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공산이 토해낸 강돌들이 만들어낸 한밤마을 돌담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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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공산이 토해낸 강돌들이 만들어낸 한밤마을 돌담길
  • 취재·글=한관우/사진·자료=한지윤·이정아 기자
  • 승인 2019.11.03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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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돌담길의 재발견-20
한밤마을 돌담은 하천으로 굴러온 강돌로 차곡차곡 쌓은 것이 특징적이다.
한밤마을 돌담은 하천으로 굴러온 강돌로 차곡차곡 쌓은 것이 특징적이다.

950년경 남양 홍씨에서 갈라진 부림 홍씨가 입향하면서 촌락을 형성
마을 앞 하천으로 굴러온 강돌들을 차곡차곡 쌓아서 돌담장을 만들어
강돌 자연스럽게 축조한 돌담길, 곡선형의 옛스런 골목길 정취 자아내


경북 군위군은 명산인 팔공산을 사이에 두고 대구광역시와 맞닿아 있는 고장이다. 팔공산이 북쪽으로 팔을 뻗은 산자락 아래 대율리라는 아담한 마을이 있는데, 순수 우리말로 한밤마을이라 불리는 이 마을은 제주도를 닮은 돌담으로 유명하다. 예로부터 돌이 많았던 한밤마을은 그 돌을 그대로 이용해 마을이 형성됐다고 전해진다. 한밤마을은 경북 군위군 부계면에 자리한 전통마을이며, 돌담마을이다. 팔공산에서 흘러온 물줄기가 한밤마을의 동쪽과 서쪽 양편에서 지나다가 북쪽에서 만나 남천을 이룬다. 이 마을은 950년경 남양 홍씨에서 갈려 나온 부림 홍씨의 시조 홍란이란 선비가 입향하면서 촌락을 형성했다. 그 무렵 의홍 예씨, 신천 강씨 등도 마을로 들어왔으나 모두 떠나고 현재는 여양 진씨, 전주 이씨, 예천 임씨, 영천 최씨, 고성 이씨 등이 부림 홍씨 일족과 어울려 살고 있다. 마을은 본래 심야(深夜) 또는 대야(大夜)라고 불리던 곳이다. 1390년 무렵 한밤마을에 부락을 이룬 부림 홍씨의 14대손 홍노라는 사람이 마을 이름 안에 밤 야(夜)는 좋지 않다 해 음이 같은 밤 율(栗)로 대율(大栗)로 고쳐 불렀는데, 한밤은 대율의 이두 표현법이다. 현재까지 대율리(大栗里)라는 이름으로 불리는데, 동네 이름으로 인해 밤이 풍성한 마을로 짐작하기 십상이지만, 군위 한밤마을에 밤나무는 많지 않고 오히려 호두나무가 눈에 더 많이 보인다. 이름에 얽힌 사연에 따르면 처음 이곳에 마을을 이루고 살던 사람들은 일야(一夜)라는 이름을 썼고, 950년경에 이르러 대야(大夜)라고 고쳤다 한다. ‘일’이나 ‘대’는 크거나 많음을 뜻하므로, 팔공산 북쪽 편의 너른 산자락에 바짝 붙은 마을이라 밤이 길다는 의미로 이름이 붙여졌다는 것이 정설이라고 한다.
 

■ 돌담축조, 강돌 이용한 막돌허튼층쌓기
한밤마을에 이르자 가장 먼저 반기는 것은 솔숲이다. 마을 입구에는 140여 그루의 소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다. 일명 성안 숲으로 불리는 이 송림은 지난 2006년 문화체육관광부가 ‘전국 10대 마을 숲’ 중 하나로 지정한 곳이다. 임진왜란 때 홍천뢰 장군의 훈련장으로 사용된 송림이라고 한다. 숲 속에 장군의 기념비와 진동단, 효자비각 등이 세워져 있다. 2007년부터 2009년까지 3년 동안 잡목제거와 함께 연못과 장군 기념비, 개천 등을 재정비해 완벽한 마을의 쉼터로 다시 태어났다고 전한다. 성안 숲에서 살펴봐야 할 것은 마을의 입구에서 보면 오른쪽인 도로 서쪽 숲 안에 있는 진동단(鎭洞壇)이라는 이름의 돌로 쌓아 올린 솟대다. 화강암으로 세운 솟대의 꼭대기에는 오리 한 마리가 앙증맞게 자리를 잡고 있는데, 이 진동단은 한밤마을의 풍수지리학적 위치와 연관이 있다. 배의 형세를 띤 한밤마을이기에 돛대 또는 닻의 역할을 하는 진동단을 세워 ‘움직임을 다스려’ 달라고 기원을 하는 것이라고 전한다. 특히 1930년의 대홍수 이후로는 그 필요성이 더욱 절실해진 것인지, 현재의 진동단 솟대는 1966년 아예 화강암으로 세운 것이라 한다. 이와 관련해 한밤마을에는 어디에도 우물이 없다. 마을 자체가 배의 형상이니 우물은 배에 구멍을 뚫는 거나 마찬가지란 이유에서다. 우물이 없는 것이 마을이 형성된 때부터인지, 대홍수 이후부터 만들어진 금기인지는 알 수 없지만 말이다.

숲을 지나자 오른쪽으로 한밤마을로 드는 길이 나타난다. 한밤마을의 명물인 돌담길은 총연장 4㎞에 이른다고 주민들은 설명한다. 한밤마을은 팔공산이 토해낸 돌들이 만들어낸 돌담길마을이다. 물줄기와 함께 마을 앞 하천으로 굴러온 돌들을 차곡차곡 쌓아 담을 만들었던 것이다. 비단 하천에만 돌들이 많은 것은 아니었다. 밭을 일구기 위해 땅을 파면 거기서도 맨 돌만 나왔는데, 그것도 역시 담이 됐다. 그렇게 수십 수백 년 마을이 제자리를 잡아가는 동안 돌담도 높아지고 또한 길어졌던 것이다. 이제 그 돌담길은 마치 제주도를 연상시킬 정도다. 그래서 혹자들은 한밤마을을 ‘육지 속의 제주도’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 돌담길을 따라서 마을로 들어간다. 자동차 한 대가 충분히 지날 만큼 널찍한 길이다. 돌담은 대략 1~1.5m 높이로 쌓여 있다. 한밤마을의 돌담은 제주도와 다른 점은 외담이 아니라는 것이다. 제주도는 담을 한 겹으로 쌓았지만, 이곳에서는 강돌을 이용해 마치 성곽처럼 폭을 넓게 잡아서 쌓았기 때문이다. 어떤 곳은 그 폭이 1m를 훌쩍 넘길 정도로 넓게 쌓았다. 무너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기보다 워낙 많은 돌들이 나와서 주체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는 표현이 맞는 듯싶다. 축조방법은 강돌을 이용한 막돌허튼층쌓기로 하부가 넓고 상부가 다소 좁은 형태로 쌓았다. 전체적으로 이 지역에서 채집된 강돌로 자연스럽게 축조된 돌담은 전통가옥들과 잘 조화를 이루고 있고 곡선형의 옛스러운 골목길의 정취를 자아내고 있으며 보존 또한 잘 돼 있는 편이다.

한밤마을의 돌담길은 두 유형으로 분리된다. 좁은 길과 넓은 길이 있는데, 사실 대부분이 좁은 길이었다. 넓을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1960~70년대 새마을운동의 열풍이 불면서 많은 길이 ‘초가지붕을 없애고, 마을길도 넓힐 때’ 변화의 바람을 따랐다. 물지게를 지고 가면 서로가 피해주어야 지나가던 길인데, 이제는 거뜬히 차량이 통행이 가능한 넓이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옛담 그대로가 남아 있는 구석구석이 있다. 정비를 하지 않았으니 담도 삐뚤빼뚤 쌓였고, 폭도 좁다. 하지만 거기에는 세월의 흔적과 무게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 푸른 이끼가 돌담을 덮고 있으며, 호박덩굴이 그 담을 자연스럽게 타고 넘는다. 애써 가꾸지 않아도 아련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며 마음을 푸근하게 세월을 재촉하지 않는 그런 길이다. 

■ 돌담에 자리 잡은 세월의 더께들
돌담길은 마을 중앙의 대청으로 이어진다. 이 대청은 조선 전기에 지어진 것으로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62호로 지정돼 있다. 임진왜란 때 소실됐다가 인조 10년(1632년) 중창됐다. 효종과 숙종 때 고친 적이 있고, 1992년에 완전 해체·복원했다. 본래 학생들을 가르치던 곳이었는데 지금은 동네의 사랑방 구실을 하고 있다. 동네 어른들이 이곳에 삼삼오오 모여 화투를 치거나 장기를 두면서 심심함을 달랜다고 한다. 여름과 가을철 대청을 훑고 지나는 바람이 좋아 여행객들이 마을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느라 지친 다리를 이곳에서 풀기도 한다.

대청 옆은 남천고택이다. 상매댁이라고도 불리는데 100년 이상 된 한옥이 20채가 넘는 한밤마을에서도 가장 크고 오래된 집이라고 한다. 조선 후기인 1836년 지어진 것으로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357호로 지정돼 있다. 중문채와 아래채도 있었으나 광복 이후에 철거됐고, 대문채도 살짝 옮겨졌다고 한다. 지금은 사랑채와 안채, 사당이 남아 있다. 현재 이 집은 부림 홍씨 29대 손인 홍석규 씨가 지키고 있다. 이 집의 막내아들로 영남대병원에서 일을 하다가 명예퇴직을 하고 활발히 한밤마을을 보전하는데 힘쓰는 한 사람으로 통한다. 한밤마을에는 부림 홍씨 종택도 있는데, 이 집의 역사는 그리 길지는 않다고 한다. 제2석굴암 부근에 종택이 있었는데, 화재로 소실돼 한밤마을로 옮겨왔다. 현재 10대째가 살고 있는 흔치 않은 종택이다. 

상매댁에서는 한옥체험관광객들을 위해 방을 내어준다. 사랑채인 쌍백당이 그곳이다. 사랑채 우측 돌담 옆에 오래된 잣나무 두 그루가 서 있어서 잣나무 백(柏)자를 써서 쌍백당이다. 이곳에서는 매월 한 차례 해설이 있는 작은 음악회를 열기도 한다. 한밤마을에는 이밖에도 20곳 가량의 정자와 재실이 산재해 있다. 또한 보물 제988호로 지정된 석불입상도 하나 있다. 통일신라 때 만들어진 것으로 한밤마을 대율사 경내에 있다. 이러한 한밤마을은 돌담 위로 심심치 않게 보이는 감나무, 산수유나무 등의 풍성한 광경이 오히려 자급자족을 하던 시절의 증거가 아닐까. 한창시절의 어린 아이들에게는 군침 깨나 흘리게 했을 풍경이다. 돌담에 자리 잡은 세월의 더께가 쌓인 이끼와 담쟁이덩굴도 반갑게 느껴지는 마을, 돌 틈을 비집고 나온 여러 종류의 꽃들과 어디선가 들려오는 풀벌레 소리도 편안함을 더해준다. 잡풀 없이 말끔한 강돌담장과 이끼와 덩굴에 가려 형상조차 보이지 않는 강돌담장, 시선만 주면 안이 훤히 보이는 낮은 강돌담장을 가진 집들, 내부가 궁금해 까치발을 들게 하는 높은 강돌담장을 가진 마을의 집들은 제 멋대로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일정한 규칙 속에 쌓인 한밤마을 돌담이 가진 매력은 아닐까.

<이 기획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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