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원 마산·진해 근대역사문화유산 “자꾸 사라질 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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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원 마산·진해 근대역사문화유산 “자꾸 사라질 위기”
  • 취재=한기원·백벼리 기자
  • 승인 2022.07.30 0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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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지는 원도심 근대문화유산 어떻게 보존·관리할까 〈8〉
1912년에 건립된 마산헌병분견대(등록문화재 제198호).지금은 전시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1899년 개항 마산항 주변 ‘신마산’ 근대문화유산 건축물 점점 사라져
경남 전역 300개 건축물, 등록문화재 제외하면 언제든 사라질 위기에
진해 일제강점기 계획도시, 근대건축물 7곳 근대역사문화유산 박물관
창원 근대역사문화유산, 옛 창원 9점, 마산 42점, 진해 50점 등 101점

 

역사를 잃어버린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 역사는 말로만은 결코 지켜지지 않는다. 공동체 사회에서 역사를 사는 집단이 역사적 사실을 외면하면 진정한 역사는 그대로 소멸하고 만다. 그 당시의 상황이나 기억은 다시 돌아오지 않기 때문이다. 지역의 역사와 문화재를 지키고 보존하는 것은 시민사회의 인식전환이 이뤄져야 가능한 일이다. 세상이 바뀌고 달라진 시대 상황에도 변하지 않는 것은 지역과 사람이라는 사실이다. 인간의 감성이 더욱 중시되고, 특히 사람들의 중심축으로 자리 잡고 있는 것이라면 아무래도 지역과 사람들의 삶에서 역사와 문화예술이 강조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제 인간의 감성을 건드리지 못하면 상품을 팔지 못하는 시대다. 인간의 감성을 자극하는 상품 중에 역사·문화·예술이 한 분야를 차지하고 있는 현실이다. 공간이 사람을 만들고, 그 사람이 공간을 창출하는 시대인 것이다. 그곳에 사람이 소통하고 교감하는 너른 광장이 필요한데, 그곳이 바로 문화예술을 포함한 역사와 문화예술 공간일 수 있다. 차 중심의 도심 거리를 사람들에게 돌려준다면 그곳에는 문화예술로 시끌벅적해지면서 삽시간에 흥겨운 소통의 광장, 문화예술을 즐기는 공감의 광장이 될 것이다.

이러한 광장의 골목골목에는 추억과 역사가 쌓인 곳이다. 근대문화유산을 간직한 지역에서는 더욱 그렇다. 지역의 골목에는 지역이 갖는 역사문화자원이 있을 것이고, 이를 관광자원화하고 지역주민이 중심이 돼 지역을 알리고 지역의 역사문화에 매료돼 관광객들이 찾아드는 선순환 구조로 구도심 활성화와 부활의 성공 사례로 꼽히는 곳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홍성의 경우도 많은 역사문화자원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방치하거나 무관심한 경우가 많다. 이는 가치에 대한 인식의 차이다. 풍부한 역사문화자산을 기반으로 세계적인 역사문화도시, 예술도시로 도약하겠다는 의지가 절실히 요구되는 대목이다. 지역의 역사문화유산 등에 대한 가치공유와 문화향유는 주민주도의 역사문화유산, 대중문화예술에 대한 역량이 요구되고 있다.

코로나 시대를 겪으면서 삶의 방식, 인식의 근간이 송두리째 바뀌고 있다. 사람들이 몰리는 행사나 여행 등 보다는 또 새로운 생활방식으로의 변화를 느낄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지역 역사문화자산의 활용 등 도심공동화를 극복할 활성화 방안 등을 멀리서 찾지 말고, 천년고도 홍주의 역사에서 근대역사문화유산의 활용방안 등을 강구할 일이다.
 

1938년 마산에 최초로 가로등을 밝힌 일한와사 사택.

■ 마산 아픔의 기록, 잊지말아야 할 역사
경남 창원시 마산합포구 창동(옛 마산시)은 국내 도시재생의 대표적인 성공 사례로 꼽히는 곳이다. 하지만 산업화와 개발 광풍 속에 수많은 근대 건축물들이 사라져가고 있다는 지적이다. 아직도 경남 전역에는 300개가 넘는 해당 건축물이 남아있는데, 문화재로 등록된 일부를 제외하면 언제든지 사라져버릴 위기에 처했다는 설명이 아픈 대목이다. 1897년 개항한 목포에는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건축물 등 근대문화유산이 여럿 남아있다. 그 일대를 ‘1897개항문화 거리’로 정해 보존·관리하고 있다.

반면 1899년 개항한 마산항 주변 일명 창원시 ‘신마산’ 지역에 남아 있던 근대유산인 건축물들이 점점 사라져가고 있어 안타까워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개발 논리에 밀려 보전 가치가 높은 건축물이 방치되거나 헐리고 있기 때문이다. 마산항 개항 123년을 맞아 체계적인 근대 건축물 등 근대역사문화유산에 대한 관리가 절실하다는 여론이다.

창원시 마산합포구 장군동에 1909년 지어져 100여 년 동안 자리 잡았던 양조장 ‘삼광청주’ 철거 사례가 대표적이라고 지적한다. 지역사회에서는 보전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았으나 삼광청주는 2011년 헐렸고, 그 자리에 다가구 주택이 들어섰다. 

‘경상남도 근대문화유산’을 살펴보면 마산지역에 1912년에 건립된 마산헌병분견대(등록문화재 제198호)를 비롯해 벧엘교회, 박효규 가옥(황병원), 김영만 가옥(창신학교 사택), 상남동 주택(옛 마산역 철도관사), 마산어시장 객주창고, 황강수 가옥(마산우체국장 관사) 등이 등록돼 있다. 창원시는 삼광청주 같은 사례를 막고자 지난 2012년 ‘창원시 근대 건조물 보전 및 활용에 관한 조례’를 제정했으나 여전히 근대 건축물 보전·관리는 미진하다는 지적이다.

특히 마산합포구 월영초등학교 뒤편의 ‘일한와사 사택’과 산호동의 ‘지하련 주택’ 등은 보존대책이 절실하다고 설명한다. 일제강점기 전기회사 ‘일한와사’는 마산에 최초로 가로등을 밝혔다. 그 사장이 머물던 일한와사 사택은 1938년 지어졌다. 또 지하련 주택은 소설가 지하련(1912∼?)이 카프(KAPF;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의 서기장을 역임한 ‘임화’와 1935~1938년 머물렀던 집이라고 한다. 이 두 건물은 재개발사업구역에 포함돼 있어 언제든지 사라질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보존대책이 요구되며 보존방안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설명이다.
 

마산 지하련 주택.

한편 일제는 우리 민족을 억압하고자 헌병경찰제를 시행했다. 1904년 3월 6일 마산포헌병분주소를 설립했다. 1914년 당시 헌병이 1만 1159명이고, 경찰이 5756명이었다. 당시 헌병경찰의 권한은 막강했다. 경찰서장을 겸임하던 헌병분대장은 재판을 거치지 않고 즉결 처벌을 할 수 있었다. 또한 행정법규 위반까지 자의적으로 처리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19년 3·1운동 이후 일제는 1920년 헌병경찰제에서 보통경찰제로 바꾸고, 경찰이 치안을 맡게 했다. 경찰의 숫자와 업무는 대폭 늘었고, 1921년 마산 중부경찰서 자리에 있던 헌병분견대 건물을 증축해 마산경찰서를 지었다. 경찰의 업무가 늘어나자 헌병은 경찰서를 비워주고, 1926년에 마산 헌병분견대 건물을 짓고, 이전했다.

이후 일제강점기 내내 헌병의 사무실로 쓰였고, 해방 이후에도 육군헌병대, 방첩대 사무실 등으로 활용됐다. 이후 이 건물은 보안사 마산 파견대 요원(해양공사)이 상주했다. 1990년 보안사의 민간인 불법사찰이 드러나자, 보안사는 기무사로 바뀌게 됐고, 외부에 있던 보안사 요원을 모두 군부대로 철수시키면서 이 건물은 비게 됐고, 2005년 문화재로 등록됐다. 창원시는 최근 역사체험·교육의 장으로 활용·관리하고 있다.
 

1926년 세워진 진해역(등록문화재 192호). 

■ 진해, 도심 전체 근대역사문화유산 박물관
지역의 근대역사문화유산에 대한 철저한 가치평가와 함께 반드시 필요한 것은 다양한 역사문화유산에 대한 스토리 발굴이다. 건축물이 가지는 고유한 구조나 특징적 중요성에 대한 이해와 함께, 건축물에 얽힌 다양한 근현대사나 인물에 대한 스토리텔링(storytelling)은 낡고 오래된 건물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근대역사문화유산이 오늘날에도 지역사회나 지역주민들의 삶 속에서 근현대사의 실증적인 역사자료로 중요성을 일깨워준다. 근대문화유산은 생활사적 요소와 함께 100여 년 이상 자리를 지켜온 유서 깊은 유산이다. 

경남 창원시 ‘진해’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는 해군과 벚꽃이다. 하지만 진해의 진면목은 20세기 역사와 문화를 품은 근대문화유산이 도심 중심가에 산재해 있어 진해는 도심 전체가 근대역사문화유산의 박물관이자 ‘타임 캡술’이다. 발길 닫는 곳마다 지은 지 100여 년 안팎의 이국적인 옛 건물들이 숨어 있다. 문화재청이 등록문화재로 지정한 근대 건축물만 7곳에 이르고, 창원시 근대건조물 9개 중 6개가 있을 정도로 진해는 근대건조물의 보고로 꼽힌다. 일제가 침략목적으로 만들긴 했으나 진해시가지 자체가 근대 문화유산의 보고이다. 근대 건축물이 산재한 지역이 흔히 그렇듯이 특히 진해지역은 일제강점기 계획도시라는 점이 특징적이다.

일제는 1900년대 초 바다에서 적이 침입하기 어려운 요새 지형을 갖춘 진해에 해군기지를 건설했다. 군병력을 따라 이주한 일본인들이 머물도록 현재의 중원로터리를 중심으로 방사선 형태로 8갈래 길을 만들고 시가지를 만들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계획도시인 진해의 시작이었다. 지금도 그때 도시구조와 8갈래 길이 그대로 남아있다. 
 

1912년 지어진 진해우체국(사적 291호).

진해 근대역사문화유산 여행의 시작점은 중원로터리다. 가장 눈에 띄는 건물은 러시아풍으로 1912년 지어진 진해우체국(사적 291호)이다. 국내에서 보기 드문 러시아풍 건물이 진해에 있는 까닭은 일찍이 러시아 공사관이 근처에 있었기 때문이다. 2000년까지 우체국으로 사용됐을 정도로 보존 상태가 좋다. 진해우체국에서 유람선 터미널 쪽으로 걷다 보면 일본인들이 살았던 2층짜리 연립주택형인 나가야(長屋)가 나온다.

한자 그대로 길다란 목조건물이 도로를 따라 늘어서 있다. 나가야 건물 모퉁이를 돌면 1938년 건립된 일제시대 해군통제부 병원장 사택(등록문화재 193호)이다. 지금은 ‘선학곰탕’이란 이름의 음식점이다. 내부는 옛 일본식 가옥 특징을 고스란히 갖추고 있다. 해군 장병들이 꼽는 맛집인 중국음식점 ‘원해루(元海樓)’도 중원로터리에 있다. 원래 이름은 ‘영해루(榮海樓)’였다. 6·25 한국전쟁 때 중공군 포로였던 장철현이 1956년 개업한 중국요리집으로 60여 년 동안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승만 대통령 등 유명인들이 다녀갔으며 영화 ‘장군의 아들’ 촬영지였다고 한다. 원해루에서 도로를 사이에 둔 맞은편에는 지붕 모양이 뾰족해 ‘뾰족집’으로 불린 수양회관(현 곱창전골식당)이 있다. 1938년 지어진 이 집은 6각 형태의 누각이 있는 중국풍 건물이다. 문화재는 아니지만 독특한 외관이 인상적이다.

이밖에도 1955년 문을 열고 여전히 영업 중인 흑백다방, 1926년 세워진 진해역(등록문화재 192호), 일본이 세운 러일전쟁 전승기념탑을 부순 자리에 1967년 세운 군함 형태의 건물인 진해탑도 있다. 중원로터리 쪽에서 내수면연구소 쪽으로 올라가면 벚꽃 명소로 유명한 여좌천이 나온다. 여좌천 둑도 100년이 넘는 석조물이다. 일본이 진해를 군사도시로 개발하는 과정에서 1910년 무렵 하천 범람을 막으려고 조선인들을 동원해 만들었다고 한다. 
 

백범 김구 친필 시비.

■ 충무공의 후예가 모여 있는 도시답게 북원로터리
에 있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 동상은 1952년 전국에서 처음으로 진해에 건립됐다. 남원로터리에 있는 김구 선생 친필 시비는 1947년 세워졌다. 진해를 방문해 남긴 ‘서해어룡동 맹산초목지(誓海魚龍動 盟山草木知·바다에 서약하니 물고기와 용이 감동하고 산에 맹세하니 초목이 아는구나)’란 한시를 돌에 새겼다.

해군진해기지사령부 안에도 근대문화유산이 있다. 정문 근처에는 ‘爲國獻身軍人本分’(위국헌신군인본분; 나라 위해 몸 바침은 군인의 본분이다)’라는 글이 음각으로 새겨진 안중근 의사 유묵비가 있다. 이어 일제가 군수품을 수송하려고 깔아놓은 철도 진해선 종점인 ‘통해역(統海驛)’이 나온다. 지난 2006년까지 해군 장병들의 출퇴근용 기차가 다녔다고 한다. 통해역 이후부터는 고색창연한 붉은 벽돌로 지은 서양풍 건물 형태의 등록문화재들을 볼 수 있다. 옛 진해요항부사령부(등록문화재 194호), 옛 진해요항부 병원(등록문화재 197호), 옛 진해방비대사령부 본관·별관(등록문화재 195호·196호) 등 지은 지 100년이 넘은 건물들이 줄지어 서 있다. 해군은 문화재인 이 건물들을 지금도 사용하고 있다.
 

진해 육각집 전경.

이승만 대통령이 머물던 별장도 해군진해기지사령부 내에 있다. 옛 일본해군통신대가 쓰던 건물을 양옥과 한옥을 절충해 별장으로 꾸몄다. 이 대통령 부부가 쓰던 침대, 탁자, 의자, 이탈리아에서 수입한 싱크대, 유사시에 대비해 침실 옆에 해안가로 급히 피신할 수 있도록 파놓은 비상탈출구까지 그대로 있다. 별장 옆에는 1949년 8월 8일 이승만 대통령이 중화민국 장제스 총통을 만나 태평양 동맹 결성을 위한 예비회담을 제안한 육각형 형태의 정자에 앉아 볼 수도 있다. 해군기지 내 근대문화유산은 예약을 해야 둘러볼 수 있다.

근대문화유산이 눈앞에서 속절없이 사라지는 일은 근대문화유산을 보존하고 있는 지역에서는 지금도 다반사다. 개발을 위해 일제 잔재나 수탈의 흔적이라는 그림자로 뒤덮기 일쑤이기 때문에 근대건축물을 보존·활용하는 일은 아주 중요하다. 문화유산으로 지니는 가치를 따져 볼 때, 상당한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물론 대부분 일제강점기 침탈과 관련된 건물이지만, 거기엔 우리의 땀·아픔·희생 등이 서려 있어 의미를 더한다. 전문가들의 고증을 거쳐 오늘에 되살리는 일은 그래서 중요하다. 어처구니없이 사라진 것은 어쩔 수 없다고 해도, 이제라도 남아있는 근대건축물 등 근대역사문화유산을 보존하고 활용할 수 있는 방안이 시급한 이유다.

경남지역에는 미사용 등록문화재가 여기저기에 있다고 한다. 등록문화재의 관리와 보존 업무를 위임받은 지자체는 개인소유라는 이유로 혹은 중앙부처나 공공기관의 재산이라는 이유로 실질적인 관리권조차 행사하기가 여의치 않은 실정이라고 한다. 물론 이런 현실을 지자체의 의지 부족으로 돌릴 수도 있다. 하지만 문화재를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에 대한 지역사회의 공론화와 합의가 결핍되면서 지역사회 구성원들의 이해가 부족한 것이 핵심이다. 현재 창원시의 근대 역사문화유산은 101점(옛 창원지역 9점, 마산지역 42점, 진해지역 50점)으로 파악되고 있다. 이 가운데 창원시 의창구 소답동에 있는 근대 조각가 김종영(1915∼1982) 생가 등 7점은 등록문화재로 지정돼 있다는 설명이다.
 

1956년 개업한 중국요리집 진해 영해루(현 원해루) 전경.
진해 흥백다방. 현재는 각종 예술행사 등 대관 운영 중이다.
진해 흥백다방. 현재는 각종 예술행사 등 대관 운영 중이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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