지 않았던 말이다. 이에 대해서는 별도로 논할 계제(階梯)가 있을 것이다. ‘신(信)’이라는 글자는 말 그대로 ‘사람이 하는 말’이란 뜻이다. 예전에는 사람이 하는 말에는 거짓이 없다고 믿었던 것 같다. 고어(古語)에 ‘亻口’》 라는 글자와 ‘亻心 ’라는 글자가 있다. ‘신’ 자와 같은 뜻을 가진 글자다. 이를 테면 ‘인(仁)’자를 ‘忈(인)’으로 쓰던 때의 글자라고 보면 될 것이다. 논어에도 ‘옛 사람들은 사람이 하는 말에는 거짓이 없다고 믿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공자의 제자 중에 재아(宰我)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말을 아주 잘 해서 외교관으로 크게 활약했다. 그런데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아 공자에게 늘 꾸중을 들었다. 공자가 재아에게 한 말 가운데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예전에 나는 사람의 말을 들으면 그것이 모두 사실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재아의 말을 듣고 난 뒤부터 그것이 거짓임을 알게 됐다.” 붕우와 교제할 때 믿음을 주려고 했다는 것은 자신이 한 말은 꼭 지키려고 했다는 뜻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말에는 벗을 대할 때 진실된 마음으로 대했는지에 대한 반성의 의미가 담겨 있다. ‘신(信)’과 ‘성(誠)’은 서로 통하는 글자기 때문이다. 물론 약속을 했다 해 무조건 지켜야 된다는 의미는 아니다. 약속의 내용이 ‘의(義)’에 어긋날 경우에는 지켜야 할 하등의 의무가 없다. ‘의’를 다하는 것이 ‘충’이듯 ‘의’에 어긋나는 것을 이행하는 것은 ‘신’이 아니다. 참된 자세(誠)가 아닌 것이다. 이것은 용기(勇)라는 것이 힘만 쓴다고 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다. ‘용기’라는 말은 의로운 일에 힘을 쓰는 경우에만 사용할 수 있는 말이다. 시정의 잡인들이 개인 간의 이해 때문에 사용하는 완력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마지막으로 증자는 ‘자기는 즐겨 하지 않으면서 남에게는 익하라며 전한 것은 없는지’ 반성했다고 한다. 이치에도 맞지 않은 일을 남에게 하라고 권하는 것은 일견하기에도 옳은 처사가 아니다. 자신이 원하지 않는 일은 남에게도 시키지 않아야 하며 자기에게 하지 않았으면 하는 일은 나 역시 남에게 펼치지 않아야 한다. 그런 ‘서(恕)’ 마음으로 임해야 비로소 견강부회(牽强附會)의 아집이 사라지는 것이다. (이 傳不習乎에 대한 일반적 해석은 ‘전수받은 것을 복습했는가’다. 그런데 이렇게 읽으면 문의 취지에 부합하지 않는다. 그래서 생각한 대로 해석했다.)
‘학이편’ 제4장은 제3장에 있는 ‘巧言令色, 鮮矣仁’과 함께 읽어야 그 의미가 분명해진다. 제3장의 함의는 ‘성실함이 없는 외모에는 인(仁)이 없다’는 뜻이다. 인(仁)은 성실함 가운데 있다는 것을 넌지시 일깨워주는 교훈이다. 증자 학단의 제자가 공자의 말(제3장)을 음미하다가 증자의 말에도 이에 부합하는 뜻을 지닌 가르침이 있음을 알고 혹 이 말이 공자의 말에서 유래한 것이 아닐까 의심해 공자의 말(제3장) 다음에 부가했을 것이다. 증자는 공자의 ‘일이관지(一以貫之)’의 도를 ‘충서(忠恕)’로 해석했다. ‘충서(忠恕)’와 ‘충신(忠信)’은 ‘인’의 수행을 동적인 측면과 정적인 측면에서 파악한 것이다. 문자만 다를 뿐 같은 뜻을 지닌 도덕이다. 모두 ‘인’을 이루는 데 필요한 덕목이다. 증자는 공문 제자 중에서도 굼뜨기(屯)로 유명했던 사람이다. 대신 그에게는 매사에 대해 차근차근 곱씹어 보는 버릇이 있었다. 이러한 성정은 그대로 그의 학단 학풍이 됐다. 그리고 3전 제자인 맹자 대에 이르러 심술론(心術論 內心修養論)으로 정착했다. 말이나 생각·행동 등이 느린 반면 매사를 곰곰이 되짚어 보는 습관이 있었던 증자로서는 ‘충’과 ‘신’을 다하는 것만이 ‘인’을 이루기 위한 최적의 방법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중용의 ‘신독(愼獨)’ ‘공구(恐懼)’ ‘성(誠)’ ‘경(敬)’, 맹자의 ‘존양(存養)’ ‘성찰(省察)’ 그리고 ‘진심(盡心)’ ‘지성(知性)’ ‘지천(知天)’으로 이어지는 심술(心術) 체계는 모두 증자가 중시했던 덕목들이다. 어쩌면 이런 학풍이 있었기에 그 학단을 잘 키울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한(漢) 이후의 국가 사회의 통치 이념과 학술 정신은 모두 증자 문하에서 나왔다.

<이 강좌는 홍성문화원과 함께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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