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부터 고향 학생에 장학금, 2000년 ‘너른내장학회’ 설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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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부터 고향 학생에 장학금, 2000년 ‘너른내장학회’ 설립”
  • 홍주일보
  • 승인 2023.08.09 1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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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더에게 삶의 길을 묻다 〈7〉
나의 삶, 나의 길-편기범 국제스피치학회장·너른내장학회 이사장 〈3〉

홍성 광천 출신으로 전국 스피치 웅변대회에서 1967년 대통령상 197호, 1971년 대통령상 457호, 1977년 대통령상 861호 등 대통령상(大統領賞)을 3회 수상한 웅변인이다. 국내에서 가장 많은 연설 지도 경험이 있는, 40년 넘게 서울에서 웅변을 가르친 웅변계 대부(代父)로 불린다. 고향인 광천에서는 ‘기부계 대부’로 통한다. 법무연수원, 경찰대학, 경찰종합학교 스피치학 초빙교수, 행정안전부 인재개발원 스피치학 초빙교수를 역임했다. ‘편기범 웅변연설집’과 ‘8주 완성 웅변 연설 비결’ ‘선거 연설의 방법과 실제’ 등 다수의 책을 집필, 책을 펴내기도 했다. 2021년 37년 만에 고향인 광천으로 귀향했다. 귀향 이후 2021년 광천중학교총동문회 체육대회 대신 연탄 나누기 봉사를 시작으로 ‘광천을 말하다’ 연사로 광천 발전의 대안을 제시하기도 했으며, 광천의 75세 이상 독거노인 130여 명에게 연탄과 쌀, 떡국 등의 나눔 행사도 하면서 고향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지를 고민하며 실천하고 있다. 지난 1979년 쌀 한 가마니가 3만 원이던 시절 광천초등학교 졸업생 10명에게 매년 장학금 50만 원씩을 후원하기 시작해 44년에 걸쳐 한 해 동안 모은 돈 30~40%씩을 떼어 66차례 7억여 원의 장학금을 기부해 오고 있다. 2000년 ‘너른내장학회’를 설립해 너른내장학회 이사장을 맡고 있다. 홍주신문의 ‘리더에게 삶의 길을 묻다’ 5번째 기획으로 ‘나의 삶, 나의 길’ 웅변 인생, 기부 인생-편기범 국제스피치학회장·너른내장학회 이사장 편을 ‘한국산문 김미원’의 글을 게재한다. 【편집자 주】

■ 인생관을 바꾼 기부 인생

선생은 목청 터지게 가르쳐 번 돈으로 1979년부터 고향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기 시작해 2000년에는 너른내장학회를 설립했다. 44년 동안 66차례 7억여 원을 기부했다.

“성경에 왼손이 하는 일 오른손이 모르게 하라는 말도 있지만 광천뿐 아니라 다른 데서도 이렇게 장학금 주는 사람이 생겼으면 좋겠다 해서 시작했지요. 고향의 산 이름을 딴 오서산장학회, 편기범장학회 등을 생각하다가 ‘너른내장학회’로 결정했어요. 너른내라는 말은 광천(廣川)의 순수한 우리말인 ‘너른내’에서 따왔어요. ‘너른’은 사전에 사방으로 힘차게 뻗어나간다는 뜻도 있어 더 좋았어요. 다른 장학금과 다르게 공부 잘하고 못하는 거 관계없이 제일 가난한 사람에게 줍니다. 1979년 쌀 한 가마니가 3만 원인 시절, 광천초등학교 졸업생 각 5만 원씩 10명에게 매년 50만 원씩 후원하기 시작했어요. 학교 진학을 포기했는데 입학금 낼 수 있었다, 교복을 살 수 없었는데 교복을 살 수 있어 감사하다는 편지에 장학사업의 의미를 깨달아 계속했어요. 인생관이 바뀌더라고요. 장학생을 선발하는데도 원칙을 정했어요. 10명 중에 7명은 가정 형편이 어려운 학생, 3명은 공부 잘하는 학생을 선발해 지급했는데, 어느 날 공부 잘하는 학생이 장학금을 받아 동네잔치를 했다는 얘기를 들은 이후에는 10명 모두 가정 형편이 어려운 학생에게 줬어요. 장학금을 유용하게 쓸 수 있는 사람, 그런 학생에게만 지급한다는 원칙이 자연스럽게 정해졌죠. 부유한 사람, 안 받아도 되는 사람에게는 장학금에 대한 유용성이 별 효과가 없어요.”

그는 장학금 수여식에서 ‘달리기를 할 때 처음부터 끝까지 1등을 지키는 사람도 있지만 출발선에서 넘어지는 사람도 있다. 여러분이 넘어졌는데도 불구하고 일어나 포기하지 않고 완주를 하고 인생의 운동장을 1등으로 골인해라, 여러분이 받은 거 이자 붙여 다른 사람에게 갚으라’고 말한다.

어느 해인가 홍성군에서 너른내장학회의 뜻에 동감한다며 장학금으로 3억 원을 기부하겠다는 제안이 왔었는데, 이런 제안은 편 이사장의 고집상 받아들일 수 없었다고 한다. 

군에 정중하게 사양하면서 홍성군에서도 장학회가 필요할지 모른다는 권유를 했다. 이를 계기로 홍성군에서도 ‘홍성사랑장학회’를 만드는 계기가 됐다. 

지난 2004년에는 청양군수와 개인적인 친분으로 가정형편이 어려운 가난한 학생들에게는 장학금을 줄 필요성이 있다는 조언을 하게 되면서 청양군에서도 장학회를 만드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고 전한다.

“쏟아지는 지도 요청에 세달 씩 기다리는 사람이 있을 정도로 돈을 벌었지만 40년 동안 생기는 대로 써서 큰돈은 모으지 못했어요. 돈이란 자존심 상하지 않을 정도로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해요. 나는 있는 돈 주는 게 아니고 1년 열심히 일해서 모아 거기서 30~40%를 주는 거예요. 고향 떠나 서울에서 살 때는 강연을 많이 해 넉넉하게 줄 수 있었는데, 요즘은 벌이가 좋지 않아서 걱정이에요(웃음).”

대학 동아리에서 만나 군대 갔을 때 매일 하루 한 통씩 편지를 주고받던 아내는 같은 곳을 바라보는 남편의 지지자이다. “천식 환자인 아버지가 소리 질러가면서 번 돈인데 장학회를 만들고 싶어 하시는 아버지의 뜻을 하시고 싶은 대로 해드리자”라며 자식들에게 말해 2000년 너른내장학회가 출발할 수 있도록 함께해 준 아내가 고맙다고 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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