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도 상주(古都尙州), 1500년 역사 간직한 경상도의 대표 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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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도 상주(古都尙州), 1500년 역사 간직한 경상도의 대표 고을
  • 취재=한관우·김경미 기자
  • 승인 2020.11.07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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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의 역사를 담은 땅, 지역의 정체성과 미래를 묻다 〈9〉
경상도의 대표고을 경상북도 상주시 전경.

경상도(慶尙道), 경주(慶州)와 상주(尙州)의 첫 자를 따서 붙여진 이름
신라 법흥왕 때 상주(上州), 경덕왕 때 상주(尙州)로 개칭해 현재 지명
 하얀색 특산물 쌀, 목화, 누에고치 세 종류 일컫는 ‘삼백(三白)의 고장’
명주의 고장인 상주 함창의 개성과 특징 활용 도시재생프로젝트 성공

 

경상북도 상주시는 낙동강을 낀 비옥한 토지를 가진 곡창지대로 경북의 서북단에 위치하고 있다. 옛 부터 물자가 풍부해 성읍국가시대 부터 사벌국, 고령 가야국의 부족국가가 번성했으며, 261년(첨해왕) 사벌국이 멸망하면서 525년(법흥왕 12) 사벌주를 상주(上州: 신라 6주의 하나)로 부르기 시작했고, 757년(경덕왕 16)에 ‘상주(尙州)’로 개칭해 1주(州) 10군(郡) 30현(縣)을 관할하면서 1500년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고도(古都)다. 통일신라시대에는 전국 9주(九州), 고려시대에는 전국 8목(八牧) 중의 하나였다. 경상도(慶尙道)의 이름도 경주(慶州)와 상주(尙州)의 첫째 자를 따서 붙여진 이름이다. 경상북도의 경(慶)은 경주(慶州)를 뜻하며, 상(尙)은 상주(尙州)를 일컫는다. 고려시대 충숙왕 원년(1314년)에 경주(慶州)와 상주(尙州)의 머리글자를 따서 경상도(慶尙道)로 개칭한 이후 조선조에서도 그대로 시행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오늘날의 경상도 명칭은 이때 생긴 것이다. 상주의 옛 이름은 낙양(洛陽)이었고, 낙양의 동쪽을 흐르는 강이라고 해서 낙동강(洛東江)이라는 이름도 붙여졌다.

조선시대에는 관찰사가 상주목사를 겸하는 등 웅주거목의 고도다. 상주는 사방으로 9개 시·군과 접해있고 전체면적이 1254만 69㎢이며 인구는 지난 9월 말 현재 9만 7689명이다. 또한 삼백의 고장으로 불릴 만큼 쌀, 곶감, 누에고치가 유명하고 함창의 명주, 모동의 포도, 감식초, 배, 참기름 등 특산물도 많이 생산되고 있다. 교통은 국도3호선과 25호선이 통과하고 있으며 경북선 철도가 김천에서 영주까지 연결돼 있고 상주와 인접한 예천에 공항이 있어 교통이 편리하다. 또 상주~여주, 상주~청주, 당진~상주고속도로가 있어 상주를 오가는데 더욱 편리해졌다고 전한다. 
 

■ 산이 웅장하고 들이 넓은 삼백의 고장
경상북도의 서북부에 위치한 상주(尙州)는 고대 성읍국가(城邑國家) 시대부터 사벌국(沙伐國)과 고령가야국(古寧伽倻國)이 있었던 유서 깊은 고장이다. 조선시대에는 임진왜란 전까지 경상감영(慶尙監營)이 있었던 곳이다. 경상도의 대표적인 고을로 신라 법흥왕 때 상주(上州)라 불렀던 것을 경덕왕 때 상주(尙州)로 개칭하면서 지금의 지명이 생겼다. 또 달리 상산(商山)이라고도 불러 상주의 역사를 기록한 책 이름도 ‘상산지(商山誌)’다.

경상도 백성들이 한양으로 가는 길에 마주치는 백두대간을 넘어가는 고개는 크게 보아 죽령(竹嶺)과 조령(鳥嶺)인데, 신라시대와 고려시대는 죽령을 이용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조령이 관로(管路)가 돼 주로 이 고개를 통했는데 고개를 넘기 전에 이르는 가장 큰 고을이 상주다. 상주는 북으로는 조령 아래 첫 고을 문경(聞慶)과, 서쪽으로 속리산(俗離山) 너머 충북 보은(報恩)과, 남으로는 백화산(白華山) 너머 충북 황간(黃間)과, 동쪽으로는 갑장산(甲長山) 너머 경북 선산(善山)과 접해 있는 사통팔달(四通八達)의 고을이다.

상주의 이러한 지형적인 특징을 간파한 이중환은 ‘택리지(擇里志)’에서 “상주의 다른 명칭은 낙양이며 조령 밑에 있는 하나의 큰 도회지로 산이 웅장하고 들이 넓다. 북쪽으로 조령과 가까워서 충청도, 경기도와 통하고, 동쪽으로는 낙동강에 임해서 김해, 동래와 통한다. 운반하는 말과 짐을 실은 배가 남쪽과 북쪽에서 물길과 육로로 모여드는데, 이것은 무역하기에 편리한 까닭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경상북도와 충청북도가 접하는 지역에 자리한 상주는 예로부터 ‘삼백(三白)의 고장’으로 불렸다. 이러한 연유로 상주를 ‘삼백(三白)의 고장’이라 한 것은 하얀색의 특산물이 생산되기 때문인데 쌀, 목화, 누에고치의 세 종류를 일컫는 것이었다. 최근에 와서는 목화는 생산이 거의 없어 그 자리를 곶감이 대신하고 있다고 한다. 쌀은 공검지라는 큰 못이 삼한시대에 이미 건립돼 상주평야의 너른 들판에 넉넉하게 물을 대주니 생산량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고 전한다. 누에고치는 일본강점기 때 상주농잠전문학교를 세워 잠업을 장려하면서 생산량이 많았으며, 곶감은 상주의 상징 나무로 집집마다 서너 그루의 감나무가 있을 뿐만 아니라 감나무를 대량으로 심어 놓은 감나무 밭까지 많아 생산량이 풍족하다는 것이다. 오늘날까지도 상주의 대표적인 상품으로 지역 경제에 이바지하고 있다.


■ 상주의 정체성 담은 도시재생에 심혈
상주에서 가장 북쪽에 자리한 ‘함창’은 현재는 상주에 속한 한적한 읍이지만,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현령이 다스리던 독립된 현이었다고 한다. 읍내 남쪽 언덕엔 심상치 않은 모습의 고분이 보이는데, 바로 고령가야 태조의 무덤이라고 전해온다. 임진왜란이 일어나던 1592년(조선 선조 25) 경상도 관찰사 김수와 함창 현감 이국필이 ‘고령국 태조 가야왕릉’이라고 새겨져 있는 묘비를 발견해 가야왕릉임을 확인했다고 전한다.

역사적으로 보면 우리나라에서 누에치기를 시작한 지는 4000년쯤 됐는데, 함창읍은 신라시대부터 명주 산지로 이름난 곳이었다. 하지만 한때는 산기슭을 온통 차지했을 뽕밭은 지금은 많이 줄어들었고, 양잠농가도 더불어 사라져 예전 명성에는 미치지 못한단다. 그러나 요즘도 함창 장날엔 명주장이 설 정도로 그 전통이 이어지고 있다는 설명이다. 은척면 두곡리라는 곳에는 ‘은척뽕나무’로 불리는 350여년쯤 된 늙은 토종뽕나무가 있는 것도 이 고장의 누에치기가 아주 오래됐음을 알려주는 상징이란다.

산업화, 공업화, 도시화에 밀려 인구가 유출되면서 근대화 시절 25만 명에 달하던 상주의 인구가 지금은 10만 명을 지키기에도 벅차다고 전한다. 이제는 10만 명 인구 지키기도 깨져 지난 9월 말 현재 9만 7689명이다. 명색은 도·농복합시지만 침체일로에 있어 인구 10만 명  지키기에 비상이 걸려 인구 늘리기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는 절박한 심정이라고 전한다. 이를 위한 방편으로 지역의 정체성을 담은 도시재생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는 설명이다. 상주 함창의 금상첨화 길은 도시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현재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뛰어난 도시재생 사례로 꼽힌다고 소개한다. 이 프로젝트는 2014년부터 시작됐으며 일회성으로 그치지 않고 오늘날까지도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 도시의 정체성을 담아냈다는 점, 지역 주민과 지방자치단체 그리고 지역 출신의 예술가들이 협력하여 이뤄낸 도시재생이란 점에서 성공적인 사례라 볼 수 있다는 설명이다. ‘상주 함창만이’가진 특색을 활용해 도시재생을 하는 것이 프로젝트를 성공으로 이끄는 가장 큰 요인인데, 상주의 금상첨화 길은 그 점에 매우 충실했다는 설명이다. 삼백의 도시이자 명주의 고장인 상주 함창의 개성과 특징을 십분 발휘했기 때문에 함창을 찾은 관광객들은 다른 지역에서 찾아볼 수 없는 특별한 경험을 할 수 있다고 전한다. 

상주의 동쪽은 낙동강과 접해 있는데 이곳에는 사벌국의 유적과 경천대(擎天臺)와 양진당(養眞堂)이 있다. 경천대는 낙동강 1300리 물길 중 경관이 가장 아름답다는 ‘낙동강 제1경’의 칭송을 받아온 곳이다. 경천대의 옛 이름은 ‘하늘이 스스로 만든 아름다운 곳’이란 뜻의 ‘자천대(自天臺)’였다. 지금의 이름은 병자호란 이후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청나라의 볼모가 돼 심양으로 갈 때 수행했던 우담(雩潭) 채득기(蔡得沂)가 고향으로 낙향, 이곳의 풍경에 반해 무우정(舞雩亭)이라는 정자를 짓고 머물면서 경천대라 했다고 한다. 임진왜란 당시 명장 정기룡(鄭起龍) 장군이 무예를 닦고 말을 훈련시켰다는 전설을 담은 흔적들이 경천대 바위 위에 ‘말 유구’로 남아 있다고 한다.

경상북도 서부에 있는 상주시(尙州市)는 낙동강을 낀 비옥한 토지를 기반으로 삼한시대엔 사벌국(沙伐國)이라는 부족국가가 번성했다. 신라가 249년(첨해왕 1) 이곳을 합병하고 사벌주(沙伐州)라 불렀다. 525년(법흥왕 12)에는 2경(京) 5주(州)의 하나인 상주(上州)가 됐으며, 757년(경덕왕 16) 지금의 명칭인 상주(尙州)가 됐다고 한다. 고려시대에도 상주라고 불렸으며, 983년(성종 2) 목사(牧使)를 뒀고, 조선 세종 때 경주와 함께 이곳 상주에 경상도 감영(監營)이 설치됐다. 1459년(세조 5) 진(鎭)이 설치되면서 상주는 경상도의 중심지가 됐으나 1593년(선조 26) 임진왜란 중에 감영이 대구로 옮겨감에 따라 상주는 목(牧)으로 낮아졌다. 1895년(고종 32) 23부제(府制) 실시로 상주목은 상주군으로, 함창현(咸昌縣)은 함창군으로 바뀌었다. 1914년 함창군이 상주군으로 통합됐다. 현재 함창읍과 사벌·중동·낙동·청리·공성·외남·내서·모동·모서·화동·화서·화북·외서·은척·공검·이안·화남면을 비롯해 남원·북문·계림·동문·동성·신흥동의 1읍 17면 6동으로 이뤄져 있다. 

 

<이 기획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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