납작돌과 황토 절묘한 조화, 고성 학동마을 옛 돌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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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작돌과 황토 절묘한 조화, 고성 학동마을 옛 돌담장
  • 취재·글=한관우/사진·자료=한지윤·이정아 기자
  • 승인 2019.12.01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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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돌담길의 재발견-24
고성 학동마을 토석담은 아래부터 큰 납작돌을 쌓고 위로 작은 납작돌과 진흙으로 쌓아올렸다.
고성 학동마을 토석담은 아래부터 큰 납작돌을 쌓고 위로 작은 납작돌과 진흙으로 쌓아올렸다.

마을을 개척하며 점판암 돌과 황토 흙으로 바른층쌓기 돌담 예술적
학동마을 돌담은 시루떡 층층이 쌓아놓은 듯 아름다운 경관을 연출
바깥사람들 집안사람 눈치 보지 않고 배고픔 달래라는 배려의 구멍


오랜 세월 비바람 견뎌온 돌담, 고향집에라도 들른 듯, 포근함으로 다가서고 분주함에 너무나 익숙해진 우리네 일상과는 사뭇 다른 ‘느림의 미학’을 제대로 즐길 수 있는 곳이 바로 경남 고성군 하일면 학동마을 돌담길이다. 고성군 하일면(下一面) 학림리(鶴林里)에 있는 학동마을은 단아한 돌담길의 옛 정취와 고즈넉한 시골마을의 넉넉한 풍경을 만끽할 수 있는 곳이다. 우리나라에서 돌담장이 옛모습 그대로 가장 잘 보존된 이 마을은 2006년 6월 19일 등록문화재 제258호로 지정된 전주최씨 안렴사공파의 집성촌으로 1900년대에 들어오면서 150여 세대가 모여 살았으나 지금은 50여 세대 100여 명이 거주하고 있다.

고성 학동마을은 350년 전 전주최씨 입향조가 가솔들을 이끌고 들어와 자리를 잡은 집성촌이다. 서기 1670년경 전주최씨 선조의 꿈속에 학(鶴)이 마을에 내려와 알을 품고 있는 모습이 나타나자, 날이 밝아 그 곳을 찾아가 보니 과연 산수가 수려하고 학이 알을 품고 있는 형국이므로, 명당이라 믿고 입촌, 학동이라 명명하면서 형성된 유서 깊은 마을로 전해진다. 현재 마을 뒤에는 수태산 줄기가, 마을 앞에는 좌이산이 솟아 있는 소위 ‘좌청룡우백호’의 지세이며 마을 옆으로는 학림천이 흐르고 있어 전통마을의 배산임수형 입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마을의 가옥은 상당부분 새마을운동 당시 슬레이트로 개량됐으나 문화재자료 제208호 ‘육영재’, ‘최씨고가’ 등 일부 전통가옥이 보존돼 있어 전통마을로서의 면모를 갖추고 있다.

공룡발자국 화석과 공룡박물관으로 유명한 상족암군립공원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고성 학동마을 옛 담장’이 있는 이 마을(경남 고성군 하일면 학림리 917-1)은 학이 알을 품은 형상이라 학동마을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마을 어귀에는 ‘학동(鶴洞)’이라 새겨진 큰 바위가 길손을 맞는다.

 

■ 학동마을 돌담, 돌과 황토 절묘한 조화
학동마을의 담장은 수태산 줄기에서 채취한 납작돌(판석 두께 3~7㎝)과 황토를 결합해 바른층으로 쌓은 것으로 다른 마을에서는 볼 수 없는 고유한 특징이 있다. 건물의 기단, 후원의 돈대 등에도 담장과 동일한 방식으로 석축을 쌓아 조화를 이루고 있다. 남도의 정취가 물씬 풍기는 마을 주변 대숲과 잘 어우러져 수백 년을 거슬러 고성(古城)으로 끌어들이는 듯한 마을 안길의 긴 돌담길은 아름다운 경관을 연출하고 있으며, 황토빛 돌담길을 따라 걷노라면 아련한 고향의 정취를 느낄 수 있다.

특히 학동마을의 돌담장은 돌과 황토가 절묘한 조화를 이루면서 돌담만이 가진 독특한 곡선미와 자연미가 빼어나다. 처음 마을을 개척하면서 얻어진 점판암 계통의 돌과 황토 흙으로 바른층 쌓기를 했는데, 그 모양새가 가히 예술적이다. 담장의 길이만도 2300~2500m에 이르는데, 납작 돌로 쌓은 돌담장, 토석담 위에는 개석이라는 널찍한 돌을 얹어 담을 보호하고 있는 것도 재미있다. 차곡차곡 쌓아올린 돌 하나에는 300여 년의 역사와 정성이 고스란히 묻어있다.

학동마을의 돌담장은 이 마을에서 출토되는 황토에는 골재성분이 많이 포함돼 있어 굳게 되면 단단해지고 오랜 세월이 흘러도 잘 변하지 않는 특성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돌담에 쓰인 돌은 변성암 계통의 점판암으로 마을 뒷산인 수태산 줄기에서 채취한 납작돌과 황토를 결합해 바른층으로 쌓고 맨 위에는 기와나 짚 대신 구들장 판석을 얹었는데 그 모양이 갓 쓴 양반처럼 품격을 갖추고 있다. 다른 마을에서는 보기 드문 마을 고유의 특징이 잘 드러나 있다. 긴 돌담은 시루떡을 층층이 쌓아놓은 듯 아름다운 경관을 연출하고 있다. 마치 일부러 납작하게 깎아낸 듯한 돌판을 시루떡 쌓듯 올린 모양새다. 큰 돌덩어리를 쌓아 빈틈을 흙으로 메워가는 형식인 일반적인 담장과는 그 생김새부터 확연히 다르다. 두께 2~3㎝에서 두껍게는 7㎝까지 되는 납작돌을 깔고 그 위에 시멘트처럼 흙을 바른 뒤 다시 납작 돌을 올린 형식은 얼핏 봐도 세련돼 보인다. 이렇듯 토석담은 아래부터 1m 높이까지는 큰 납작돌을 쌓고, 그 위에 작은 납작돌과 진흙을 쌓아 올린 뒤 맨 위에 큰 판석을 올리는 방식으로 쌓아 올렸다. 건물의 기단, 후원의 돈대 등에도 이와 같은 방식이 사용돼 담장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재밌는 것은 이렇게 쓰인 돌이 인공적으로 만든 게 아니라 자연석 그대로라는 것이다. 담장 상단을 마무리한 솜씨도 재밌다. 전통 담장이 돌과 흙으로 벽을 쌓고 마무리를 기와로 하는 반면, 이곳 담장은 벽을 쌓는 판석을 담장 상단에도 그대로 올렸다. 대신 담장 머리에 올린 돌은 벽으로 쌓은 돌보다 1.5~2배 정도 넓다. 이런 돌을 자연스럽게 겹쳐 쌓아 지붕 역할을 하도록 했다. 아무렇게나 쌓아올린 듯해도 빗물이 아래에 깔린 돌이나 벽으로 흐르지 않는다고 한다. 300년 전부터 해온 방식이라는 것이다.

다른 지역에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하고 독특한 양식으로 안채와 사랑채, 고방채, 토담으로 잘 쌓은 창고, 집안의 텃밭, 마을의 특색인 돌 축대, 축대위로 토담과 넓은 돌덮개 지붕으로 된 닭장, 안채 뒤 장독대는 계단식 돈대로 그 면적이 상당히 넓고 고풍스러움을 풍긴다. 학동마을 담장은 돌만으로 쌓아 올린 기초부분인 강담과 흙과 돌을 섞어 쌓은 토담, 그리고 덮개석으로 이뤄진 특징을 가지고 있다. 대부분의 농촌 마을들이 새마을운동을 거치며 옛 돌담을 허물고 시멘트 블록으로 만든 벽을 만들었던 것과 비교되는 대목이다.

 

■ 매사고택, 배려와 나눔 정신 밴 돌담
뿐만 아니라 황토빛 돌담길을 따라 걷노라면 아련한 고향의 정취와 더불어 어린 시절 추억들이 하나하나 되살아나는 듯한 정감을 느낄 수 있어 좋다. 여기까지는 어쩌면 이름난 마을이면 가끔 찾아볼 수 있는 풍경들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돌담의 겉모습만 보지 말고 그 속살을 엿보면 탐방객의 생각을 뛰어넘는 위대한 정신이 숨어있음을 알게 된다. 골목을 거닐다 보면 주변보다 규모가 큰 저택을 볼 수 있다. 담을 쌓는 방식은 같으나 높이는 좀 더 높다. 그리고 사람 눈높이 정도에 네모난 구멍을 발견할 수 있다. 학동마을의 돌담은 대체로 위나 아래쪽에 이렇게 개구멍이 있는 것으로 끝나는데, 매사고택의 대문 양쪽 담에 어른 키 높이쯤 주먹 두 개가 들어갈 만한 구멍이 뚫려있다. 담장 밖에 사는 배고픈 사람들에게 음식을 내주거나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곡식을 갖다 놓았던 구멍이라고 한다. 이는 바깥사람들이 집안사람의 눈치 보지 않고 배고픔을 달래라는 배려의 구멍이다. 이 구멍 속에 담긴 정신은 그야말로 노블리즈 오블리제의 표본이라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부자 마을은 많지만 하나의 단위 마을에서 이처럼 고결한 정신이 담겨있는 곳을 찾기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매사고택의 안채와 사랑채 사이에 있는 굴뚝의 높이는 어른의 무릎보다 약간 높다. 낮은 굴뚝은 밥을 지을 때 나는 연기가 밖으로 나가면 양식이 없어 굶는 사람들의 마음이 더욱 힘들어진다고 바깥쪽으로 연기가 나가지 않게 하려는 주인의 배려 정신이 잘 드러나 있음을 볼 수 있다.

한편 이 마을의 오래된 담장과 고가는 마을을 감싸고 있는 대나무 숲과 잘 어우러져 특별한 풍경을 만들어내고 있다. 대표적인 곳은 참봉댁으로 불리는 최영덕 고가다. 정면7칸 측면4칸의 전통목조 건물인 사랑채를 포함한 모든 건물은 일자형 평면 구조로 우진각 지붕의 안채 외에는 모두 팔작지붕 건물이다. 사랑채 마루에는 사철 햇볕과 바람이 잘 들어오고 집 뒤의 대밭은 사철 푸르러 언제나 청량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이밖에 경상남도 문화재 자료 208호로 지정된 육영재는 문중의 후세를 교육하기 위해 1723년에 마을 옆 서쪽 계곡에 세운 서당으로 6·25한국전쟁 때 이 부근 하일국민학교가 불탔을 때는 초등학교 전교생이 4년간이나 여기에서 공부를 했던 곳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담장너머로 수줍게 얼굴을 내민 붉은 장미와 진녹색의 담쟁이 넝쿨이 어우러진 돌담길을 따라 아이의 손을 맞잡으며 아련한 옛 정취를 느껴 보는 것은 어떨까?

<이 기획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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