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전 사람이 살았던 마한의 수도에 ‘충남 행정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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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전 사람이 살았던 마한의 수도에 ‘충남 행정수도’
  • 취재|글·사진=한관우·한기원 기자
  • 승인 2022.08.27 0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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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마을공동체 스토리 〈3〉 - 홍북 석택리 택리(직절)마을

홍주일보사는 충남미디어포럼과 2022년도 충청남도지역언론지원사업(연합사업)의 지원을 받아  마을공동체의 의미와 가치, 역사와 문화, 함께 누리는 행복한 삶, 함께 만드는 희망이야기를 통해  어제와 오늘을 돌아보고 내일을 톺아본다. 이를 통해 더불어 사는 삶의 터전, 인간답게 살고 싶은 사람들, 행복하고 희망이 가득한 공동체 마을의 스토리를 홍주신문에 10회에 걸쳐 소개하고 영상으로도 담는다.  <편집자 주>

석택리 환호취락 유적발굴조사 현장(망국재)과 충남도청 진입도로(홍북터널) 개설·내포신도시 조성 모습(2012년).

홍북 석택리는 천년홍주(千年洪州) 역사의 시발점이 되는 곳이다. 삼한시대(三韓時代) 월산에 ‘월지국(목지국)’이 있었다면 마한의 ‘감해비리국(監奚卑離國)’의 수도는 석택리 일원이었다는 추정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마한의 건국에 대한 기록은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나와 있지 않으나, 조선시대까지는 기원전 2세기 초에 기자 조선의 준왕(準王)이 위만(衛滿)을 피해 바닷길로 달아나 ‘월지국(月支國)에 세운 나라’라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로 ‘목지국’이라고도 한다. 목지국의 우두머리는 마한의 우두머리이며, 또한 진왕으로 추대돼 삼한(三韓)의 최고 우두머리였다. 석택리에서 발굴된 유적의 특징으로 볼 때 원주민들은 기원전 3세기 이전부터 청동기 문화를 바탕으로 한반도 서남부를 중심으로 정치집단을 이뤘고, 목지국을 중심으로 한 소국 연맹의 형태를 유지했다고 여겨진다.

따라서 청동기시대부터 물과 인접한 구릉지에 거주를 시작하면서 원삼국시대까지 집단주거지를 이뤘다는 의견이 제시되고 있어 최소한 2000여 년 전부터 사람들이 살았던 곳으로 추정하고 있다. 신석기시대의 유적이 발견되면서 선사시대부터 사람들이 거주했음이 분명하다. 지석묘(고인돌) 유적과 같은 청동기시대 유적이 발견되면서 마한의 54개 소국 중 적어도 4개의 소국이 존재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대목이다. 결과적으로 ‘목지국’과 ‘감해비리국’의 수도였거나 집단주거지였음을 증명하는 근거이기도 하다. 석택리 택리마을 감싸고 있는 소당산과 ‘안산’이라 불리던 작은 동산이 ‘망국재’인데, 이곳이 바로 마한의 ‘감해비리국(監奚卑離國)’의 수도였던 명당자리라는 평가와 실제로 ‘환호취락’유적이 발굴됐다.

홍북 석택리는 석교(돌다리)와 택리(직절)마을이라는 지명이 근원을 이루는 곳이다. 택리(직절)마을은 홍북읍의 북동쪽 끝 마을로 예산군 수촌·목리와 경계를 이룬 곳이다. 넓은 삽교평야에 마치 길쭉한 곶처럼 나지막하게 뻗어나온 산줄기에 소당산과 망국재를 들어 올리고 그사이에 마을이 형성돼 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석교리, 갈산리, 대지리 각 일부와 덕산군 덕산면 수촌리 일부를 병합해 석교와 택리의 이름을 따서 ‘석택리’라 지명을 정하고 홍성 홍북면에 편입됐다. 홍북면은 충남도청신도시 조성에 따른 인구유입 효과로 지난 2017년 8월 1일 홍북읍으로 승격,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석택리 택리(직절)마을과 석교(돌다리)마을 동쪽의 삽교천 주변의 평야를 가로질러 서해선고속철로(홍성~경기 화성 송산)가 건설 중이다. 이 철도(서해선~경부선 고속철도 연결)가 완공되면 홍성에서 서울까지 50분대 진입이 예상된다.
 

택리(직절)마을 입구.

■ 택리(직절)마을, 꿩이 알을 품은 형국
또한 택리(직절)마을은 꿩이 알을 품고 있는 형국의 터라는 뜻으로 ‘복지포란형(伏雉袍卵形)’의 명당이라고 한다. 직절은 한자어로 ‘치사(稚寺)’이니 이곳에 큰절이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당시의 절터는 지금은 흔적조차 찾을 수 없고, 당시 절이 있을 때에는 ‘벌말’이었다고 전해진다. 직절마을은 절이 없어지자 벌말사람들은 절이 있던 곳으로 이주해 살면서 ‘직절’이란 큰 마을을 이루었다고 한다. 과거 절이 있었던 마을 이어서인지 지금도 소당산 동쪽 산허리에는 ‘정심사’라는 절이 있다. 한편 조선시대 ‘치사면(稚寺面)’이었다는 것을 보면 ‘꿩’의 형국에 대한 인식의 역사가 깊은 곳임에 틀림없다는 것이다. 꿩 또는 닭의 형국의 땅에는 반드시 매나 개가 있어야 한다는 전설이 있는데,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직절마을의 길 건너 서쪽에는 매봉재가 있다.

또한 ‘돌모로’라는 곳은 꿩을 몰아 들어왔다는 뜻이라 하며, 야해뜰과 허간뜰은 꿩이 새끼를 친 자리라고 보고 있다. ‘허간뜰’은 ‘하관들’ 또는 ‘허관들’이라고도 하는데 물이 하얗게 차오른 ‘허연들’이란 말에서 유래했다고 전해진다. 직절마을은 복지포란형 명당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특징은 마을로 들어오는 사람은 흥하고 나가는 사람은 망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한다. 마을의 북동쪽은 예산과 경계를 이루며, 넓은 삽교평야에 마치 길쭉한 곶처럼 나지막하게 뻗어 나온 산줄기에 소당산과 안산이이라는 산줄기가 마을을 감싸 안고 형성됐다. 여기서 안산이라 불리는 산이 ‘환호취락유적’지이며 이 산 아래로 충남도청신도시 주진입도로인 충남대로의 ‘홍북터널’이 뚫렸다.
 

택리(직절)마을.

직절마을은 한 성씨의 동족마을은 아니지만 입향 후 100여 년의 전통을 가진 집안이 많다. 직절마을에 터를 잡은 성씨는 경주김씨, 청주한씨, 나주임씨, 김해김씨, 평산신씨, 해주최씨, 밀양박씨 순이다. 하지만 이들보다 더 오래전에 살았던 사람은 ‘맹씨’였다고 한다. 맹씨는 자손이 없었다고 하는데 마지막 후손이었던 맹 노인이 논 1000여 평을 마을에 희사하고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주민들은 맹 노인을 ‘동네할아버지’라고 부르며 매년 9월 27일이 되면 이장이 주도해 제사를 지내왔다. 하지만 9월이 바쁜 농번기였으므로 음력 3월 한식날에 제사를 지내다가 다시 2월 그믐날로 정해 제사를 지내고 있다.

직절마을에는 경주김씨가 200여 년 전에 입향해 가장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다. 원래는 예산 음봉면 계정리에 선대의 묘가 있었는데 직절의 종산묘역으로 옮겼으며, 7째 때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한편 청주한씨는 정읍참봉이었던 선대가 서산에서 직절마을로 이주해 왔다고 전해지고 있다. 한승운이라는 사람은 힘이 장사여서 2미터 높이를 거뜬히 뛰어넘었는데, 5되들이 병위에 부엌칼을 꽂아 놓고 책상다리로 앉은 채 뛰어넘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자손이 번창하지 못해 마지막 후손이 예산 삽교의 목리로 이사를 떠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현재 직절마을에 청주한씨는 3가구가 살고 있다.
 

택리(직절)마을 전경. 지역언론사인 ‘㈜홍주일보사’가 ‘충남의 행정수도’를 바라보며 자리하고 있다.

직절마을에는 19세기 후반 봉건제도의 모순과 자본주의 열강의 침략에 항거한 동학농민군으로 활약했던 김상현(金商鉉)과 김상림(金商林)이 각각 갑오년 11월 4일과 19일에 출가(出家)하여 돌아오지 않음에 따라 그날을 기일로 정해 제사를 지내오고 있다. 결국 이들 동학군 부자는 관군에게 잡혀 홍주성(洪州城)으로 끌려가 죽임을 당했다고 전해진다. 또한 직절마을에는 동계가 있었는데, 그 연원은 명확하게 알 수 없으나 동네 주민 전체가 하나가 되는 동계는 1936년에 이르러 ‘택리진흥회(宅里振興會)’란 이름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택리(직절)에 사는 모든 사람이 계원이 되며 회장과 부회장 각각 한 명씩을 선출하고 약간 명의 총무부장으로 구성돼 있다. 택리를 떠나게 되면 자연히 탈퇴하게 되고, 새로 이사 온 사람은 동네에 인사를 다니며 진흥회 가입을 축하받기도 했다고 한다. 지금도 규약이 그대로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앞서 일제강점기에 있었던 공려조합(共勵組合)의 문서는 초대부터 3대까지의 활동상이 자세히 나타나 전해져 오고 있는데, 1960~70년대의 새마을운동과 비슷한 형태의 사업이 이뤄졌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마을에 조합장이 선정돼 마을마다 분뇨탱크를 만들고 담장을 쌓는 등의 활동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한편 1945년의 ‘식산계대장(殖産契臺帳)’은 비료를 반별로 배정해 주는 내용을 담고 있으며, ‘구매품매팔장(購買品賣捌帳)’이라 각 반의 반장이 책임자였고 ‘식산계주사(殖産契主事)’가 관장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두레 관련 문서에는 마을 사람들의 명단이 기록돼 있어 택리마을의 마지막 두레의 상황을 짐작할 수 있는 귀중한 문서로 평가되고 있다. 이러한 소중한 문서와 기록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는 택리마을에는 우연의 일치인지는 몰라도 지역언론사인 ‘㈜홍주일보사’가 ‘충남의 행정수도’를 바라보며 자리하고 있다.


■ 망국재에  홍북터널, ‘환호취락’유적 보존
택리(직절)마을은 3개의 자연마을로 구성돼 있다. 암탉골이라고 불리는 음달말과 부엌뜸, 세매집이라 불리는 마을의 명칭으로 볼 때도 동네의 특징이 잘 드러난다. 음달말인 암탉골은 마을에서 안쪽으로 깊은 골에 위치하는데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 명당으로 닭의 알주머니처럼 밖에서는 보이지 않는 숨겨진 마을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 또 세집매는 ’황새암‘이라고도 하는데 세집만 살았다는 뜻이라고 전해진다. 여기에서 주목할 대목은 음달말인 암탉골을 감싸고 있는 야트막한 산줄기에 ‘망국재’가 있는 곳이라는 점이다. 지금의 ‘망국재’는 충남도청내포신도시가 조성되면서 도청의 주진입도로가 개설되면서 절개됐다. 다만 환호취락 구역은 터널(홍북터널)로 도로를 개설해 문화재보존구역으로 보존되고 있다.

택리(직절)마을에는 선사시대의 유적이 많이 확인되고 있다. 소당산과 망국재에서는 소위 ‘고린장’, 또는 ‘고려장’으로 불리는 선사시대 고분이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충남도청내포신도시가 조성되면서 실시된 문화재발굴조사에서 확인됐다. 지난 2010년 충남도청 내포신도시 진입도로 개설공사에 따른 지표조사를 통해 처음 석택리 유적의 실체가 드러났으며, 발굴조사를 통해 원삼국 시대 유적뿐만 아니라 청동기시대와 삼국시대 백제 석곽묘, 고려~조선시대 토광묘 등 총 433기의 유구가 확인됐다.

원삼국시대로 추정되는 주거, 의례, 분묘, 생산공간과 이를 방어하기 위한 환호시설을 완벽하게 갖춘 대규모 취락으로 발견 당시부터 이목이 집중됐다. 이 유적은 원삼국시대 마한의 환호(環濠) 주거지로, 국내 최대 규모로 알려져 있다. 환호(環濠)란 주거지를 감싸는 도랑 형태의 방어 시설물이다.석택리 유적은 시야 확보에 탁월한 지역에 위치해 있으며, 풍부한 수량과 넓은 충적지대 등 농경 생활에도 유리한 입지 조건을 갖추고 있어 대규모 주거지가 형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석택리 환호취락 유적’은 마한의 시대상을 엿볼 수 있는 유적으로 충청남도기념물 제197호로 지정됐으며, 국가문화재 지정을 추진 중이다.
 

택리(직절)마을 전경.
석택리 마을회관.

<이 기사는 충청남도지역언론지원사업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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