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도 53개 군현서 한 칸씩 건립 비용 분담한 ‘추사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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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도 53개 군현서 한 칸씩 건립 비용 분담한 ‘추사고택’
  • 취재|글·사진=한관우·한기원 기자
  • 승인 2022.09.24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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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숲길, 내포문화숲길의 역사·문화유산 〈15〉
예산 신암 ‘추사 김정희 고택’
추사 김정희 고택(秋史 金正喜 古宅) 전경.

내포문화숲길 백제부흥군길과 역사인물·동학길 코스인 예산 신암면 용궁리(추사고택로 261)에는 ‘추사 김정희 고택(秋史 金正喜 古宅)’이 있다. 이곳에는 추사를 비롯한 일가의 무덤이 몰려 있고 추사기념관도 자리하고 있다. 고택 뒷산인 오석산(烏石山) 서남쪽 자락에는 추사 김정희(金正喜, 1786~1856)의 체취가 물씬 풍기는 ‘화암사(華巖寺)’도 위치하고 있다. 오석산은 97m에 불과 하지만 주변 지역도 야트막한 구릉지대로 형성돼 있다. 추사 고택과 화암사는 산길로도 이어지지만 자동차를 이용해 돌아가면 같은 산자락인지조차도 알아차리기 쉽지 않다. 이곳(화암사) 뒷산 바위에는 추사가 ‘소봉래(小蓬萊)’라고 써서 바위에 새겨 놓은 글씨가 아름다움을 말해주는 듯하다. ‘봉래(蓬萊)’란 ‘금강산(金剛山)’의 다른 이름이 아니던가. 

추사의 증조할아버지 김한신(1720~1758)은 영조의 둘째 딸이자 사도세자의 누이동생인 화순옹주와 혼인했다. 두 사람은 왕실로부터 추사고택 일대 토지를 별사전으로 받았다. 그 땅에 화암사도 포함돼 있었다고 한다. 월성위(月城尉)에 책봉된 김한신은 화암사를 중건해 집안의 원찰(願札)로 삼는다. 그러니 화암사는 한마디로 경주김씨의 집안 절이었다. 그래서인지 절집 배치도 다른 사찰과 조금 다르고, 정면은 안채와 사랑채의 기능이 합쳐진 듯한 요사채가 가로막고 있어 사대부 가옥의 분위기를 풍긴다고 한다. 여기서 ‘화암사(華巖寺)’는 다음에 다루고 이번에는 ‘추사 김정희 고택’에 관해 살펴본다.


■ 추사 김정희, 당대 최고 명문가서 태어나
조선시대 정조 10년(1786년) 봄, 충청 지방에 큰 가뭄이 들었다고 한다. 충청도 예산 땅 신암면 용궁리에도 가뭄이 극심했다. 마을과 집안의 우물은 말라 가고 푸르던 초목은 생기를 잃었는데, 6월 3일이 되자 돌연 우물에 물이 차오르고 나무와 풀이 초록빛으로 싱그럽게 되살아났을 때 마을에서는 한 아이가 태어났다. 회임 후 어머니 뱃속에서 24개월이나 있다가 태어났다는 이상한 아이가 바로 병조판서를 지낸 아버지 김노경(金魯敬)과 어머니 기계유씨(杞溪兪氏) 사이에서 태어난 장남인 김정희(金正喜)다. 추사 김정희야말로 ‘금수저’를 물고 세상에 태어났다. 영조의 계비(繼妃)인 정순왕후(貞純王后)가 12촌 대고모이고, 고조부 김흥경(金興慶)은 영의정까지 올랐으며, 증조부 김한신(金漢藎)은 영조의 사위다. 경주김씨는 안동김씨, 풍양조씨, 남양홍씨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가히 당대 최고 명문가였다.

추사 김정희와 연관 깊은 김한신은 영조대왕의 둘째 딸인 화순옹주(和順翁主)와 혼인해 월성위(月城尉)라는 부마의 작호를 받은 인물이다. 영조는 사위와 딸을 위해 경복궁 영추문 바로 맞은편(현재 서울 통의동)에 월성위궁을 하사했다. 현재 통의동 골목 안쪽의 월성위궁이 있던 자리에는 백송나무가 있었는데, 우리나라 백송나무 중 가장 크고 아름다워 천연기념물로 지정됐는데 1990년 태풍에 쓰러졌다고 전해진다. 영조는 또 예산 신암의 용궁리 일대를 사전(賜田)으로 내리고 충청도 53개 군현(郡縣)에서 한 칸씩 건립 비용을 걷어 집을 짓게 했다고 전해지는데, 이렇게 건축된 것이 바로 ‘추사고택(秋史古宅)’이다.

추사 탄생 무렵 아버지 김노경은 월성위궁에 살았는데 당시 한양에 천연두가 창궐하자 아내를 예산으로 내려보냈다고 한다. 추사가 어릴 적에 쓴 ‘입춘첩(立春帖)’과 관련한 흥미로운 이야기는 여섯 살 때 추사가 쓴 ‘입춘대길(立春大吉)’이란 글씨를 월성위궁 대문에 붙였는데 북학파의 거두 박제가(朴齊家; 1750~1805)가 이를 보고 추사의 아버지에게 “이 아이는 앞으로 학문과 예술로 세상에 이름을 날릴 만하니 제가 가르치겠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훗날 추사는 박제가의 가르침을 받았고, 결국 북학의 수준을 높이는 역할을 한다. 추사의 실학은 바로 박제가에게서 비롯된다. 추사 김정희의 명성은 25세 때 청나라 연경으로 가는 사행에 그의 아버지 김노경이 동지부사로 가게 됐을 때 자제 군관으로 동행해 중국의 석학들에게 인정을 받으면서 활짝 꽃피웠다.

일곱 살 때는 번암 채제공(蔡濟恭)이 입춘첩을 본 후 추사의 아버지를 찾아와 “이 아이는 필시 명필로서 이름을 세상에 떨칠 것이지만 만약 글씨를 잘 쓰게 되면 반드시 운명이 기구할 것이니 절대로 붓을 잡게 하지 마시오. 그러나 만약 문장으로 세상을 울리게 하면 크게 되리라”고 했다고 전한다. 신기하게도 채제공의 예언처럼 추사는 글씨로는 세상에 이름을 날렸지만 제주도와 북청에서 유배 생활을 두 번이나 하는 모진 운명을 맞는다. 7~8세 때까지 이곳에서 생활한 추사는 8살 무렵 대(代)를 이을 아들이 없던 백부 김노영(金魯永)의 양자로 들어가 집안의 종손으로 살아간다. 8살 때 생부와 동생들에게 보낸 문안편지를 보면 나이에 비해 글의 내용이 어른스럽고 사려 깊은 것을 엿볼 수 있다. 

“삼가 살피지 못했습니다만, 장마와 무더위에 건강은 어떠신지요. 사모하는 마음 그지없습니다. 소자는 어른(백부)을 모시고 글공부하면서 편안하게 지내고 있으니 다행입니다. 백부께서 막 행차하셨는데 비가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고, 더위도 이와 같으니 염려되고 또 염려됩니다. 아우 명희와 어린 여동생은 잘 있는지요. 제대로 갖추지 못했습니다만 살펴주십시오. 계축년(1793) 6월 10일 아들 정희 올립니다.” 

하지만 추사 김정희의 10대는 평탄치 않았다. 10대 초반에 이미 할아버지와 양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면서 어린 나이에 집안을 이끌어야 했다. 16세에 친어머니를 잃었고, 20세 때는 부인 한산이씨와 사별한 데 이어 스승 박제가마저 세상을 떠났다.
 

국보 제180호 세한도.


■ 추사 고택, 53칸 규모 1976년 일부만 복원
추사 고택은 영당, 안채, 사랑채, 솟을대문 순으로 동서로 길게 자리한다. 낮은 구릉을 등지고 앞에는 너르고 야트막한 들녘이 펼쳐져 살가운 삶터의 분위기를 풍긴다. 우리의 한옥은 역사와 문화를 거의 모두 담아낸 문화의 결정체다.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의 추사 고택도 마찬가지다. 이 고택은 추사 김정희가 여덟 살 무렵까지 머물던 곳이라고 한다. 추사는 장성해서도 가끔은 이곳에 내려와 책을 읽었다고 하니 고택 안팎으로 추사의 체취가 넉넉한 이유인지도 모르겠다. 1786년(정조 10년) 6월 3일에 이 집에서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가 태어났으며, 55세 때인 1840년(헌종 6)에 정쟁에 휘말려 제주도에서 9년간 유배 생활을 하면서 자신만의 서체인 추사체를 완성했다.

추사 김정희가 가난하게 글씨 공부만 한 사람으로 생각되지만, 사실 명문가의 후예이다. 김정희의 고조부 김흥경은 영의정을 지냈고 증조부 김한신은 영조 임금의 딸인 화순옹주와 결혼했다. 임금의 사위가 되면서 서울과 예산에 저택을 하사받았다. 안내문을 보면 예산의 이 집은 53칸 규모였는데 충청도 53개 군현에서 한 칸씩 건립 비용을 분담했다고 돼 있다. 현재 남아있는 고택은 1976년에 일부만 복원한 것이다. 집 안으로 들어가면 먼저 사랑채가 나오고 이어 안채가 나온다. 이 집에 임금의 딸과 사위가 살았기에 안채의 부엌은 난방용으로만 쓰이고 요리를 위한 부엌은 따로 뒀는데, 이것이 왕실 주택 구조를 차용한 것이라고 설명해 놓았다. 집안 곳곳에서는 추사의 글씨를 볼 수 있다.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화단을 ㄱ자로 두른 사랑채가 나타난다. 화단에는 추사가 해시계 받침대로 썼다는 육각 돌기둥에는 ‘석년(石年)’이란 글씨가 새겨져 있다. 

사랑채에는 온돌방이 세 칸 있고, 나머지는 대청과 마루가 있는데, 사랑채 마루 벽에는 추사의 대표작인 ‘세한도(歲寒圖, 국보 제80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복제본이 걸려 있다. 겨울날 소박한 집 한 채 좌우로 소나무와 잣나무가 서 있는 그림이다. 그림에는 추사가 1840년부터 9년간 제주도에서 유배 생활을 할 때 사제의 의리를 지켜준 제자 이상적(李尙迪)에 대한 고마움이 담겨있다. ‘세한(歲寒)’은 논어(論語) 자한(子罕) 편의 ‘추운 계절이 된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푸르게 남아있음을 안다(歲寒然後 知松柏之後凋)’에서 따온 것이다. 제자의 의리를 추위에도 푸른 나무에 비유한 것이다. 세한도에는 ‘오래도록 서로 잊지 말자’는 뜻의 ‘장무상망(長毋相忘)’이 새겨진 인장이 찍혀 있다.

고택을 나와 오른쪽으로 우물을 지나면 추사의 묘가 있다. 추사는 15세에 동갑인 한산이씨와 혼인해 금실이 좋았으나 5년 만에 잃었고, 23세에 두 살 아래 예안이씨와 재혼한다. 1937년 후손들이 한산이씨 홀로 잠들어 있던 이곳 묘소에 과천에 묻혔던 추사와 예안이씨를 이장하면서 3인 합장묘가 됐다고 한다. 1810년 추사 김정희가 직접 심었다는 ‘백송(천연기념물 제106호)’ 뒤의 무덤은 추사의 고조부 김흥경의 묘다. 고택의 동쪽으로 월성위묘(추사의 증조부 김한신), 화순옹주 홍문이 보인다. 
 

추사 김정희 고택 내부 모습.
추사 김정희 고택 내부 모습.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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