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경사지 삼층석탑(廣景寺址 三層石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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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경사지 삼층석탑(廣景寺址 三層石塔)
  • 한관우 발행인
  • 승인 2020.12.04 0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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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자란 땅’ 천년홍주 100경 〈26〉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59호

원래 광경사(廣景寺)의 옛 터에 당간지주(幢竿支柱)와 함께 남아 있던 5층 석탑이라고 전해진다. 1914년 일본인이 자기 집 정원으로 옮긴 것을 1959년 홍성읍 소향리의 홍성여자중학교 정문 안의 정원으로 옮겨졌다고 전한다. 본래는 구항면 내현리 탑골에 있었다고도 전해진다. 다른 지역의 문화재처럼 일제강점기에 일본인이 개인의 정원으로 옮겨졌던 것이라고 한다. 해방 이후 일본인의 집터에 홍성여중이 개교하면서 그 자리에 있던 석탑을 현재의 자리로 홍성여자중학교가 이전 개교하면서 옮겨와 현재의 자리에 있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석재(石材)는 약한 화강암으로 현재 높이는 3m 정도가 남아 있다. 탑의 세부적인 특징을 보면 탑을 세우기 위한 기단부(基壇部;탑은 크게 기단부와 탑신부, 상륜부로 나뉜다. 그 중 ‘기단부는 지대석과 하부(下部)기단, 상부(上部)기단을 합쳐서 말한다’는 지대석이 결실된 채로  3층 탑신부(塔身部)만이 남아 있다. 하부기단이 매몰 된지는 알 수 없으나 현재는 단층기단이다.

탑신부는 지대석(地臺石;탑이 세워질 지면을 단단하게 다진 후에 놓는 돌. 탑의 최저부·最底部)이 없는 채로 땅위에 직접 하대석(下臺石;석등의 맨 아래에 놓인 받침돌)을 놓고 그 위에 4매의 판석(板石)으로 된 중석(中石)과 1매로 이뤄진 상대갑석(上臺甲石;여러 단으로 된 탑의 기단부의 상대(上臺) 위에 덮은 돌·甲石)을 결구(結構;일정한 모양으로 얼개를 만듦)시켜 맞춘 모습이다. 갑석 아래에는 부연(浮椽; 처마 서까래 끝에 덧얹는 네모지고 짧은 서까래. 처마를 위로 돌리게 해 날아갈 듯한 곡선을 이루게 하는 구실을 한다)이 보이고 초층 받침은 특이하게  4단이다. 

탑신부는 현재 3층만이 남아 있으며, 옥신(屋身;석탑의 몸체를 이루는 돌) 위에 4개의 옥개석을 올려놓았다. 옥신은 각 면석(面石)에 우주를 조각했고, 옥개석은 4단의 층급받침이 남아 있으며 절수구는 없다. 낙수면(落水面)은 물매가 깊은 편이고 완만하며, 네 귀의 추녀선은 가볍게 반전(反轉)됐다.

상륜부(相輪部)에는 상륜은 멸실된 듯하며, 현재 노반석(露盤石) 하나만 남아 있다. 이 석탑은 전체적인 특징으로 보아 신라 석탑을 계승한 고려시대의 석탑임을 짐작할 수 있다.

1층 기단(基壇) 위에 3층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이다. 기단은 각 면의 중앙과 모서리마다 기둥을 본 떠 새겼다. 탑신의 각 층 몸돌과 지붕돌은 각각 하나의 돌로 쌓아 올렸다. 1층 몸돌이 큰 것에 비해 2·3층 몸돌의 높이는 급격히 줄어들었다.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이 4단씩이며, 네 귀퉁이가 살짝 치켜 올라갔다. 전체적으로 안정된 느낌을 주고 고려시대 작품으로 짐작된다. 

광경사지 삼층석탑의 높이는 230㎝ 정도이며, 1층 기단의 탑신은 일부가 깨진 형태를 보이며 정교하게 제대로 맞춰지지 않은 모습을 보이고 있다. 홍성읍 도청대로 29-12(소향리 30-1번지) 홍성여자중학교 정문 안의 정원에 자리하고 있다. 홍성여자중학교의 연혁을 살펴보면 1946년 9월 홍성공립여자초급중학교로 설립, 같은 해 11월 1일 홍성군청 부속사에서 개교했다. 1949년 2월 오관리 교사로 이전한 것으로 돼 있기 때문에 이 때 일본인이 살던 집 정원자리로 학교를 옮긴 것으로 추정된다. 1951년 홍성여자중학교로 개칭됐으며, 1959년 12월 26일 현재의 소향리 교사로 이전한 것으로 돼 있다. 이때 소향리의 현 교사로 이전하면서 오관리에 있던 광경사지 삼층석탑을 함께 옮겨온 것으로 보인다. 

현재 탑이 서 있는 부지는 학교의 재산이 아니라 개인 땅을 학교가 빌려 쓰고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어 광경사지 삼층석탑의 이전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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