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이 은덕(恩德)에 보답하기 위해 지은 ‘덕산 보덕사(德山 報德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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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이 은덕(恩德)에 보답하기 위해 지은 ‘덕산 보덕사(德山 報德寺)’
  • 취재·사진=한관우·한기원·김경미·최진솔 기자, 협조=홍주일보·홍주신문 마을기자단
  • 승인 2023.07.22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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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도청신도시 주변마을 문화유산 〈6〉
예산 덕산 서원산의 보덕사. 흥선대원군이 부친 남연군을 위해 창건한 절.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와 서산시 운산·해미면에 걸쳐 있는 가야산맥의 가장 높은 봉우리를 가리켜 가야산(伽倻山)의 가야봉(678m)이라고 한다. 산의 높이는 600m급이지만 내포 평야를 품에 안고 우뚝 솟아있다. 정상인 가야봉(678m)을 비롯해 옥양봉(621.4m)과 석문봉(653m) 등이 산군을 이루고 있다. 유서 깊은 문화유적과 오염되지 않은 자연경관을 찾아 매년 많은 관광객들이 가야산을 찾는다. 가야산은 충남 서북부 사람들의 생활 터전이자 문화 창조의 원천이었으며, 내포 지역의 지리적 전형성(典型性)을 형성하는 바탕이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가야산과 상왕산(象王山)은 인접한 서로 다른 산이지만, 두 산을 하나의 산체로 인식해 부르기도 하는데, 두 산을 합쳐서 ‘가야산(伽倻山)’이라 부른다. 가야산은 본래 붓다(Buddha)가 깨달음을 이룬 ‘붓다가야(Buddhagayā)’의 서북쪽에 인접한 산을 의미한다. 이와 관련해 ‘호산록(湖山錄)’에는 “가야산이라는 이름은 본래 불서(佛書) 가운데서 유래된 것이다”라는 언급이 있는데, 이는 가야산 지명이 불교와 관련이 있음을 의미한다. 또 “가야산은 백제 때 상왕산이라 불렸는데, 신라 통일 이후 이 산 밑에 ‘가야사’를 세운 뒤 ‘가야산’이라 했다고 전해진다”는 주장도 가야산 지명의 불교 관련설과 연관이 있어 보인다. ‘가야(伽倻)’라는 산 이름은 불교에서 신성시되는 코끼리, 즉 상왕(象王)의 범어(梵語) ‘카야(Kaya)’에서 유래됐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정확치는 않다. 다만 가야산 자락에는 개심사, 일락사,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불상(국보 제84호)을 비롯해 보덕사 등 사찰과 불교 유적 등이 있어, 가야산의 불교와 관련성을 보여주고 있다.
 

보덕사 극락전.

■ 가야사 불태우고 남연군묘, ‘보덕사’ 창건
가야산 자락 백여 군데의 절 중 덕산면 상가리에 있던 ‘가야사(伽倻寺)’는 가장 큰 절이었다고 전한다. 가야사는 대부분의 절들이 불에 타버린 것과 달리 흥선대원군 이하응에 의해 일부러 불태워진 사찰이다. 젊은 시절을 안동 김씨의 세도에 밀려 불우한 시절을 보낸 야심가 흥선군이 오랜 세월을 공들여 실행한 일이 아버지 남연군묘(南延君墓, 충청남도기념물 제80호)를 가야산에 옮긴 일이다. 황현의 ‘매천야록’의 기록처럼 흥선군은 당대의 명지관 정만인에게 명당자리를 부탁, 가야산 동쪽에 ‘2대에 걸쳐 천자가 나오는 자리’를 얻는다.

우선 흥선군은 경기도 연천에 있던 아버지 이구(李球)의 묘를 임시로 금탑 뒤의 산기슭으로 옮겼다. 그때 마지막으로 옮겼던 사람들에게 상여가 기증됐고, 이 ‘남은들상여(국가민속문화재 제31호)’는 남은들마을에 보존됐다. 그러나 그 명당 터에는 ‘가야사’라는 절이 있었고, 지관이 점지해준 묘 자리에는 금탑이 서 있었다. 금탑으로 불린 가야사 탑은 고려의 나옹화상이 건립한 것으로 전해진다.

흥선군은 재산을 처분한 2만 냥의 반을 주지에게 주고 스님들을 쫓아낸 후 불을 지르게 한다. 절은 폐허가 되고 금탑만 남았다. 탑을 헐기로 한 날 밤 네 형제가 똑같이 꿈을 꾸었는데 “나는 탑신이다. 너희들은 어찌하여 나의 자리를 빼앗으려 하느냐 만약 일을 그만두지 못한다면 내 너희를 용서하지 않으리라” 겁에 질린 형들은 모두 그만두기를 원했으나, 대원군은 “그렇다면 이 또한 진실로 명당이다”라고 말한 뒤 탑을 부수자 도끼날이 튀었다. 그때 대원군이 “나라고 왜 왕의 아비가 되지 못한다는 것인가?”라고 소리치자 도끼가 튀지 않았고 흥선군은 정만인의 예언대로 대원군이 됐으며, 고종과 순종 등 2대에 걸쳐 왕을 배출한다. 

이와 관련 이건창의 시문집 ‘명미당문집’에는 탑을 파괴할 때 백자 두 개와 단차 두 덩이, 사리 3과가 나왔다고 기록하고 있다. “사리는 구슬처럼 보였는데 매우 밝게 빛났다. 물속에 잠겼지만 푸른 기운이 물속을 꿰뚫고 끊임없이 빛나는 것 같았다”는 사연을 지닌 남연군묘를 두고 사람들은 복치형(伏雉形, 꿩이 엎드려 있는 형국)이라고 전한다. 하지만 결과는 그렇게 좋은 일만 있는 게 아니었다. 오래지 않아 조선왕조는 500년간의 사직에 막을 내리게 된다. 대원군은 고종이 등극한 2년 뒤에 남연군 묘 맞은편 서원산(書院山) 기슭에 ‘보덕사(報德寺)’란 절을 짓고 원당 사찰로 삼았다. 남연군 묘는 고종 5년인 1866년(병인년)에 대원군의 쇄국정책에 불만을 품은 독일 상인 오페르트(Oppert, E. J.)가 1868년 5월 아산만과 구만포를 거쳐 상륙해 도굴을 시도, 묘가 파헤쳐지는 수난을 겪기도 했다. 이후 천주교도들은 이 일로 인해 또 한 차례 수난을 겪어야 했다. 

이러한 사연이 전해지는 덕산면 상가리에 있는 ‘보덕사(報德寺)’라는 절은 흥선대원군이 가야사의 금탑이 서 있던 자리가 ‘2대천자지지(二代天子之地, 2대에 걸쳐 왕위에 오를 수 있는 명당)라는 명당 풍수설에 현혹돼 가야사(伽倻寺)를 불태워버리고 남연군묘(南延君墓)를 이장했으며, 부처님께 속죄한다는 뜻으로 새 절을 창건하고 ‘보덕사(報德寺)’라 했다고 전해지는 절이다.
 

보덕사의 예산읍 3층 석탑(가야산 3층 석탑, 충청남도문화재자료 제175호).

■ 덕산 보덕사의 가야사 3층 석탑의 교훈
보덕사(報德寺)는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 277번지 서원산(書院山) 중턱에 자리한 대한불교조계종 제7교구 본사 수덕사의 말사이다. 보덕사는 한 많은 조선 말기 왕실의 운명이 전설처럼 서려 있는 역사적인 사찰로 절 이름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은덕(恩德)에 보답하기 위해 지은 절’이다.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이 부친 남연군(南延君)을 위해 창건한 절이다.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 1820~1898)은 조선 제26대 왕인 고종의 아버지이다. 어린 나이에 즉위한 국왕을 대신해 10년간 섭정을 하면서 국정을 장악했고, 이후에도 많은 영향력을 행사했던 조선말 최고의 권력가이기도 하다.

대원군은 본래 경기도 연천에 있던 남연군(南延君)의 묘를 풍수 전문가의 조언에 따라서 1846년 덕산(德山) 가야사(伽倻寺) 터로 이장했다. 지관(地官)이 조선 최고의 명당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고종 즉위 이후에 묘 인근에 보덕사(報德寺)라는 절을 창건했다. 부친의 극락왕생을 빌고 묘를 지키는 ‘능침사(陵寢寺)’로 삼고자 한 것이다. 

이에 대해 황현(黃玹)이 쓴 ‘매천야록(梅泉野錄)’에는 “갑자년(1864) 이후 국비를 들여 절을 짓고 이름을 보덕사(報德寺)라고 했다. 토목(土木)에 금을 칠해 극히 웅장하고 화려했으며 장엄했다. 그리고 논밭도 하사하고 보화도 후하게 주었다”고 쓰고 있다. 이 내용은 흥선대원군이 보덕사를 원찰로의 위상과 품격을 갖추기 위해 많은 공력을 쏟았음을 엿보게 하는 대목이다. 대원군은 보덕사의 현판도 친히 썼는데, 이 현판은 사찰 대방(大房)에 걸려 있다.
 

보덕사 석등(충청남도지방문화재 제183호).

1864년 절을 짓고 다음 해인 1865년 보덕사에는 주불전인 극락전에 아미타여래도, 지장시왕도, 현왕도, 신중도 등을 제작·봉안했다. 이 역시 흥선대원군의 발원·시주로 진행됐다. 이에 대해서는 ‘지장시왕도’ 하단의 화기란에 상세히 명시했다. “동치(同治) 4년인 1865년 7월에 충남 덕산군 보덕사의 불상과 각각의 불화들을 제작해 봉안한다. 대시주자는 경성(京城) 내수동(內需洞)에 사는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경진생(庚辰生) 이씨(李氏)와 여흥부대부인(驪興府大夫人) 무인생(戊寅生) 민씨(閔氏)이다”라는 내용이다. 다른 불화에는 기록이 따로 없지만, 화기에도 ‘여러 점의 불화’를 함께 제작했다고 쓰여 있고, 화풍이 유사한 것으로 보아 1865년에 같이 제작된 것임을 알 수 있다. 

“7월에 극락전 내 불상과 불화 불사가 있을 때, 흥선대원군이 이곳에 머물고 있었던 것 같다.”고 했는데, 이를 뒷받침해줄 만한 근거는 ‘고종실록’에서 찾을 수 있다. ‘고종실록’ 권2에 대원군은 남연군묘에서 별다례(別茶禮, 특별한 일이 생겼을 때 드리는 차례)를 행하기 위해 1865년 7월부터 8월 말까지 덕산(德山)에 머물렀다고 하는데, 이 시점이 불사가 이뤄진 시기와 일치한다. 

남연군묘 동북쪽으로 100여m 가량 떨어진 곳에는 북향을 하고 있는 석불이 남아 있다. 상가리미륵불(문화재자료 제182호)로 불리는 민불 형식의 관세음보살상이다. 보관을 쓰고 있는데 도관의 중앙에 화불이 장식돼 있다. 덕산도립공원의 임도를 따라 굽이굽이 걷다 보면 실제 거리보다 멀게 느껴진다. 이 돌부처의 방향은 골짜기가 형성된 북쪽을 향해 있는데, 가야사가 불타버리자 그 모습이 보기 싫어 돌아섰다는 설과 북쪽 계곡에서 쳐들어오는 병마를 물리치기 위해서 북향을 하고 있다는 전설이 전해져 내려온다. 

이하응은 가야사를 불태운 자신의 업보를 소멸하기 위해 인근에 사찰을 지었는데, 그곳이 보덕사다. 보덕사는 가야사 터에서 2km 가량 떨어진 산등성이에 지은 사찰로 가야사에 비한다면 규모는 그리 크지는 않다. 보덕사는 비구니 스님들의 수행처다. 수덕사 견성암에서 오도한 경희 스님의 문손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고 한다. 앞이 확트인 가야사 터와 달리 깊은 산중으로 느껴질 만큼 우거진 숲속 도량이다. 가야사지(충청남도기념물 제150호)에서 보덕사까지 가는 길은 그리 멀지 않다. 덕산도립공원관리사무소가 있는 곳까지 내려와 보덕사 방향으로 다시 오르는 고즈넉한 산길이다. 
 

보덕사에는 가야사 3층 석탑(충청남도문화재자료 제175호)과 석등(충청남도지방문화재 제183호)의 부재가 남아 있다. 가야사 3층 석탑은 원래 5층 석탑이었으나 2개 층이 멸실 됐다. 이도 일제강점기 때 일본으로 반출하려던 것을 보덕사의 스님이 지켜내 남게 됐다고 전해진다. 이 석탑은 가야사 터에 붕괴돼 있던 것을 1914년 일본으로 반출하기 위해 덕산 옥계리 백모 씨가 군산에 거주하는 일본인 모리 키구고로(森菊五郞)란 상인(1906년 모리상점)의 의뢰로 반출하는 것을 당시 보덕사 주지가 항의해 다시 회수, 예산군청 내에 보관하게 되었다고 1937년 예산군지는 기록하고 있다.

1936년 5월 27일 충청남도 지사가 학무국장에게 보낸 ‘석탑반출에 관한 건’에는 1936년 5월 20일에 예산군청에 옮겨졌음을 기록하고 있다. 이 탑은 2000년에 현재의 위치인 보덕사로 옮겨져 오늘에 이른다. 일본으로 반출됐다면 가야사는 조선 왕족에 의해 파괴된데 이어 일제에 의해 훼손되는 아픔까지 겪어야 했을 것이다. 어쩌면 반출 사실조차도 모른 채 망국의 아픔을 간직한 석탑으로 남았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가야사 3층 석탑은 원래 있어야 할 자리를 떠나 보덕사에 남았으나 도량의 중앙에 자리 잡지 못했다. 석축을 쌓아 올린 끝자락에 비켜 서 있다. 보덕사 터가 비좁은 이유도 있겠지만 왕족의 탐욕에 의해 사라진 가야사지를 기억하기 위해 원래 있었던 것처럼 보이려 하지 않은 선사들의 기지가 담겨 있다. 보덕사 한켠을 지키고 있는 가야사 3층 석탑의 교훈을 오래 기억해야 할 것이다.

보덕사에 세워진 예산읍 3층석탑(가야사 3층 석탑)은 1970년 이전에 반출된 가야산의 7기 이상의 석탑 중 하나이며 마을 주민들이 뜻을 모아 마을의 이곳저곳에서 흩어진 탑부재를 모아서 현재의 3층 탑으로 조합한 것이다. 당시 석탑과 함께 석종형의 부도 1기도 남연군충정비 주변에서 수습해 보덕사(報德寺)로 옮겨졌다고 전해지고 있다.

역사는 기록을 통해 확인된다. 오늘날의 남연군묘를 소개하는 대부분의 기록물은 이를 찬탈의 아픈 역사로 소개하고 있다. 비록 과거의 일이지만 조선 왕족이 자신의 야욕과 영달을 위해 천년고찰을 폐사시키고 묘 자리를 쓴 만행은 오래도록 기록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이 기사는 충청남도미디어지원사업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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