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산(志山) 김복한(金福漢) 생가 터·표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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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산(志山) 김복한(金福漢) 생가 터·표지석
  • 한관우 발행인
  • 승인 2020.12.25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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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자란 땅’ 천년홍주 100경 〈27〉
지산 김복한 생가터. 생가가 있었으나 지금은 집을 헐고 생가터 표지석만 남아있다.
지산 김복한 생가.

홍성군 갈산면 운곡리 126번지는 홍주의병과 파리장서를 주도한 지산(志山) 김복한(金福漢, 1860~1924)이 태어난 곳이다. 이곳에는 생가 터가 있다. 생가도 있었으나 지금은 당시의 집이 헐렸다. 다만 잡초만 무성한 생가 터에는 1973년 홍성군에서 건립한 생가 터 표지석만 이 외롭게 자리를 지키며 서 있다.

김복한은 철종 11년(1860) 7월 24일 충청도 홍주군 조휘곡(현, 충남 홍성군 갈산면 운곡리 조실)에서 안동김씨 봉진(鳳鎭)과 연안이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자는 원오(元吾), 호는 지산(志山)이며, 당색은 노론이다. 김복한은 문충공 김상용(金尙容)의 12대 종손이다. 김상용은 병자호란 때 우의정으로 빈궁과 원손을 수행하고 강화도에 피난 갔다가 강화성이 함락되자 순절하며 화의를 반대한 인물이다. 또한 척화파의 거두였던 문정공 김상헌(金尙憲, 호;淸陰, 1570~1652)이 그의 친동생이니 이들의 절의정신과 척화정신은 후손인 김복한의 의병정신으로 계승됐다 할 수 있다. 

김복한의 선대가 홍주(洪州)에 정착한 것은 11대조 광현(光炫) 때부터이다. 김복한은 홍주목사를 거쳐 이조참판을 역임하고 홍주로 내려와 거주함에 따라 후손들이 홍주에서 세거하게 된 것이다. 이후 후손들은 그의 호를 따서 안동김씨 수북공파라 하였으니, 선생은 수북공파의 대종손이 된다. 

김복한은 12살 때인 1871년부터는 예산군 덕산면의 송애에 거주하던 농은(農隱) 이돈필(李敦弼)의 문하에 들어가 수학했다. 15살이 되는 1874년부터는 내종형인 이설의 가르침도 받았다. 그 후 이설과는 관직에 앞뒤를 다투며 나갔으며 홍주에서 을미의병을 일으킨 동지가 되기도 했다. 김복한이 관계에 진출한 것은 31살 때인 1890년 9월 음직으로 선릉참봉에 제수되면서부터다.  1892년 2월 별시로 경시(慶試)가 열렸으며, 이 과거에서 문과의 병과에 급제했다. 문과에 급제한 후인 그해 5월 홍문관 부교리 겸 경연시독관, 춘추관기주관, 사간원 정언 등이 제수되면서, 이제는 경연관으로서 왕에게 강학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다. 6월에는 사헌부 지평이 돼 신정왕후의 제향에 옥책관으로 참여했으며, 10월에는 홍문관 부수찬지제교 겸 경연검토관, 춘추관기사관에 제수됐다.

이때 고종황제의 명에 따라 ‘권상하치제문’을 지어 올렸으며, 11월에는 ‘박성양치제문’을 지었다. 그 다음 해인 1893년 2월에 김복한은 홍문관 부교리, 5월에 홍문관 부수찬, 사간원 헌납, 7월에 홍문관 수찬, 9월에 경연 시강관, 춘추관 편수관, 시강원 사서, 통례원 상례 겸 시강원 사서지제교 등에 제수됐다. 10월에는 정3품 통정대부에 올라 승정원 동부승지 겸 경연 참찬관, 춘추관 수찬관, 형조 참의, 부호군, 성균관 대사성 등을 차례로 받았다. 1894년 3월에는 우부승지에 올라 왕을 측근에서 보필했다. 그러나 그해 6월 갑오변란(甲午變亂) 등 일제의 침략이 노골화되자 김복한은 관직을 버리고 낙향했으며 이후 일체의 관직을 받지 않았다. 

뒤이어 1895년에 을미사변과 단발령이 연이어 터지고, 홍주의 유림 세력들을 모아 의병운동을 일으키도록 지원한다. 그런데 의병세력 중 하나가 배신해 의병운동은 허무하게 실패하고 김복한도 체포돼 문초를 받았다. 곧 풀려나 관직을 받았지만 이를 모두 거절하고 고향에 머문다.

1905년에는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이설과 함께 유림세력을 모아 상소를 올리려 했으나 이설이 서울로 올라가서 상소를 올리자고 해 1905년 12월 2일 상소를 올린다. 상소에는 을사오적의 처벌과 의병세력을 모아 일본을 몰아내 왕실을 회복하자는 내용이 담겨있었다. 그러나 이마저도 이틀 뒤 일제가 김복한을 체포하는 바람에 효과가 없었다. 이때의 고문 후유증으로 건강이 매우 나빠진다. 어느 정도 몸을 추스린 다음엔 1919년에 고종이 승하하고 3·1운동이 일어난다.

이때 김복한은 파리 강화회의에 보내는 독립청원서를 작성하는데 참여했고, 해당 청원서에는 137명이 서명한다. 이 일로 체포돼 다시 옥고를 치르고 출옥하는 것을 반복한다. 출옥 이후 김복한은 서부면 이호리에 ‘인지서재’를 짓고 백록동서원의 규약으로 과정을 만들어 후학을 지도했다. 후학을 양성하며 유림으로 활동하다가 1924년에 순국한다. 김복한은 19세기말 조선사회의 전환기를 실천적으로 극복하고자 고투했던 유학자였으며, 일제의 침략에 위정척사운동과 의병투쟁, 파리장서운동 등 다양한 방법으로 국권을 회복하고자 항일투쟁을 주도했던 걸출한 독립운동가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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