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천 판교마을, 옛 모습 그대로 간직한 ‘시간이 멈춘 마을’
상태바
서천 판교마을, 옛 모습 그대로 간직한 ‘시간이 멈춘 마을’
  • 취재=한기원·백벼리 기자
  • 승인 2022.09.17 08:3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사라지는 원도심 근대문화유산 어떻게 보존·관리할까 〈9〉
1932년 영업을 시작한 ‘동일주조장’.
1932년 영업을 시작한 ‘동일주조장’.

살아있는 근현대사박물관 충남 서천 판교마을의 근대역사문화공간이 문화재청의 국가 등록문화재로 최종 등록됐다. 서천군은 지난해 충남도문화재위원회와 문화재청 현지 조사, 문화재위 검토 후 국가 등록문화재로 등록 예고된 판교면 현암리 일원(2만 2768㎡)이 30일간의 예고 기간과 문화재위원회 심의를 거쳐 2021년 10월 13일 최종 등록됐다. 서천 판교면 현암리는 1930년 충남선 ‘판교역’ 철도 개통과 함께 근대기 서천지역 활성화 중심지였다.

양곡을 비롯한 물자 수송과 정미, 양조산업, 장터가 형성돼 우리나라 산업화 시대까지 번성기를 맞았다. 1980년대 이후 도시 중심의 국토개발에서 소외되고 2008년 판교역 이전으로 본격적인 쇠퇴 과정을 거쳤다. 근·현대기 농촌 지역의 역사적 변화와 흐름을 엿볼 수 있는 대표적 공간이다. 특히 동일정미소, 동일주조장, 장미사진관, 삼화정미소(오방앗간), 판교극장, 옛 중대본부, 일광상회 등 7건의 문화유산은 생활사적 변화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는 대표적인 공간으로 꼽히는 곳이다.
 

판교 시간이 멈춘 마을 추진사무실.

■ 서천 판교마을, 시간이 멈춘 마을
세월의 시계바늘을 한참이나 뒤로 돌린 듯 1930~1970년대 소도시 풍경을 간직한 곳이 바로 충남 서천군 판교면 현암리에 위치한 ‘서천 판교 근대역사문화공간’이다. 1960~70년대 한국 산업화 시기의 번성기를 맞이하였지만 아쉽게도 1980년대 중반 가축시장 폐쇄와 2008년 철도역 이전으로 본격적인 쇠퇴 과정을 맞는다. 판교마을은 굴곡진 근·현대기 마을의 역사 흐름과 흔적들을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역사문화공간이다. 우리 근현대 역사를 잘 간직한 이 마을은 언뜻 보면 마을 전체가 낡고 퇴색한 느낌이지만 예스러운 간판 등을 보면 살아있는 근현대사 박물관 같은 곳이 바로 서천의 판교마을이다.

1900년대 중후반 어디쯤에서인가 멈춘 판교마을을 더욱 예스럽게 보이게 하는 것은 낡은 간판, 혹은 켜켜이 먼지 쌓인 유리창에 붙어있는 옛 글씨체들이다. 지금은 문을 닫은 곳이 많지만 이 글씨체들이 이곳이 정미소, 사진관, 싸전, 극장, 술 만드는 곳이었음을 알려 준다.

장항선 노선은 전 구간 단선 철도로 열차 운행에 불편이 많았고 잦은 지연과 긴 소요 시간으로 불편이 적지 않았다. 직선화 공사에 따라 장항선에서는 무려 14개의 역이 폐역됐다. 판교역도 이때 폐역이 돼 시간이 멈춘 마을이 됐다. 하지만 이것이 판교마을의 본 모습은 아니다. 지난 1930년 조용하던 마을에 장항선 판교역이 들어서면서 인근에 있던 면사무소·우체국·경찰서 등 관공서가 모두 판교면 현암리로 옮겨왔다. 판교마을은 자연스럽게 역 주변으로 상권이 형성되고 ‘초역세권’ 입지를 구축하면서 인근 중소 읍의 중심지로 떠올랐다. 또한 충남에서 손꼽는 우시장이 열리면서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마을 인구도 8000명을 넘었다. 하지만 판교마을의 호시절은 반세기만에 끝이 났다.

1970년 후반까지 번성하던 역전 마을은 멀리 4차선 도로가 뚫리고 2008년 장항선 직선화 사업으로 판교역마저 다른 곳으로 옮겨가면서 급격히 쇠락하기 시작했다. 마을 일대는 철도시설공단 부지로 묶이며 건축 제한에 걸려 개발이 어려워졌고, 1980년대에는 우시장마저 사라졌다. 급변하는 세상의 시간을 못 맞추고 느리게 돌던 시계바늘은 어느 순간 완전히 멈춰서고 말았다. 판교면 전체 주민 수는 현재 2000여 명으로 줄어들었고 썰물처럼 상인과 젊은이들이 빠져나간 마을은 전성기의 흔적만 그대로 남겨둔 채 고향마을을 지키는 어르신들이 옛 영화를 되새김하고 있다. 현재 면 소재지인 판교마을 인구은 200여 명에 불과하다고 한다. 썰물처럼 사람들이 빠져나간 마을은 전성기를 누리던 그 시절을 놓지 못하는 듯 시계를 거꾸로 돌린 것처럼 오래된 흔적을 그대로 품고 있다.

판교역은 일제강점기인 1930년 11월 1일 개통됐다. 장항선은 경부선 천안에서 호남선 익산 사이를 연결하는 160.2km 구간을 가리킨다. 초기의 명칭은 충남선으로 1922년 6월 1일에 천안에서 온양온천 사이가 먼저 개통됐고, 1931년 8월 1일에 전 구간이 개통됐다. 예산, 홍성, 광천, 대천 등 충남의 주요 도시를 연결하는 지방 교통의 간선을 이루는 노선이다. 지역 상권의 시발점이자 중심이었던 판교역은 장항선 직선화 작업으로 2008년 ‘판교역사(驛舍)’를 인근 저산리로 옮기면서 아쉽게도 근대문화유산으로 가치가 높은 역사의 흔적을 남겨 놓지 못했다.

다만 옛 판교역사 앞 노송 한그루만이 판교역 주변의 번성기를 기억할 뿐이다. 역사가 철거된 자리에는 ‘판교특화음식촌’이 들어섰다. 건물 한편에 ‘옛 판교역사’를 본떠 만든 조형물이 그나마 아쉬움을 달래주고 있다. 1930년 이곳에 역이 개통되면서 양곡을 비롯한 물자 수송과 정미, 양곡, 양조산업이 번성했다. 하지만 이곳은 우리 민족의 아픈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일제강점기 판교역을 통해 징용, 징병, 위안부 수송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 겹겹이 쌓인 세월의 흔적이 담긴 풍경들
옛 판교역에서 판교면행정복지센터 방향 길 양쪽으로는 100년 가까이 된 주조장과 언제 문을 닫았는지조차 알 수 없는 사진관, 정미소와 미용실, 건강원, 적산가옥, 추억 속 통닭집까지 빛바랜 사진 속에서나 볼 법한 겹겹이 쌓인 세월의 흔적이 담긴 풍경이 펼쳐지는 곳이 ‘판교마을’이다. 회백색 시멘트 건물로 세월의 때가 켜켜이 쌓인 ‘동일주조장’의 출입문 위에 ‘TEL 45’가 눈에 들어온다. 수화기를 들고 통화하고 싶은 사람의 이름을 대면 교환원이 전화를 연결해 주던 시절, 동일주조장의 전화번호다. 1932년 영업을 시작한 ‘동일주조장’은 이 지역 최고의 부호가 운영하던 술도가였다. 동일주조장 2대 사장은 바로 옆 판교중학교 설립자이기도 하다. 3대가 대를 이어 운영하던 주조장은 2000년 문을 닫았다. 동일주조장 옆 건물인 동일정미소는 1970년대 동일주조장에 원활한 쌀 수급을 위해 세워졌다. 동일정미소는 영화 ‘오! 문희’의 촬영지다. 정미소가 문을 닫은 뒤 판교중학교로 올라가는 외벽에는 그림이 그려져 있다.

1930년대 지어진 삼화정미소는 오씨가 운영했다고 해서 ‘오방앗간’으로 불렸다. ‘선진소방구현’ 글자가 희미하게 남아있는 옛 판교소방서 건물. 판교마을은 그 흔한 카페도 하나 없을 정도로 개발의 손길이 닿지 않은, 날 것 그대로의 풍경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옛 장미사진관 건물은 일제강점기 지어진 적산가옥이다. 광복 이후 수차례 주인이 바뀌면서도 외형은 그대로 유지됐다. 판교마을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곳이 시장 입구에 자리한 옛 장미사진관이다. 1932년 일본인 손으로 지어진 이 적산가옥은 마을에서 유일한 2층 목조 주택이다. 지금으로 치면 판교마을의 랜드마크다. 분지인 판교마을은 일제강점기에 농지가 부족해 쌀 수급에 어려움을 겪었는데 당시 이곳에 거주하던 일본인 지주는 ‘집 앞에 서서 일본어로 일왕을 찬양하며 만세삼창을 외쳐야 쌀을 빌려줬다’고 전해진다.
 

충남 서천군 판교면 현암리 근대문화역사공간에 있는 ‘장미사진관’.

장미사진관이 들어선 것은 그로부터 한참 후 이야기다. 광복 이후 여인숙, 쌀 상회 등으로 운영되다가 사진관으로 바뀌었다. 마지막으로 사진관이 폐업한 뒤 수십 년간 방치되다시피 했다. 용도가 수없이 바뀌면서 건물 외관은 손상됐지만 내부는 지어질 때 모습 그대로라고 한다. 1층 일부분은 지금도 살림집으로 쓰이고 있다. 장미사진관 뒤편의 판교 5일 장(5, 10일) 넓은 공터가 판교장터이고, 현재 보건지소 자리가 옛 우시장 터란다. 1930년대 당시 판교 우시장은 광천, 논산과 함께 충남 3대 우시장으로 명성을 날렸다. 소뿐만 아니라 돼지와 닭, 개 등 다양한 가축을 거래하는 가축시장이었다. 지금은 장터 벽면에 그려진 다양한 소 그림이 당시의 번성했던 우시장을 짐작해볼 수 있다.

장미사진관 건너편은 닭집이다. 주민들에게 ‘촌닭집’으로 불리는 이 건물 역시 한때 중심 상권이었다. 최초 면사무소 옆 대서방으로 시작해 양품점, 만화 가게, 한의원, 건강원 등을 거쳐 마지막으로 내걸린 상호가 닭집이다. 건물 입구에 ‘생닭’ ‘통닭’ ‘백숙’과 ‘건강원’이라는 색 바랜 문구가 이 건물의 역사를 짐작하게 한다. 적어도 20여 년 전에는 닭집마저 문을 닫았다. 건물은 겉으로 보기에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위태롭게 서 있지만 뒷쪽으로 마을의 유래가 된 검은 바위 ‘현암(玄巖)’이 받쳐주고 있어 아직 건재하다. ‘현암 바위’는 판교마을의 역사를 전시한 ‘현암갤러리’ 안에서 직접 볼 수 있다.
 

판교마을 번영의 상징이었던 ‘판교극장’.
판교마을 번영의 상징이었던 ‘판교극장’.

한편 ‘판교철공소’ 맞은편에는 과거 판교마을 번영의 상징이었던 판교극장이 있다. 1960~70년대 영화와 공연이 열리던 ‘판교극장’은 텔레비전 보급과 인구급감으로 문을 닫았다. 마을에 영화관이 들어선 것은 1961년인데, 당시 군 소재지에나 하나 있을 법했던 극장이 옛 판교역 바로 옆에 2층 건물로 세워졌다. ‘공관’으로 불리던 극장 건물의 용도는 새마을운동 홍보가 주목적이었지만 마을의 문화생활을 책임지는 유일한 공간으로 영화상영부터 유명가수들의 공연, 콩쿠르까지 모두 이곳에서 열렸다.

영화가 개봉하는 날이면 인근 지역인 부여·공주·보령 등 주변 도시에서도 찾아올 정도로 인기가 대단했다고 전한다. 판교극장에는 아직도 과거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꼬마 신랑’ 등 1970~80년대 영화 포스터와 매표창구. 당시 최고의 문화  공간인 극장 주변으로 자연스럽게 상권이 형성되면서 판교극장은 주변에서 인구를 빨아들이는 역할을 했던 곳이다. 영화와 공연을 감상한 관람객들은 밤늦게까지 술잔을 기울이다가 기차를 놓쳐 주변에서 하룻밤 묵어가기도 했다. 
 

판교극장 입구에 내걸린 옛 영화 포스터.

하지만 주변 마을의 부러움을 사던 극장은 1970년대 텔레비전 보급과 함께 하향길로 들어섰다. 극장으로의 쓰임을 다한 판교극장은 브루스 리와 청룽(재키 챈) 영화가 인기를 끌던 1970~80년대에 쌍절곤·호신술을 가르치던 체육관으로 쓰이기도 했으며, 마을회관으로 활용되기도 했다. 지금은 버려진 이 건물에는 작은 구멍으로 입장권을 내주던 매표소부터 유리창에 붙은 문구까지 세월의 흔적들이 그대로 남아있다.

현재 판교마을은 문화체육관광부 ‘폐산업시설 유휴공간 문화재생사업’에 선정돼 판교마을 전체가 국가 등록문화재로 등록돼 제2의 부흥기를 맞고 있다. 판교마을의 근대역사문화 공간이 서천 장항과 함께 전북 군산, 익산, 전주로 이어지는 근대역사문화공간 관광벨트가 얼마나 많은 관광객들의 발길을 끌어들일지가 벌써 관심사다. 역사문화유산을 간직한 충남도청소재지 홍성이 주목해야 할 일이다. 홍성지역에 잘 보존된 근대역사문화유산에 던지는 메시지다.
 

판교마을의 행정동인 현암리의 유래가 된 검은 바위.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