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탑사’란 이름 만든 ‘7층 석탑’과 ‘금동비로자나불삼존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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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탑사’란 이름 만든 ‘7층 석탑’과 ‘금동비로자나불삼존좌상’
  • 취재|글·사진=한관우·한기원 기자
  • 승인 2022.07.31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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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숲길, 내포문화숲길의 역사·문화유산 〈8〉
당진 면천(沔川) 상왕산 ‘영탑사’
당진 면천면 성하리 상왕산 동쪽 기슭에 있는 영탑사  7층 석탑 . 아래에 영탑사가 있다. 

충남 당진 면천면(沔川面) 성하리 상왕산(象王山)동쪽 기슭에 있는 절 ‘영탑사(靈塔寺)’는 대한불교조계종 제7교구 본사인 수덕사(修德寺)의 말사다.

통일신라 말엽에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창건한 이후 고려 충렬왕 때 보조국사 지눌이 지금의 대방(大房) 앞에 오층석탑을 세우고 ‘영탑사’라 했다고 전한다. 그 뒤에 무학(無學) 자초(自超)가 지금의 법당 자리에 있던 천연 암석에 불상을 조각하고 절을 중건했으며, 대방 앞 정원에 있던 오층석탑을 법당 뒤의 바위 위로 옮겼다. 이 7층 석탑은 충남문화재자료 제216호로 유리광전 뒤편 언덕에 위치해 있다. 처음 5층 석탑으로 세우고 이를 기려 절 이름을 ‘영탑사(靈塔寺)’라 했으며, 이후 1911년 중수를 거쳐 현재의 모습이 됐다고 한다. 이밖에도 ‘금동비로자나불삼존좌상’은 보물 제409호, ‘대웅전의 범종’은 충남문화재자료 제219호, ‘약사여래상’은 충남유형문화재 제111호로 각각 지정돼 가치를 인정받고 있는 문화재다. 

통일신라 말 도선국사가 창건한 영탑사는 오랜 역사와 깊은 가치를 지닌 만큼 곳곳마다 문화재를 품고 있다. 특히 ‘영탑’이라는 이름을 만들어준 7층 석탑은 충남문화재자료 제216호로 내포문화숲길동학길(당진 41)에 위치하고 있다. 유리광전의 뒤쪽 암벽 위에 지대석을 따로 마련하지 않고 자연 암반 위에 조성하면서 탑신과 옥개석은 각각 별도의 석재를 썼다는 점이 눈길을 끈다. 지붕돌은 얇고 평평하며 낙수면은 직선적인 느낌을 준다. 처마는 곡선화돼 있어 전체가 치켜 올라간 느낌이며, 몸돌과 지붕돌은 각각 1개의 돌로 돼 있다. 지눌이 조성했을 당시에는 오층탑이었으나, 1911년 중수 때 2층을 더 올려 7층 석탑으로 완성했다고 전한다.
 

영탑사 금동비로자나불삼존좌상(보물 제409호).

천년 고찰 ‘영탑사(靈塔寺)’의 본전에는 보물인 ‘금동비로자나불삼존좌상’이 있다. ‘금동비로자나불삼존좌상’은 전체 높이 51㎝, 본존 27.5㎝, 좌불 17.8㎝, 우불 18㎝로 팔각형의 연꽃무늬 대좌 위에 비로자나불을 본존불로 좌우에 협시보살이 함께 주조된 삼존불 구도인 금동불상은 구도와 형태 등에서 고려불상의 특징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보물인 ‘금동비로자나불삼존좌상’은 1928년 8월12일 전직 총독부 순사 이모씨의 범행으로 불상이 감쪽같이 사라지는 첫 번째 수난을 당한다. 다행히 범인은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은 9월11일 서울 광화문 종로거리에서 붙잡혔는데, 범행을 저지른 뒤 서울로 상경, 일당과 공조해 2000원을 받고 불상을 넘기려다 덜미를 잡혔다. 시간이 흘러 1964년 9월 5일, 보물 409호로 지정돼 문화재적 가치를 인정받았지만, 두 번째 수난이 기다리고 있었다. 1975년 6월 30일 한 무리의 사람들이 야음을 틈타 법당에 잠입, 불상을 또 도난당했다. 1년 6개월여 동안 보물 도난 사건의 범행 윤곽은 좀처럼 드러나지 않다가 서울동대문경찰서가 1976년 12월 2일 서울 마포구 동교동 주택을 급습해 전과 9범 김씨, 전과 8범 이씨 등 일당 5명을 검거했다. 당시 주택에서는 금동비로자나불삼존좌상이 발견됐는데, 본존불과 협시불이 분리된 상태였다. 게다가 오른쪽 협시불은 손목이 3cm 정도 뜯겨져 있었다.  왜 그들은 불상을 분리했던 것일까. 

주범은 전과 9범 김씨였고, 대전교도소에 함께 복역하던 송씨를 회유해 범행을 계획했고, 훔친 불상을 송씨에게 맡겼는데, 그해 11월 송씨가 자살하자 그의 아버지에게 300만 원을 주겠다고 약속, 불상을 받은 김씨는 불상을 세 부분으로 분리해 유씨에게 왼쪽 협시보살상을 300만 원에 팔고 본존불과 오른쪽 협시보살은 교도소에서 만난 이씨에게 판매를 부탁했다. 

돈에 눈이 먼 김씨에 의해 불상은 갈가리 찢어졌던 것이다. 유씨는 왼쪽 협시보살상을 부산으로 보내 보관토록 했다. 이씨는 본존불과 오른쪽 협시보살을 일본인에게 5000만 원에 팔기로 하고 제주도를 매매 장소로 결정했다. 일본인과는 이듬해인 1977년 초 제주도에서 만나기로 약속이 됐다. 공주에서 교사 생활을 했던 유씨는 국보와 보물을 훔친 화려한 전적을 가지고 있었는데, 대구 친구집에 숨었다가 12월 6일 발각돼 서울동대문경찰서로 압송되면서 막을 내렸다고 법보신문은 보도했다.

한편 영탑사 주변에는 400여 년의 노거수 느티나무와 거대한 괴목, 울창한 송림 등이 장관을 이루고 있다.

영탑사 범종에는 ‘1760년 2월 가야사 법당 금종을 백근의 금을 녹여 만든다(乾隆25年 庚辰2月 伽倻寺法堂金鍾百斤金入重造成也)’는 기록이 있고 덕산·홍주·면천 지역의 시주한 신도들의 이름이 기록돼 있다. 가야사(伽耶寺)는 흥선대원군이 아버지인 남연군 이구 (李球, 1788~1836)의 묘를 쓰기 위해 불태운 절이다. 어떻게 해서 가야사에 있던 ‘금종’이 이곳 영탑사로 오게 됐는지는 자세하게 알려지지 않고 있다. 1760년(영조 36)에 편찬한 ‘여지도서’에 “영탑사는 군의 서쪽 5리에 있다”라는 기록이 보임에 따라 조선 후기 절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1798년에는 연암당(鍊岩堂) 지윤이 유리광전을 중수했다. 1911년 신도들이 중수하고 1988년 대웅전을 중수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고 한다. 현재 남아있는 당우로는 법당을 비롯 유리광전·산신각·요사채 등이 있다. 이 중 정면 3칸의 유리광전 대웅전 안에는 충청남도유형문화재 제111호인 ‘마애불 약사여래상’이 양각돼 있으며, 충청남도문화재자료 제219호인 ‘영탑사 범종’은 1760년(영조37)에 앞에서 언급했듯 ‘가야사 법당의 금종을 녹여 조성한 것’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1994년에 조성한 ‘칠성탱화’와 ‘제석천룡도’가 봉안돼 있다. 마애불은 높이가 1.8m이며, 결가부좌(結加趺坐)한 형태로 얼굴이 몸체에 비해 크게 조성돼 비례감이 다소 떨어지는 고려 중엽 이후의 불상 양식을 보인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영탑사(靈塔寺)’는 ‘아픈 사람들의 병을 고쳐주고 한 가지 소원은 반드시 이뤄준다’는 지역의  대표적인 약사여래 기도 도량이다. 천연 암석에 불상을 조각한 ‘약사여래상’이 이와 같은 명성을 얻게 만들어줬다고 전해진다. 전설에 따르면, 고려 말에 자초가 이곳에서 백일기도를 드리던 중 갑자기 기암괴석이 나타나, 그 상서로움을 신성하게 여겨 국태민안을 기원하며 불상을 조성했다고 한다. 전각에 걸려 있는 편액은 8살짜리 어린아이의 글씨로, 1835년(헌종 1)에 면천면 대치리에 사는 이씨 부인이 마애불에 백일기도를 올린 후 낳은 아들이 썼다고 전해지고 있다. 무학대사가 빛이 비추는 곳을 따라가 보니 상서로운 바위가 있어서 그곳에 부처님을 새겼다는 설화도 전해지고 있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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