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마(金馬), 202년간 ‘마한(馬韓)’의 ‘수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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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마(金馬), 202년간 ‘마한(馬韓)’의 ‘수도’였다”
  • 한관우 발행인
  • 승인 2023.07.06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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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지국 도읍 터, 백월산 아래 월산리, 금마 봉수산 아래 월암리
홍주(洪州)나 운주(運州)라는 지명 이전에 ‘금마국(金馬國)’ 수도
마한(馬韓) 소국의 수도 홍북 석택리, 지금은 충청남도청소재지
금마천(삽교천).

지금의 충남 홍성군은 충청남도의 행정중심 도시다. 지난 2006년 2월 충청남도청 이전지로 확정된 이후 2009년 6월 기공식을 시작으로 ‘충남도청 이전 신도시가 조성됐다. 이후 2012년 12월 충청남도청과 충청남도의회 등 충남의 행정기관이 홍성군 홍북읍 일원의 충남도청 이전 신도시인 내포신도시로 차례로 이전했다. 명실공히 홍성 땅으로 충청남도 행정수도의 이전이 이뤄져 ’충청남도청소재지‘가 됐다. 하지만 홍성 땅은 충청도를 대표하는 중요한 행정도시로 2000여 년에 걸쳐 오늘까지 그 역할과 기능을 유지해 오고 있는 곳으로 확인되고 있다.

홍성의 행정중심도시 문제는 충남도청의 이전이 확정된 2006년 2월 이전, 충남도청 유치에 관심이 쏠리던 1990년대부터 지역의 관심 있는 학자들을 비롯해 논객들의 주장으로 본격 제기됐다.

지난 2000년 1월 한국일보 기자 출신으로 당시 청운대학교 기획처장을 맡고 있던 김양수 교수가 ‘홍성, 행정중심 도시의 어제와 오늘’이라는 주제의 강연에서 “홍성이 옛부터 행정중심도시였다는 기록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중국의 위치에 나오는 월지국의 수도가 홍성의 금마천(金馬川) 변에 자리 잡은 것으로 시작됩니다. 

그 뒤 홍성은 마한 54개국 중 감해비리국의 수유, 즉 수도였습니다. 감해비리국은 백제 초기의 고막부리이며, 고막 또는 감해라는 말의 어원을 찾으면 ‘금마(金馬)’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고막부리에서 부리는 부락 즉 마을이 됩니다. 이와 같이 홍성은 고려 때의 홍주(洪州)나 운주(運州)라는 지명 이전에 ‘금마국(金馬國)’이었고, 오늘의 삽교천(揷橋川)은 장항선 철도가 개통돼 삽교가 생긴 뒤의 명칭일 뿐 옛날에는 모두가 금마천으로 홍성은 금마천의 상류 지역이 되겠습니다”라는 주장을 밝힌 이후부터 관심을 끌기 시작했다. 

김 교수는 이러한 논제를 제시한 이후 같은 해 8월 8일 많은 업적을 남긴 채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김 교수는 당시 “월지국의 도읍 터는 지금의 백월산 아래 월산리가 중심이 돼 금마 화양들판을 거쳐 금마의 봉수산 아래 월암리에 이르는 일대가 되겠다”며 “금마 천변동네라고 하는 구룡리를 옛날에는 고모리라 불러 뱃길이 닿았던 교역장소로, 오늘날 홍성역 일대를 고암리 또는 속칭 고모랭이로 부르는 것이 모두 월지국과 관련된 역사적 사실에서 나온 것”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기록에 의하면 삼한 시대 마한(馬韓)에 소속된 소국인 ‘감해비리국(監奚卑離國)’은 금마천(金馬川) 유역인 홍성군 금마면 지역으로 비정된다. ‘감해’는 ‘감개’로도 발음하므로 홍성군 금마면(金馬面)의 옛 이름인 ‘대감개(大甘介)’와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BC 1세기∼AD 3세기경 한강(漢江) 유역으로부터 충청·전라도 지역에 분포돼 있던 여러 정치집단의 통칭이다. ‘삼국지 동이전’에는 마한지역에 위치한 54개 소국의 명칭이 기록돼 있다. 큰 것은 1만여 가(家), 작은 것은 수천 가였다고 한다. 규모가 큰 곳의 지배자는 신지(臣智), 작은 곳은 읍차(邑借)라고 했다.

고대에는 한반도를 한(韓)이라 부르거나, 마한(馬汗)이 다스린 한(韓) 지역이라는 뜻으로 마한(馬韓)이라고도 불렀다. 또 왕검조선 때 한반도를 다스린 마한(馬汗)을 달님의 아들이라는 뜻으로 월지(月支) 또는 달지(達支)라 불렀기 때문에 마한(馬汗)이 다스린 한반도 지역을 한(韓), 마한(馬韓) 또는 월지(月支)라 불렀다. B.C 238년에 왕검조선이 멸망하자 한(韓) 지역은 독립세력이 됐고, 해모수(解慕漱)가 세운 고구려(高九黎)의 세력권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B.C 194년에 기자조선(箕子朝鮮)의 유민(遺民)인 기준(箕準)이 무리를 거느리고 만주 남부에서 한반도로 이동해 지금의 평안도 지방에 거주한 한(韓) 무리들을 공파(攻破)해 나라를 세우고 나라 이름을 마한(馬韓)이라 불렀다. 

마한은 이도(移都)한 그해 한(韓) 무리들의 반격을 받아 기준(箕準)은 죽고 남은 무리들은 대장군 탁(卓)의 인솔로 지금의 홍성(洪城) 금마(金馬)로 남하했다. 한수(漢水) 이남으로 쫓겨난 기자조선 유민들은 홍성 금마(金馬)에 도읍(수도)을 두고 나라 이름을 이전처럼 마한(馬韓)이라 불렀다. 마한세계(馬韓世系)에는 기준(箕準)이 1세 왕으로 적혀 있다. 

이는 기준(箕準)이 B.C 194년에 지금의 평안도 지방으로 이동, 마한(馬韓)을 세웠기 때문이다. 마한세가(馬韓世家)에는 마한왕(馬韓王)의 후손 3인 중 1인은 선우씨(鮮于氏), 1인은 한씨(韓氏), 1인은 기씨(奇氏)를 칭했다고 적혀 있다. 현재 선우씨, 한씨, 기씨의 세가보에는 윗대 선조에 마한세가에 적혀 있는 마한왕의 이름이 적혀 있고, 윗대 선조에는 기자조선왕의 이름이 기자조선세계(箕子朝鮮世系)에 적혀 있다. 

또 홍성 금마(金馬) 마한(馬韓)의 존속기간이 2세 강왕(康王) 무신년부터 202년간으로 적혀 있다. 이 마한(馬韓)은 A.D 9년 온조백제의 공격을 받고 멸망했다. 홍성 금마(金馬) 마한(馬韓)이 멸망하자 금강(錦江) 이남지역의 소국(小國)들은 익산(益山) 금마(金馬)를 수도로 새로운 마한연맹을 만든 후, 홍성 금마(金馬) 마한(馬韓)의 후예(後裔)를 왕으로 옹립, 나라 이름은 역시 마한(馬韓)이었다.

이와 같이 막강했던 고대국가 마한의 수도가 홍성이었다는 사실에서 충남도청 등 행정기관 이전의 당위성과 연유를 찾아야 할 것이다. 특히 지난 2006년 충청남도청 이전 진입도로 건설과정에서 확인된 홍북 석택리 유적이 마한(馬韓)에 해당하는 원삼국시대 환호취락이 조성된 구릉부가 금마천(삽교천)과 신경천의 합수 지점인 점에 주목한다. 석택리 유적이 국읍에서 향한 제천행사와 관련된 공간으로 전문가들은 마한(馬韓)의 소국과 수도가 위치했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평기한다. 따라서 마한시대 홍성은 중심부인 백월산 아래 월산리, 금마의 봉수산 아래 월암리 일대, 홍북 석택리 일대가 중심지 역할을 했던 곳으로 확인되고 있다. 특히 홍북 석택리 유적은 마한(馬韓) 사회의 중심지로 마한(馬韓)에서 백제로의 변화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곳이라는 평가에 주목하고 있다.

따라서 고대국가 마한(馬韓) 소국의 수도가 있었던 금마 월암리와 홍북 석택리, 홍성 월산리, 고려 때는 홍주목(洪州牧)이 있었고, 조선시대 북으로 평택에서 남으로 서천에 이르는 22개 군현을 다스렸던 곳, 지금은 충청남도청소재지로 지방행정의 중심도시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러한 역사·문화적 콘텐츠를 어떻게 살리고 활용해 지역의 정체성을 찾느냐의 문제가 최대의 과제이자 지역발전과 홍성군정의 핵심요소이다.

결론적으로 홍성의 수많은 지역의 역사인물을 포함해 고대국가의 수도였다는 점, 고려시대 홍주목, 조선시대 22개 군현을 다스렸던 행정중심도시, 지금의 충청남도청소재지에 이르기까지 풍부한 역사·문화적 소재를 활용한 스토리텔링 등을 통한 전략적이고 정책적인 과제의 실현을 통해 지역의 발전과 정체성을 살리는 일이 무엇보다 절실히 요구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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