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78돌 특별기획③-김좌진과 김영숙의 첫 딸 ‘산조(山鳥)’의 비극적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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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78돌 특별기획③-김좌진과 김영숙의 첫 딸 ‘산조(山鳥)’의 비극적 출생
  • 한관우 발행인
  • 승인 2023.08.31 0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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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시역.
산시역.

김좌진이 김영숙을 부인으로 맞은 1927년 봄에는 해림에 잡은 집에서 다니면서 활동하는 일이 많았다. 그러나 그해 가을부터 활동 중심을 산시로 옮겨 해림의 집으로 다니는 일이 점차 드물었다. 때로는 한 달에 한 번도 들르지 못했다.

이듬해 봄이었다. 김영숙이 만삭인데도 김좌진은 형편을 아는 둥 마는 둥 얼굴을 들이밀지도 않았다. 해림에 왔다가도 밤이 되면 산시로 돌아갈 때가 많았다. 정해식 노인은 생각다 못해 김좌진과 한발 가까운 곳에서 보살피도록 김영숙을 해림과 산시의 중간지점인 동산시(산시 동쪽 4㎞)로 보냈다. 칠가툰(七家屯) 마을에 사는 동포인 이동호(李東浩)의 집에 급히 방 하나를 준비해두고 언제 출산할지 모르는 만삭의 김영숙을 그곳으로 보내기로 했던 것이다. 

정 노인은 영숙의 남동생(15살)을 딸려 보내며 산길이니 누나를 잘 보살피라고 거듭 당부했다.
그러나 일은 이 길에서 벌어졌다. 벌써부터 주시하는 눈이 있었던 것이다. 김좌진의 아내를 암살하려는 흉수들이 미행하고 있었음을 누구도 몰랐다.

길을 중간쯤 갔을 때였다. 먼 거리 걸음은 조산을 촉구했다. 마침 남동생이 앞으로 퐁퐁 뛰어가 보이지 않자 김영숙은 슬그머니 숲속으로 들어갔다. 한 발만 옆으로 들어서면 사람이 보이지 않는 숲이었다.

김영숙은 숲속에서 아이를 낳았다. 바로 이때였다. 뒤를 밟던 괴한들이 해산하고 맥없이 누워있는 김영숙을 좀 더 깊숙이 끌고 가 살해했다. 어질고 착한 김영숙이었건만 20살의 꽃다운 나이로 사라지고 말았다.

사연은 극적으로 벌어졌다. 흉수들이 자취를 감춘 직후 김기철, 김좌진. 강익선과 별동대원 둘을 합쳐 5명이 동산시에서 해림으로 오다가 산중에서 웬 애 울음소리가 들려오기에 따라가 보니 발가벗은 갓난애가 바둥거리며 울고 있었다. 그들은 하도 이상해 주위를 살피다 점점의 핏자국을 발견했다. 따라가보니 처참한 광경, 난도질당한 김영숙이었다.

김좌진은 눈물 한방을 흘리지 않았다. 이로써 의지가 꺾일 김좌진이 아니었다.

김기철 등은 흥분 속에서 시체를 매장한 뒤 핏덩이 아이를 싸안고 돌아왔다. 김좌진은 과묵해졌다. 격분을 일로 삭여나갔다. 팔로들은 김좌진의 딸에게 ‘산에서 낳은 애’라는 뜻에서 ‘산조(山鳥)’란 이름을 지어주었다. 또 어떤 이들은 애가 너무 작아서 ‘소조(小鳥)’라고도 불렀다. 산조는 동냥젖으로 두어 달 자랐다. 그러나 너무 힘겨웠다. 나중에 김좌진의 주장에 못 이겨 성씨가 이가인 중국인 집에 주었다. 산조는 다행스럽게도 친아버지인 김좌진 장군의 품을 떠나 중국인 이씨 성을 가진 젊은 양부모 밑에서 무럭무럭 잘 자라고 있었다.

1930년 1월 27일 오전 10시경, 만주지방의 유지 95명이 백야 김좌진 장군이 숨을 거둔 산시로 모여 장의준비위원회를 열고 장군의 장례식을 사회장으로 할 것을 결의한 후 장례식 날짜와 필요한 준비물에 대해 구체적으로 의논을 했다. 하지만 너무나 추운 계절이라 곧바로 꽁꽁 언 땅을 파고 매장한다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우선 초빈(草殯)을 해뒀다가 날씨가 풀리면 정식으로 장례식을 치르기로 결정을 했다.

북만주의 겨울 추위는 상상을 초월할 만큼 혹독하기만 했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봄이 돌아오자 산과 들은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꽁꽁 얼어붙었던 땅도, 모두 녹고 날씨는 화창하기만 했다. 독립군들은 서둘러 정식으로 장군의 장례식을 마친 후 후사를 잇는 문제를 놓고 진지한 토론을 벌이게 됐다. 

그런데 이때 독립군 원로 가운데 한 명이 입을 열었다.

“장군님께서 남기고 가신 하나밖에 없는 혈육이 있지 않습니까?”

“그렇지만 남자아이도 아니고 여자아이며, 지금은 엄연히 중국 사람의 자녀가 됐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제 와서 무슨 수로 아이를 다시 데려옵니까?”

“그건 염려하지 마십시오. 제가 책임지고 다시 아이를 찾아오겠으니 우선 여러분의 의견을 하나로 통일시켜 주시는 게 급선무입니다.”

김좌진 장군의 딸인 어린 산조가 핏덩어리일 때 맨 먼저 달려와 태를 끊어주고 겉옷으로 싸서 독립군 마을로 데리고 와 동냥젖을 얻어 먹이며 친자식처럼 돌봐주던 김기철 노인은 산조를 중국집에서 다시 데려와 독립군들이 키워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결국 산조를 다시 데려와 16살이 되기까지 지극정성을 다해 길러준 양부 김기철과 양모 김분희는 과연 어떤 사람들 이었을까?

본명이 성범(成範)이고 별명이 치화(峙和)인 김기철 노인은 1909년 한일합방에 불만을 품고 반일운동을 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돼 3년 동안이나 억울하게 감옥살이를 했다. 그러나 이후에도 조국을 빼앗아 간 일본을 그냥 둘 수가 없다고 생각해 계속 반일운동을 하다가 다시 체포됐는데, 겨우 감옥에서 탈출해 김좌진 장군보다 몇 년 앞서 중국으로 망명을 했다. 김기철 노인은 김좌진 장군의 아버지와 함께 서당에서 공부를 같이 했던 사람으로 김좌진 장군보다 20살이나 많았다. 자식과 같은 또래의 김좌진 장군을 도와 독립군을 이끌어가는 원로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었다.

본래 양반가문에서 태어났고 독실한 대종교의 신도였으며, 일본의 도쿄에서 명문대학 경제학부를 졸업한 경력이 있는 김기철 노인은 독립군에서 사무책임자로 일하면서 군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러시아로 장삿길을 다니는 등 많은 고생을 하기도 했다.

또한 김기철 노인의 아내인 김분희 역시 마음씨가 착하고 선량한 여인으로 역시 대학공부까지 마친 지식인이었다. 조국의 독립혁명에 뜻을 품고 있다가 홀아비로 지내던 김기철을 조선에서 만나 부부의 연을 맺고 만주로 따라왔는데 남편인 김기철과는 나이가 스물네 살이나 차이가 났다. 또한 남편인 김기철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과 딸이 있었는데, 아들의 이름은 두문이며, 양녀인 산조보다 13살 위였고, 딸은 영조라고 하는데 4살이 많았다.<계속>
 

해림시 전경.
해림시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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