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북판 ‘노블레스 오블리주’ 실천한 옛 면소재지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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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북판 ‘노블레스 오블리주’ 실천한 옛 면소재지마을
  • 취재|글·사진=한관우·한기원 기자
  • 승인 2022.09.11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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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마을공동체 스토리 〈5〉 - 홍북읍 대동리 동방송마을

홍주일보사는 충남미디어포럼과 2022년도 충청남도지역언론지원사업(연합사업)의 지원을 받아  마을공동체의 의미와 가치, 역사와 문화, 함께 누리는 행복한 삶, 함께 만드는 희망이야기를 통해  어제와 오늘을 돌아보고 내일을 톺아본다. 이를 통해 더불어 사는 삶의 터전, 인간답게 살고 싶은 사람들, 행복하고 희망이 가득한 공동체 마을의 스토리를 홍주신문에 10회에 걸쳐 소개하고 영상으로도 담는다. <편집자 주>

홍북 대동리 동방송마을의 마을회관 옆에는 보호수로 지정된 마을의 풍흉을 점친다는 느티나무가 자리하고 있다. 서쪽의 용봉산 자락에는 충남도청신도시가 조성돼 고층아파트가 빼곡하다.

 홍북 대동리(大東里)는 홍북읍(洪北邑)의 소재지다. 대동리(大東里)는 ‘대지동(大池洞)마을’과 ‘동방송(東方松)마을’로 구성됐는데, 대지동마을에는 읍사무소를 비롯해 대부분의 공공시설과 학교 등이 분포하고 있으며, 동방송마을은 평범한 시골의 농촌 마을과 다름이 없다. 

하지만 지난 2012년 충남도청 이전으로 ‘충남의 행정수도’로 탈바꿈하면서 마을 서쪽에 있는 용봉산 자락에는 고층아파트가 빼곡하게 들어서 농촌 마을인 ‘동방송마을’과 ‘신도시 아파트촌’이 묘한 대조를 보인다. 현재 40여 호에 주민들은 100여 명이 살고 있다. 대부분 65세 이상 노인들이 절반은 된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치사면(雉寺面)에 속한 동방리(東方里), 대지리(大池里), 갈산리(葛山里)의 일부를 병합해 ‘대지’와 ‘동방’의 이름을 따서 ‘대동리’라 했다.

홍북 일대는 대체로 길쭉하게 뻗은 낮은 야산 지대의 상단부로 도로가 지나고 주변에는 마을이 형성된 상태다. 동방송마을도 도로변의 양쪽으로 낮은 골짜기가 아래로 향하며 자연마을이 흩어져 형성돼 있다. 원래 일제강점기 무렵에는 동방송마을에 면소재지가 형성돼 있었으나, 면사무소 옆쪽에 금광이 개발되면서 면사무소와 관련 기관들이 모두 대지동마을로 이전했다고 전해진다. 금광은 이른바 ‘금점’이라 했고, 한동안 많은 금을 캐내며 호황기를 누리다가 해방 이후에 폐쇄됐다고 전한다.
 

■ 마을의 풍흉(豊凶)을 점치는 느티나무
동방송마을에는 지금도 마을회관 옆에 보호수로 지정된 느티나무가 서 있는데, 이 나무는 마을에서 풍흉(豊凶)을 점치는 나무로 느티나무의 꼭대기에서부터 잎이 피면 풍년이 든다는 말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이 마을에는 어느 해인가 마을에 큰 전염병이 들어와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는 일까지 생겼다고 한다. 이 마을뿐만 아니라 이웃 마을에까지 번졌으나 동방송마을은 큰 피해가 없었다고 한다. 사람들은 이상하다고 생각해 사연을 알아봤는데, 옛날부터 해마다 정월 보름날 마을에서 무연분묘를 보살피면서 무덤 옆에서 자란 소나무 가지를 꺾어다가 대문에 매다는 풍습이 있었다고 한다. 그 소나무 가지가 마을 사람들의 전염병을 막아줬으며, 무연분묘는 동쪽에 있어서 마을을 지켜주었다고 전해진다. 전염병이 돌 때 동방송마을만은 무연분묘에서 자란 소나무의 동쪽으로 뻗은 가지를 꺾어다가 집 앞의 대문에 매달아 놓아 화를 면했다는 전설이다. 이후로 ‘동쪽에 있는 소나무 가지가 마을을 지킨다’는 뜻에서 ‘동방송(東方松)’ 또는 ‘동방리(東方里)’라 부르게 됐다고 전해지고 있다.

동방송마을 주민들은 ‘동방실’이라고도 즐겨 부르는데 큰말, 참샛골, 첫골이 1반이고, 안말, 서당앞, 대영굴 등의 자연마을을 2반으로 부르고 있다. ‘홍성의 전설(傳設)과 효열(孝烈); 홍성문화원·1995) 대동리 지명편의 유래에는 ‘물팽이’는 첫골 남쪽에 있는 골짜기로 지금은 동서쪽으로 모두 충남도청신도시로 편입된 옛 영풍농장(현재 사조축산 도로 건너편) 정문의 남북쪽 골짜기로 물이 풍부하고 땅이 기름져 해마다 풍년이 드는 곳이라 했다. 지금은 그곳이 신도시로 편입돼 충남내포혁신도시의 첨단산업단지가 들어서고 있다. 새암골은 동방송마을과 경계지점으로 안역골의 남서쪽에 있는 골짜기로 샘이 많았다고 전해진다. 위쪽으로는 옛 영풍농장 골짜기와 경계를 이룬다.

동방송마을의 ‘안말(안마실)’은 홍북읍행정복지센터 방향으로 동방송마을회관에서 오른쪽 아래에 있는 마을이다. ‘첫골’은 홍성에서 지방도를 이용해 동방송마을로 올 때 첫 번째 골짜기에 있는 마을로 큰말의 남동쪽에 있는 마을이다. ‘큰말(큰마실)’은 동방송마을회관에서 홍북읍행정복지센터 방향으로 왼쪽 아래에 있는 마을이다.

동방송 큰말에는 300여 년 전 나주김씨 김세상(金世祥; 1696~1757)이 홍성 갈산 갈오리에서 이주해 들어오면서 세거하게 됐다. 그 이전까지 서산에 살던 나주김씨가(家)에서 어떤 연유로 이주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김세상이 입향한 이후 후손들이 집성촌을 이뤄 50여 년 전까지만 해도 30여 호나 됐다고 한다. 

지금은 여러 가지 이유로 각성바지 마을이 돼 나주김씨는 10호 미만에 불과하다. 입향조인 김세상의 후손 중에 김좌형(金佐衡; 1884~1949)은 홍주향교 전교를 지내면서 홍주향교 중수와 집안일에 많은 공헌을 했다. 행장에 의하면 그는 실전됐던 12대조 군자감정 주(鑄)의 묘소를 서산 일대를 10년간 탐색한 끝에 지석을 발견 찾았다고 한다. 매년 10월 17일 입향조인 김세상의 묘가 있는 동방송 선산에서 시제를 지내고 있다.

일제강점기 무렵 나주김씨 김창기는 100석지기 부자였다고 한다. 소 두 마리와 머슴을 두고 농사를 지었는데, 1970년대까지 스무살 넘은 상머슴에게 1년에 쌀 10가마니를 줬다고 한다. 칠월 백중이면 ‘머슴날’이라고 해서 머슴에게 용돈을 줬고, 동네에서 어렵게 사는 사람에게도 쌀을 내줬다고 한다. 고귀한 신분에 따르는 도덕적 의무와 책임을 뜻하는 홍북판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를 실천한 셈이다.
 

■‘찬샘’과 충신의 아내·아들딸 전설 전해져
‘참새골’은 동방송마을과 한지미(대지동마을)의 경계지점으로 ‘홍북양조장’ 부근으로 ‘찬샘’이 있었다고 하며 이와 관련한 전설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동방송마을의 ‘참새골’에는 ‘찬샘’이라고 불리는 샘이 1970년대까지도 있었다고 한다. 이곳에는 한 가족의 가슴 아프게 애달픈 사연인데, 조선 세종 때의 일로 세종임금이 병을 고치기 위해 약수(藥水)를 찾아다닐 때, 홍북 동방송마을의 ‘찬샘’도 궁중(宮中)에서 찾는 ‘약수터’로 지목됐다. 그래서 한때는 홍주고을에서 관원이 나와 샘을 지키기도 했다. 후에 세종임금이 청주(淸州) 약수터에서 수양을 하면서부터 더 이상 궁중에서 ‘찬샘’을 찾지 않게 됐다. 하지만 ‘찬샘’은 홍주고을에서 이름난 약수터로 알려졌고, 주민들이 자주 찾아와 병을 고치곤 했다고 전한다. 

옛날 ‘찬샘’ 건너편에 한 과댁이 남매(男妹)를 데리고 살았는데, 이곳에서 처음부터 살아온 집안은 아니었고 아들딸을 데리고 이사를 와 사는 아낙네였다. 겉보기에는 양반집 규수 같았고, 농사일을 할 만한 아낙이 아니었는데, 열심히 땅을 일구며 일을 했다. 밤이면 늦도록 불이 켜있고, 집에서 사내아이의 글 읽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이 다른 농가와 달랐다. 

이들이 참새골에 자리를 잡은 지 10여 년의 세월이 흘렀고, 어느새 아낙의 얼굴엔 주름살이 많이 생겼다. 아들은 청년이 됐고 하루에 한 번씩 산에 올라가 나무를 해오고 글을 읽었으며, 딸도 어머니를 도우며 틈틈이 글을 읽었다. 딸은 어머니처럼 미모도 뛰어났고, 이웃 마을 청년들은 딸이 샘으로 가는 길에 숨어서 딸의 모습을 훔쳐보곤 했다. 

그들이 평화롭게 사는 어느 날 중년의 남자가 집으로 찾아왔다. 아들은 산으로 나무를 하러 갔고, 딸은 샘에서 빨래를 하는 중이었다. 남매가 없는 집에 낯선 사내가 방 안으로 들어갔고 얼마 안 돼 비명소리가 들렸고, 다급하게 방문을 차고 나온 사내는 산속으로 사라졌다. 얼마 후 나무를 해온 아들이 방문을 열어보니 어머니가 칼에 맞아 죽어있었다. 아들은 깜짝 놀라 밖으로 나와 범인을 찾아다녔지만 어머니를 죽인 범인을 찾지 못하고 통곡을 하면서 남매는 어머니를 뒷산에 고이 묻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관원을 앞세운 사람들과 포졸들이 나타나 대감의 명이라며 딸을 데리고 갔다. 아들은 서슬 퍼런 관원들의 엄포에 이유도 묻지 못한 채 통곡만 했다. 그날 아들도 개나리봇짐을 둘러멘 채 훌쩍 집을 나갔다. 

그들이 다정하게 살던 집은 오랫동안 비워 둬 폐허가 됐다. 아낙이 죽은 지 일 년이 되던 날, 한 스님이 아낙의 무덤 앞에 나타나 한참 동안 염불을 외우다가 어디론가 떠났다. 그 후로 매년 아낙이 죽은 날이면 스님이 나타나 무덤만 돌보고 떠나곤 했다. 어느덧 또 10년이란 세월이 흘러 마을 사람들은 곧잘 찬샘을 찾았다. 찬샘의 물이 차서 여름밤에는 아낙네들이 몰려와 목욕을 하곤 했다. 그때마다 폐허가 된 집을 가리키며 흉가(凶家)라 낙인을 찍고 근접하지도 않았다.

그러던 어느날 홍주고을 관원들이 우르르 마을로 몰려왔다. 마을 사람들에게 흉가(凶家)에 살던 사람들의 소식을 아느냐고 물었다. 관원들이 가족을 찾는 사연은 다름이 아니라 이 집에 살던 아낙과 남매는 조정에서 일을 하던 훌륭한 선비의 아내와 아들딸이었다. 선비는 임금에게 나라의 일을 바로 하도록 옳은 말을 했다가 맞아 죽은 충신이었다. 충신들을 내쫒으며 멀리하던 폭군이 죽은 후에, 옛날 억울하게 죽은 충신과 가족들을 조정에서 찾아 나선 것이다. 죄명이 풀려 가족을 찾는다는 방문(榜文)이 전국 여기저기에 나붙었지만 가족들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 대신 찬샘에 소복(素服)을 한 여인이 밤마다 나타났다. 밤이면 여인이 나타나 물을 떠다 뒷산의 묘지에 바치곤 사라졌다. 여인이 물을 떠 어머니의 묘지(墓地)로 올라가면 독경 소리와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마을 사람들은 찬샘에 나타난 소복한 여인을 딸의 넋이라 생각했다. 포졸에 잡혀가 관기(官妓)가 됐던 딸이 시중을 들다가 혀를 깨물고 죽었다는 소문이 돌았기 때문이다. 독경을 외우는 스님은 절에 숨어 있다가 죽은 오빠의 넋이라고 생각했다. 절에 숨어 있던 오빠는 여동생의 죽음이 분해서 돌에 머리를 찧고 죽었다는 얘기가 돌았기 때문이다. 밤마다 소복한 여인이 나타난다는 소문은 여기저기로 퍼져나갔고, 홍주고을 원님도 알게 됐다. 원님은 억울하게 죽은 선비 가족의 넋을 위해 크게 제사를 지내줬다. 

지금도 날씨가 구질구질한 날엔 소복한 여인이 나타나 물을 떠들고 산으로 올라가기 때문에 우울해한다고 전한다. 충신이 때를 잘못 만나서 가족까지 비운에 간 한 여인의 넋이라며 안타까워했다는 전설이 동방송마을에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이 기사는 충청남도지역언론지원사업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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