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자가 인정을 보이면 백성도 인정을 중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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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자가 인정을 보이면 백성도 인정을 중시한다
  • 손세제 철학박사
  • 승인 2018.12.09 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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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 아카데미<9>
사진 출처= https://image.baidu.com

증자가 말했다. “부모의 상사에 슬픔을 다하고 제사에 공경을 다하면 백성의 덕이 돈후한 데로 돌아갈 것이다.”

신(愼)은 마음을 뜻하는 ‘忄’과 사람(匕)이 사방팔방(八)에서 바라본다(目)는 ‘眞’이 결합된 문자다. 마음을 세밀하게 쓴다는 뜻인데 ‘몸가짐이나 언행을 조심하다’, ‘삼가고 근신하다’, ‘참되다’의 뜻으로 사용된다. 한편 종(終)은 실타래를 뜻하는 ‘糸’와 겨울을 뜻하는 동(冬)이 합쳐진 문자로 바느질을 마친 뒤 ‘실타래 감는 일을 매듭짓는다’는 뜻이다. 이후 ‘마치다’는 뜻이 됐다. ‘冬’은 네 계절의 끝이니 여기에 실타래를 뜻하는 ‘糸’가 덧붙으면 다 감긴 실타래의 실의 끝이라는 뜻이 된다. 여기서 ‘끝’이라는 뜻이 나오게 됐다. ‘마치다’, ‘끝내다’, ‘생을 마치다’, ‘죽다’, ‘이뤄지다’는 뜻으로 사용되는 글자다. 신종(愼終)이란 바로 이 ‘삼가다’는 뜻을 가진 ‘신’과 ‘마치다’는 뜻을 가진 ‘종’이 합쳐진 말인데 ‘마지막을 세밀하게 매듭짓는다’, 사람의 인생에 비유하면 ‘돌아가신 분을 삼가서 모신다’는 뜻으로 보면 될 것이다. 

유학은 ‘인간다움(仁)’을 이상이요 가치로 하는 학문이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사람답게 살고 싶은 마음, 사람으로 대우 받고 싶은 마음을 구현하는 데 그 목적이 있는 학문이다. 그런 마음(人情)이 부모가 자식에게 바라는 마음이다. 부모와 자식 간의 정은 매우 특별하다. 태어나 가장 처음 만나는 사람이 부모인 까닭이다. 그들 간의 사랑은 이익을 얻기 위해 펼치는 사랑이 아니다. 대가를 바라지 않는 ‘무관심적’ 사랑이다. 그런 까닭에 부모와 자식 간에 일어나는 사랑의 감정은 보편적 인류애의 시작이요 바탕이 된다. 부모가 자식을 돌보지 않거나 자식이 부모를 버려두는 것을 가장 큰 부끄러움이요 죄악으로 여긴 것도 이런 배경에서 나온 것이다.

한편 자식 된 입장에서 보면 부모는 나를 있게 한 존재다. 마치 하느님이 인간을 창조했다 하여 하느님을 속세의 아버지와 구별해 ‘참아버지’라 부르며 따르듯 사람이라면 누구나 받들고 따라야 하는 것이 부모에 대한 섬김이다. 그래서 살아계실 때에도 그 예(禮; 孝)를 다하고 돌아가셨을 때도 그 예를 다하며, 제사를 모실 때에도 그 예를 다해야 한다고 가르쳤던 것이다. 상례(喪禮)를 중시하는 것도 이런 문화적 심리적 배경에 기인한다. ‘상(喪)’이라는 문자는 사람(人)이 도망해 와서 숨는다(乚)는 뜻을 지닌 ‘亾’ 자와 이 ‘없어진 자(亡者)’를 위해 소리 내 운다는 뜻을 지닌 ‘곡(哭)’ 자가 합쳐진 글자인데, ‘亾’과 ‘哭’ 모두 ‘없어진 자’를 전제로 하기 때문에 이들 글자에는 기본적으로 ‘분리(分離)되어 없어지다’는 뜻이 있게 됐다. 곧 ‘나무에서 나뭇잎에 떨어져 나감’ ‘살아 있는 세계와 분리됨’ ‘사람이 (죽어서) 이 세상에서 없어짐’ 등의 의미가 더해졌다. 남편(夫)을 여읜 아내(婦)를 ‘미망인(未亡人)’이라고 한다. 이것도 이런 뜻에서 비롯된 것이다. 요컨대 ‘사람이 죽어 없어짐’이란 뜻인데 그 죽어 없어진 이를 세밀하고 삼가서 대하는(愼終) 형식이 바로 상(喪) 곧 상례(喪禮)다. 한편 ‘곡(哭)’ 자는 ‘외친다’는 뜻을 지닌 ‘훤(吅)’과 개를 뜻하는 ‘견(犬)’이 합쳐져 ‘울부짖는다’는 뜻을 지니게 된 문자인데 누군가가 ‘없어졌다(亾)’는 말을 들으면 그를 위해 슬퍼해 우는 것(哭)이 인간의 보편적 정서다. ‘상’에 슬퍼함이 따르는 이유다. 공자는 ‘예’의 근본에 대해 묻는 임방(林放)에게 상례(喪禮)의 근본은 ‘상’을 치르는 형식(‘易’)이 아니라 망자를 위해 슬퍼하는 마음(戚)이라고 했다. 상례에 참여할 때는 조의금을 많이 부조하는 것보다 망자를 위해 슬퍼하고 울어주는 것이 더 가치 있는 일인데 요즘 세상은 갈수록 거꾸로 되어 가는 것 같다.

다음은 추원(追遠)이다. 추(追)는 쉬엄쉬엄 간다는 뜻을 가진 ‘辶(辵)’ 자와 군대가 모인 언덕을 뜻하는 ‘𠂤’ 자가 합쳐진 문자인데, ‘辶’이 뜻을 나타내고 ‘𠂤’이 음을 나타낸다. 형성문자(形聲文字)다. 쉬어 가면서 천천히 가지만 결코 중단함이 없다는 뜻에서 ‘쫓다’ ‘이루다’ ‘서로 이어져 맞닿다’ ‘따르다’ ‘뒤따르다’는 뜻으로 어의가 확장됐다. 한편, ‘원(遠)’은 쉬엄쉬엄 간다는 뜻을 가진 ‘辶’ 자와 그 자락이 치렁치렁하게 늘어져 있는 옷을 가리키는 ‘袁’ 자가 합쳐진 문자인데 치렁치렁한 옷자락처럼 천천히 쉬지 않고 끝까지 간다는 뜻에서 길다→멀어지다→멀다→오래되다→멀리하다→소원하다는 뜻이 됐다. 추원(追遠)이란 바로 이 ‘중단 없이 쫓는다’는 ‘추’와 ‘치렁치렁한 옷처럼 아주 멀리 간다’는 ‘원’이 합쳐진 말인데, ‘멀리 가신 분을 따른다’는 뜻에서 전해 ‘조상의 유지를 받는다’는 의미가 됐다. 보통 ‘제사를 모신다’는 의미로 사용되지만 그 함의는 매우 깊다. 곧 유학은 인간의 정을 바탕으로 성립한 학문이다. 그리고 그 정 가운데 으뜸은 ‘인간답게 살았으면 하는 마음’이다. 이것이 부모가 자식에게 바라는 마음이다. 부모(조상)의 제사를 모신다는 것은 부모의 뜻을 받들겠다는 것이니, 그 바탕에는 ‘인간다움을 이뤄내겠다’는 의지가 자리하고 있을 것이다. ‘인’의 구현은 죽어서까지도 힘써야 하는 절대 명령인 셈이다.

‘사람이 사람답지 않은데 예악(禮樂)은 차려 무엇하랴’(팔일편3)는 말이 있다. 사람답지 않는 사람이 올리는 제사는 귀신이 흠양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지식과 재물·권력과 명성을 이뤘다 해도 사람답지 못한 짓을 하면 부모는 늘 걱정한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요 권불십년(權不十年)이라는 말이 있다. 부귀영화는 생각만큼 오래 가지 못한다. 추세(追勢)해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세(勢)는 인간의 보편적 정서에 어긋나고 그것을 거스르는 방향으로 전개되는 예가 흔하다. 인정(仁政;道)을 펼치겠다며 즉위한 황제도 현실 정치에 들어서면 어김없이 세를 규합한다. 조정에 나가면 반드시 백성을 위한 정치를 하겠다고 다짐한 선비들도 정치를 하려면 ‘세’와 ‘력’이 필요하다는 사실 앞에 아연실색한다. 어느 쪽이든 인간다움의 구현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다. 부모와 조상이 바라는 것이 인간다움을 이루는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를 지켜내지 못한다. 그래서 제사를 지내는 날에는 늘 부모와 조상을 뵐 면목이 없는 것이다. 그저 송구할 따름이다. 김좌진 장군 생가지에 가면 대한민국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이 장군을 위해 세운 거대한 비석이 있다. 그 비문 마지막에 이런 글이 새겨져 있다. ‘장군(將軍)을 추원(追遠)하나이다.’ 장군은 독립운동에 헌신하기 전에는 ‘억강부유(抑强扶柔)’를 실천했고, 독립운동에 참여한 뒤에는 ‘사생취의(捨生取義)’를 매달고 독립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쳤다. 그 업적이 너무나도 지대해 대한민국장에 헌정된 분이다. 광복을 맞이했다고 하지만 청산해야 될 잔재들이 아직 수도 없이 남아 있다. 그런 현실을 안타깝게 생각해 어떻게 해서든 역사를 바로 세우겠다며 ‘장군의 뜻을 따르겠습니다’라고 한 것 같은데 위원장의 말대로 그 일이 뜻대로 잘 되어 가고 있는지 잘 모르겠다. “백성의 덕이 돈후한 데로 돌아갈 것이다”는 말은 지도자가 ‘신종추원’하는 모습을 보이면 백성들도 지도자를 믿고 그와 함께 인간다움을 이루는 노정에 참여하게 된다는 뜻인데 그 본래 자리로 돌아가는 모습이 마치 산이 두텁게 겹쳐 있는 듯(厚) 매우 성대하다고 한다. 돌아간다(歸)는 말에 주의해서 보면 백성들도 애초에는 ‘인간다움’을 이루기 위해 숱한 노력을 감내했을 것이다. 그런데 사는 게 힘들어 조금씩 뒤로 미루게 됐고 불의와 세력을 쫓는 혹리(酷吏)와 오리(汚吏)들이 들끓자 이제는 자신에게 그런 마음이 있었는지조차 잊게 되었을 것이다.

미자편 제10장에 이런 말이 있다. “군자는 친애(親愛)하는 마음을 버리지 않아야 한다. 대신에게는 할 만한 일을 골라 줘서 나라를 원망하는 일이 없게 해야 한다. 중대한 잘못이 없다면 오래 사귄 벗을 버리지 말아야 한다. 한 사람에게 모든 재능이 갖추어져 있기를 바래서는 안 된다.” 주공(周公)이 그의 아들인 백금(伯禽)에게 일러준 말이라고 하는데 주(周) 이전에는 우수한 인재를 등용하려 하지 않고 오히려 죽이거나 혹은 죽을 때까지 재야(在野)에 있게 해 인재가 드물었다고 한다. 이에 대해 주(周)는 인재들을 예우하고 재능에 따라 일을 하게 해서 인재들이 넘쳐 났다(미자편11·周有八士)고 한다. 우수한 인재들이 벼슬하는가 혹은 민간에서 몰세(沒世)하는가 하는 것은 군주에게 달려 있다는 뜻이다. 군자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정서인 상례와 제례에서 ‘인간다움’을 보이면 백성들도 그에 감화돼 인간다움을 이루는 데 힘쓴다. 세상의 상하는 항상 영향을 주고받는다. 지배자가 인정에 반하는 정사를 펴면 백성들은 모진 사람으로 변한다. 반면에 인정에 순응한 정사를 펴면 백성들은 어진 사람으로 변한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일어나는 각종 비인간적 사건들은 지도자들이 정치를 잘못해서 일어난 것이다. 지도자들의 언행은 백성들에게 귀감이 된다. 그릇된 것을 바로잡아달라며 권력을 주었더니 제 잇속 챙기느라 밤새는 줄 모른다. 사는 게 힘들어 울부짖으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당최 모르겠다’고 한다. 언로(言路)는 닫혀 있고 민생은 갈수록 피폐되고 있다.

‘민무신불립(民無信不立)’이라고 했다. 인정(人情)을 무시하고도 나라가 바로 설 수 있을까? 서경(書經)의 탕서(湯誓)에 “이 태양은 언제나 없어질꼬? 내 너와 함께 망하련다”는 말이 있다. 요즘 들어 증자(曾子)의 이 말이 자주 생각나는 것은 어째서일까? 깊이 살펴봐야 할 일이다.

<이 강좌는 홍성문화원과 함께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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