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역사·현대가 어우러진 ‘구룡포근대역사문화거리’
상태바
100년 역사·현대가 어우러진 ‘구룡포근대역사문화거리’
  • 취재=한기원·백벼리 기자
  • 승인 2022.10.09 08:3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사라지는 원도심 근대문화유산 어떻게 보존·관리할까 〈11〉
화창한 오후 관람객들로 가득한 구룡포 일본인 가옥거리 입구 모습.

포항 구룡포 ‘아홉 마리 용이 승천한 바다’ 천혜의 빼어난 경관
근대역사문화 많아 관광객들의 발길이 북적이는 보석 같은 지역
구룡포 어업권 장악한 일본수산업자들 살던 대표적인 수탈 현장
포항시, 구룡포의 적산가옥을 보존·활용해 유명 관광지로 만들어

 

경북지역의 경우 지난 2005년 마무리된 문화재청의 근대문화유산 목록화 조사에서 총 658건이 확인돼 서울의 710건에 이어 전국에서 두 번째로 많은 지역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건수는 7.1%에 불과한 47건에 그치고 있다는 설명이다. 포항의 경우 철도기념물로 지정된 옛 포항역사를 철거하거나 80~90여 채가 넘는 구룡포 일대의 일본식 가옥 가운데 단 한 건도 등록문화재로 지정하지 못하는 등 무관심으로 일관했다는 지적이다.

포항 구룡포는 ‘아홉 마리의 용이 승천한 바다’라고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천혜의 빼어난 경관과 더불어 풍부한 어장으로 인해 동해안 어업전진기지 역할을 하며 계절마다 전국 최고의 특산품이 생산되고 있다. 물길 따라 발길 따라 근대문화 역사가 많아 주말마다 관광객들의 발길이 북적이는 보석 같은 지역이다. 하지만 이곳은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의 지원과 지지를 배경으로 구룡포 일대의 어업권을 장악한 일본 수산업자들이 살던 대표적인 조선어업의 수탈 현장이다.

우리나라 지형은 만주 벌판을 향해 포효하는 호랑이 형상으로 호랑이 꼬리에 해당하는 곳이 호미곶이다. 구룡포는 호랑이 꼬리에 해당되는 지형상 특성과 같이 구룡포 사람들은 예로부터 호랑이처럼 빠르며 용맹하고 기상이 넘치면서 전국 최고의 애향심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42년 10월 1일 구룡포읍으로 승격됐고, 최고 호황기에는 3만 명 이상의 인구가 거주했다고 한다. 지금은 호미곶면이 분리되고 어업 등이 예전만 못해 현재 인구는 7000여 명이지만 관광지와 전통시장, 수산물판매장 등 포항 외곽지역의 한 도시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구룡포 일본인 가옥거리를 가득 메운 관람객들.

■ 어업의 수탈 현장, 이젠 관광객 발길 북적
포항 구룡포에는 적산가옥이 80~90여 채가 남아 있다고 한다. 적산(敵産)은 ‘자기 나라의 영토나 점령지 안에 있는 적국의 재산 또는 적국인의 재산’을 말한다. 우리나라에서는 광복 이후 일본인들이 남기고 간 집이나 건물 등을 지칭하고 있다. 구룡포에 일본인들이 본격적으로 이주해 온 것은 1906년부터다. 어업의 전진 기지로 알려지면서 수많은 일본인 어부가 구룡포에 정착했다. 특히 1926년과 1935년 두 차례에 걸쳐 현대식 방파제를 완공해 동해안 최대의 어업기지가 됐다. 이로 인해 1932년경 구룡포에 거주한 일본인은 287가구 1161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일본인이 운영하는 통조림 가공공장은 물론이고 음식점, 제과점, 주점 등이 들어서면서 구룡포는 최대의 상업지구로 이름을 떨쳤다. 좁은 골목 좌우로 일본식 2층 목조 가옥이 늘어서 있던 구룡포 읍내 장안마을은 당시 ‘종로거리’로 불리기도 했다.

구한말 일본 어민들은 세토나이카이(瀨戶內海·일본 혼슈 서부와 규슈, 시코쿠에 에워싸인 내해)의 어장이 줄고 어자원을 둘러싼 분쟁이 커지자 1800년대 후반부터 한반도 구룡포로 눈을 돌렸다. 1883년 조일통상장정은 일본 어민들이 한반도로 진출할 수 있는 토대가 됐다. 이후 1906년 가가와현의 어업단 ‘소전조(小田組)’ 80여 척이 고등어 등 어류 떼를 따라 구룡포로 들어오면서 이주에 불이 붙었다. 1908년 11월 한일어업협정을 맺으면서 일본 가가와(香川)현과 오카야마(岡山)현의 수산업자와 어민들이 대거 경북 포항 구룡포로 몰려왔다. 일제가 당시 식민지였던 한반도로 이주할 것을 권유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일제의 전폭적인 지원을 등에 업고 구룡포 일대에 도로와 항만을 건설했고, 해방 때까지 동해 연안의 풍부한 어장에서 부를 축적했다. 일본 어민들이 1910년을 전후해 구룡포에 정착할 당시 이곳에 사는 한국인은 2~3가구에 불과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한반도의 어업 전진 기지로 번성한 구룡포는 사실상 일본인들에 의해 건설되고 운영됐다.
 
구룡포가 성장하면서 이주해온 한국인들은 일본인들이 운영하는 조합이나 어선에서 일하며 생계를 이었다. 하시모토 젠키치(橋本善吉)와 도가와 야사부로(十河彌三郞)는 당시 구룡포에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진 대표적인 인물이다. 
 

구룡포 근대역사관 전경.

하시모토의 집은 현재 ‘근대역사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함석지붕에다 정원을 갖춘 집은 흙·나무·종이를 주로 이용했고, 채광을 위해 많은 창문을 낸 전형적인 일본인 주거지의 모습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이 집은 2층 구조로, 건축면적은 210㎡다. 하시모토의 집무실과 안방(다다미방)이 있는 1층의 부엌 아궁이는 바깥으로 툭 튀어나왔다. 한국의 재래식 아궁이가 방 쪽으로 들어가 있는 모습과 대조적이다. 방 안에는 안녕을 기원하는 ‘불단(佛壇)’이 있다. 이 건물에는 또 평민들의 가옥에서는 잘 볼 수 없는 폭 1m의 툇마루가 있다. 이는 재력이 있는 집이라는 것을 나타낸다. 1·2층에 각각 3개로 나뉜 방 사이에는 중간 방문을 설치했고, 손님이 많으면 이를 떼 내고 대형 집회장으로 사용됐다. 방과 방 사이 경계를 이루는 윗부분은 ‘란마(爛間)’가 설치돼 공간의 연속성을 주면서 통풍과 채광을 할 수 있게 했다. 하시모토 집의 2층 서재에는 액자나 족자 같은 장식품과 함께 위엄을 상징하는 흑단목 재질의 ‘도코바시라’라는 장식 기둥이 있다. 특이한 점은 대문 입구에 놓인 목재 재질의 ‘간독’이다. 수산업 종사자의 집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이 간독은 생선을 잡아 보관하기 쉽게 소금에 절인 후 일본으로 유통하기 위한 것이다.

구룡포가 가장 번성했던 1930년대에는 포구 인근 500여m의 중심도로 옆에 220여 가구의 적산가옥이 즐비했다고 한다. 현재 보존된 가옥은 90여 채이며, 대부분 건물의 앞면 쪽만 일본식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카페로 활용되고 있는 구룡포애(愛) 오소(OSO).

■ 적산가옥, 역사교육·관광자원 활용방안` 필요
구룡포에는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이 거주했던 가옥 90여 채가 남아 있다. 세월이 흘러도 당시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채 관광객들을 맞고 있다. 포항시는 이 거리를 2011년부터 근대역사문화거리로 재조명하며, 주변 경관과 함께 관광 자원화에 노력하고 있다. 

특히 2019년 ‘동백꽃 필 무렵’ 드라마가 촬영돼 방송된 후 핫플레이스로 자리매김하며 대게상가를 비롯한 전통시장은 주말이면 관광객들로 문전성시를 이룬다. 대게를 비롯한 특산품이 날개가 돋힌듯 팔리고 새로운 먹거리도 개발되는 등 관광객들이 넘쳐남에 따라 지역 상권은 큰 호기를 맞게 됐다. 이곳을 찾는 관광객들에게 구룡포는 드라마 촬영지로 포항의 가볼만한 곳뿐만 아니라 우리의 아픈 역사를 기억할 수 있는 산 교육장으로 꼭 가봐야 하는 곳으로 꼽힌다.

적산가옥은 일제의 잔재인가? 이런 ‘적산가옥’들은 그동안 일제의 잔재로 여겨져 주목받지 못했고, 무분별한 개발로 인해 빠른 속도로 사라지고 있다. 1960년대부터 양옥이 도입되면서 적산가옥이 사라지기 시작했고, 1990년대 이후 아파트건립 바람은 적산가옥을 포함한 단독주택들을 싹쓸이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적산가옥을 일본식 주택으로만 볼 수 없다고 밝히고 있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이를테면 지붕 형식과 창문 등은 일본식이지만, 온돌과 두꺼운 벽을 사용한 것은 한국식이며, 벽난로와 입식 구조는 서양식이라는 것이다. 더욱이 이 적산가옥엔 일본인들이 산 기간보다 해방 이후 한국인들이 산 기간이 더 길다는 것이다. 일본인들이 남긴 건물이어서 막연한 반감을 가질 수도 있지만, 실제로는 근대 시기 한국에 도입되고 적응한 주택의 한 형태로 봐야 할 것이다. 

그러나 적산가옥을 보존·활용하는 일은 간단치만은 않다. 보존·활용 가치가 크다고 판단되는 잘 지어진 적산가옥들을 등록문화재로 올리면 정부의 지원도 받고 적절히 활용할 수도 있다. 한옥과 근대건축물, 적산가옥 등 옛 건축물들을 보존하는 경우 세금 감면이나 보수 지원 등의 혜택을 주는 방안도 검토가 필요하다. 적산가옥들을 역사 교육과 관광자원으로 활용할 수 있는 정책방안이 절실히 필요한 시점이다.
 

관람객들이 까멜리아 카페 앞에서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있는 모습.

‘적산’은 적의 재산이라는 뜻으로, ‘적산가옥’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한국에 지어 살았던 집과 건물을 일컫는다. 인천·군산·목포·부산·포항·진해 등 식민지 수탈의 근거지였던 항구도시에 적산가옥과 건물들이 많았다. 

포항시는 구룡포의 적산가옥을 보존·활용해 유명 관광지로 만들었다. 근대문화유산에 대한 새로운 인식의 흐름 속에서, 일제강점기 구룡포 지역의 일본인 가옥 또한 보존적 가치가 있다고 판단하고 이 지역을 복원했다. 현재 ‘구룡포 근대문화역사거리’로 이름을 붙이고 보존·활용되고 있다. 특히 일본인은 물론 국내외 관광객들이 부쩍 늘어나면서 포항지역의 사계절 관광명소로 거듭나고 있다. 근대역사문화유산을 간직한 천년 역사문화도시 홍주(홍성)가 주목해야 할 시사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끝>
 

점심시간 굳게 문이 닫힌 구룡포근대역사관 전경.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