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작가 오명, 후회와 반성 남긴 작가 ‘채만식문학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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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작가 오명, 후회와 반성 남긴 작가 ‘채만식문학관’
  • 취재=한기원·백벼리 기자
  • 승인 2021.06.26 0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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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문학관 활성화 방안을 찾다 〈5〉
군산시 금강하구둑에 위치한 채만식 문학관 전경.

민족의 사회적 현실 작품에 다각적 반영 현실위기·좌절 극복한 작가
채만식, 1925년 ‘조선문단’에 단편소설 ‘세 길로’ 발표 문단에 등장
일제의 회유와 압력, 일제에 굴복 5개월 만에 풀려나 친일작가의 길
채만식, 친일작품 남긴 작가 중 유일하게 후회와 반성의 마음을 남겨

 

전북 군산시 강변로 449(내흥동 285번지) 금강하구둑 시작점에는 ‘탁류’의 소설가 채만식을 기념하는 문학관이 있다. 지난 2001년 3월 20일 문을 연 문학관은 부지면적 9887m²로 1층에는 로비와 전시실, 채만식에 대한 자료와 정보보관실, 2층에는 50석의 토의를 할 수 있는 영상 세미나실이 있다. 금강하구둑에 세워진 160평 규모의 문학관은 정박한 배의 모습을 하고 탐방객들을 기다리고 있다.

작가 채만식은 일제치하의 비인간적 처사와 부당한 침해, 가혹한 검열이 도사리고 있던 사회적 현실에 대해 적절히 대응하며, 미학적 성과를 얻기 위해 풍부한 어휘, 풍자, 반어, 역설, 새로운 구성방식 등 다양한 표현방식을 사용했다. 이렇게 우리 민족의 사회적 현실을 작품에 다각적으로 반영하면서 현실위기와 좌절을 극복한 작가로 꼽는다. 채만식 문학은 경제적 궁핍과 시대적 압박 속에서 ‘문학이 인류를 밀고 가는 한 개의 힘’이라는 진보적 신념을 갖고 당대의 모순과 갈등을 극복하며 한국 현대문학사에 하나의 뚜렷한 자취로 남아 있다는 평가다.
 

채만식문학관 내부에 전시돼 있는 채만식의 친일작품과 이에 대한 반성을 남긴 글.

∎우리 문학사에 우뚝한 걸출한 풍자작가
채만식(蔡萬植, 1902. 6. 17~1950. 6. 11)은 호가 백릉(白綾)이며 본관은 평강(平康)으로, 전북 군산 임피면 읍내리 274번지 동상마을의 채규섭(蔡奎燮)과 조우섭(趙又燮)의 5남1녀 중 다섯째로 태어났으며, 밑으로 여동생이 있었다. 백릉 채만식은 어려서 독서당에 다니며 천자문, 사서삼경 등 한문 공부를 하다가 1914년 임피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18년 경성의 중앙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한다. 재학 중에 은선흥(殷善興)과 결혼했으며, 1922년 중앙고보를 졸업하고 일본의 와세다대학 부속 제일고등학원의 영문과에 입학했다. 그러나 1923년의 관동대지진 때 조선 사람들이 핍박을 받는 것을 보고 분개해 귀국한 후 학교에 가지 않아 1924년 2월 제적된 것으로 전해진다.

채만식은 내성적인 성격에 외곬적인 면이 있어 소심했다고 한다. 자신의 신념에 부합되지 않으면 끝까지 배타적으로 대하는 성격이었다고 전해진다. 작품의 주인공들은 직설적이고 도전적인 면이 있지만, 정작 채만식은 조용하면서도 사물을 이지적으로 판단하는 귀족적이고 신사적이었다고 한다. 정리정돈을 잘하며 규칙적인 생활을 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습관은 남의 집에서 식사를 할 때에는 숟가락을 닦은 후 먹을 정도로 결벽증이 있었다고 전한다.

1924년 강화의 한 사립학교에서 잠시 동안 교편을 잡았다가, 1925년 동아일보의 기자로 입사한 후 1년 만에 사직했다. 이 시기 채만식은 이광수의 추천으로 1925년 ‘조선문단’에 단편소설 ‘세 길로’를 발표하면서 문단에 등장한다. 1930년부터 1933년까지는 ‘개벽’에서 근무를 했지만 번번이 기자 생활을 청산하는 이유는 단순히 생계수단을 충족시키지 못한다는 이유에서였다고 한다. 이후 10여 년의 기간 동안 고된 생활고에서도 창작활동은 멈추지 않았다.

1934년 발표한 ‘레디메이드 인생’은 아무리 애를 써도 직업조차 가질 수 없는 인텔리의 현실적 무능력을 풍자한 것으로 이때부터 세태를 풍자하는 글을 쓰기 시작했다. 이런 경향은 어릴 적 배웠던 이인로의 ‘파한집’이나 최자의 ‘보한집’ 등에 나타난 고서에서 비롯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초기 작품 희곡 ‘사라지는 그림자’, 단편소설 ‘화물자동차’와 ‘부촌’ 등에서는 동반작가적 경향을 보였지만 그렇다고 카프(KAPF)에 직접 가담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이후 1943년 ‘레디메이드 인생’과 ‘인텔리와 빈대떡’ 등에서는 풍자적 작품을 발표해 작가로서의 입지를 굳혔다. 이후 단편소설 ‘치숙’이나 ‘소망’, ‘지배자의 무덤’ 등에서도 계속 그의 풍자성이 나타나고 있다.

1936년 기자 활동을 그만두고 금광업에 투자하면서 조선일보에 장편소설 ‘탁류’(1937~1938년)를, 1938년 조광지에 ‘천하태평춘’을, 1939년 매일신보에 ‘금의 정열’을 연재했다. 또 1943년에 단편집 ‘집’을 발간하고, 1946년에 ‘제향날’을 발간했다.

우리 문학사에 우뚝한 채만식(蔡萬植)은 장편소설 ‘탁류(濁流)’ 한 편만으로도 걸출한 풍자작가로 꼽힌다. 하지만 그도 만만찮은 친일 전력 때문에 ‘친일인명사전’ 등재를 피하지 못했다.


∎친일작품, 과오와 반성의 마음 남겨
일제 말기 강요에 의해 ‘생활과 전체주의’, ‘홍대하옵신 성은’ 등의 글과 장편소설 ‘여인전기’를 전시체제에 순응하는 글로 써 친일작가라는 오명을 남겼다는 평가다. 하지만 채만식에게도 쓰라린 상처가 돼 두고두고 반성하게 하는 빌미가 됐는데, 훗날 ‘민족의 죄인’이라는 글을 쓰면서 심하게 자책하기도 했다.

작가로서 일가를 이룬 성취가 그를 친일 협력의 길로 밀고 갔을까. 그러나 ‘침략전쟁에 문학이 어떻게 봉사해야 하는가’를 주장한 채만식의 ‘전쟁문학론’은 그의 친일행위가 일제의 압박만으로 이뤄지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그래서인지 채만식문학관의 ‘풍자작가 민족의 죄인’이라는 칸에는 “한번 살에 묻은 대일협력의 불결한 진흙은…씻어도 씻어도 지워지지 않는 영원한 죄의 표시지였다.” -백릉 채만식-

“채만식은 1924년 ‘새길로’를 통해 등단하여 일제강점기 암울한 사회현상, 지식인들의 무기력함, 하층민의 가난과 고통에 대한 단편·장편소설 200편과 수필, 희공 등 약 1000여 편의 저항 작품을 집필했다. 1937년 일제에 협력하지 않고 저항하던 백릉은 ‘독서회사건’ 가담자로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혀 모진 고문에 시달리며 결국 일제의 회유와 압력으로 인하여 일제에 굴복하고 5개월 만에 풀려나 친일작가의 길을 선택하게 된다. 그는 1939년부터 1945년 해방기까지 친일일간지 매일신보 등에 친일작품을 남겼다. 1945년 초 채만식은 사회·경제적 어려움 속에 고향인 임피면으로 낙향하였고,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이한다. 광복 후 채만식은 친일작품에 대한 자괴감을 느끼고, 1948년 10월부터 1949년 1월까지 ‘백민(白民)’을 통해 본인의 친일작품에 대한 후회와 반성을 담은 ‘민족의 죄인’을 기고한다. 이 소설을 통해 채만식은 광복 후 남아있는 일제의 문화잔재를 비판하고, 친일행위에 대한 개념규정과 당대 지식인의 고뇌 등을 다루며, 자기반성을 하였다. 채만식이 집필한 ‘민족의 죄인’은 친일작품을 남긴 작가 중 자신의 과오와 반성의 마음을 남긴 작품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또 그 아래쪽에는 채만식의 친일작품 △나의 꽃과 병정(1942) △대륙의 장도(1940. 11) △혈전(1941. 7) △시대를 배경하는 문학(1941. 1) △문학과 전체주의(1941. 1) △아름다운 새벽(1942. 2) △포로의 시사(1941. 12) △홍대하옵신 성은(1943. 8) △군신(1944. 5) △여인전기-매일신보, 1944. 10. 5~1945. 5. 17) 등 10편을 밝히고 있어 독자들과 공감한다.

채만식은 1948년부터 이듬해까지 ‘백민(白民)’에 자신의 친일행위를 반성하는 내용의 중편소설 ‘민족의 죄인’의 연재를 통해서 ‘비겁하거나 경제적인 이유’로 친일을 하게 됐다는 심경을 드러냈다. 대부분 형식적인 사죄조차 하지 않았던 여느 친일부역 문인들에 비교하면 채만식의 반성은 일정한 평가를 받고 있다. 하지만, 그것이 그의 적극적 친일 행적에 대한 면죄부가 될 수는 없다는 지적도 만만찮은 것이 현실이다.

해방이 되자 고향으로 돌아와 1946년 익산의 형 채준식을 연고삼아 익산으로 이사를 했지만 이미 앓고 있던 병세가 악화된 이후였다고 한다. 익산 모현동, 주현동 등에 살다가 마동 269번지에서 노후성 폐결핵으로 사망했다. 무덤은 군산 임피면 축산리 계남마을 선산에 있다. 비록 49세의 짧은 나이에 생을 마감했지만 소설 84편, 희곡 25편, 산문 80여 편 등 총 190여 작품을 남겼다. 그의 작품은 고향을 흐르는 금강만큼이나 도도한 문체를 이루고 있다는 평을 듣는다. 특히 일본의 한 편집사에서 발행한 세계백과사전에서 한국의 대표 문인을 이광수와 채만식이라고 할 정도로 인정하는 작가였다. 이러한 채만식의 문학정신을 기리기 위해 1996년 군산문화원에서는 ‘탁류’의 작품 무대인 ‘미두장’과 ‘구 조선은행 군산지점’, ‘째보선창’ 등 3곳에 ‘채만식 소설비’를 세웠다. 이후 2003년 11월에는 ‘한참봉 쌀가게’(콩나물고갯길 중턱왼쪽 공터), ‘정주사집’(선양동 구름다리 중간), ‘큰샘거리’(중앙로 흥국생명 옆), ‘제중당약국’(구 군산역 앞 현 전북약국), ‘금호의원’(구 군산역 앞 삼성디지털프라자) 등에 소설비를 추가로 세웠다. 군산의 명산인 월명산 정상에는 1984년 8월 2일 ‘채만식문학비’가 세워졌다.취재=한기원·백벼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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