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득의 장군 일가 17명(八子九孫), 홍주지역에서 공신으로 녹훈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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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득의 장군 일가 17명(八子九孫), 홍주지역에서 공신으로 녹훈돼
  • 한관우 발행인
  • 승인 2023.07.30 0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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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자란 땅’ 천년홍주 100경 〈49〉
임득의 장군 묘.
임득의 장군 묘.
  • 임득의 장군 묘와 ‘정충사’

홍성지역에는 많은 역사 인물이 있으며, 그 인물들과 관련된 역사문화유산이 곳곳에 산재해 있다. 그 중에도 작은 시골 농촌 마을에 수십만 평의 소나무 숲속에 숨겨진 400여 년의 역사문화유산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이 있다. 홍성군 서부면 판교리 신촌마을에는 1596년(선조 29) 7월 이몽학(李夢鶴, ?~1596)의 반란군에 의해 홍주성(洪州城)이 포위됐을 때 난을 평정한 임득의(林得義) 장군의 사우인 정충사(靖忠祠)와 묘역이 있다. 고려 말부터 조선조에 이르기까지 홍주를 중심으로 한 내포 지역은 많은 선비들이 낙향지로 선호해 찾은 곳이라 전해진다. 당대에 낙향한 덕망 높은 분들의 학행과 덕행이 후대에까지 가학(家學)과 교화를 통해 전승됨으로써 일제강점기에 홍주지역에서 활발했던 독립운동으로 이어져 내려온다. 임득의 장군의 가계에도 열일곱 명의 독립유공자를 배출하며 충절을 계승하고 있다. 

임득의(林得義, 1558∼1612)는 1588년 홍주 결성의 작은 마을로 입향한 송파 임식(林植, 1539~1589)의 둘째 아들이다. 평택임씨 평성군파가 홍주에 터전을 마련하는 계기는 부친인 임식이 청양 화성에 은거하면서부터다. 조부(祖父) 정수(貞秀, 1516~1583)가 청양현감을 역임해 청양공(靑陽公)으로 불리며, 해미현감 해주최씨 최제운(崔霽雲)의 무남독녀를 맏며느리(임식의 부인)로 맞아 손자 득인(得仁)과 득의(得義)를 낳고 사별해 현재까지 청양 화성의 임씨 문중에서 최씨 내외의 산소를 지키며 시제를 지내고 있다.

평택임씨의 가계는 대대로 가학을 통해 문무를 겸비한 인물들을 많이 배출한 가문이다. 특히 유가의 덕목을 교육하고 실천을 중시한 가풍이 전해지고 있다. 마을 입구에 서 있는 신도비는 조선 말기의 문신이며 의병장이었던 지산 김복한(金福漢, 1860~1924)이 지은 비문에 임득의 장군의 치적과 공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임진왜란 초기 임득의는 선전관(宣傳官)의 직에 있었던 것으로 밝혀진다. 선전관은 국왕의 호위를 맡으면서 국왕의 명령을 전달하는 관직으로 문관이 담당하는 승정원의 승지와 대비해 무관 승지로 불릴 정도로 중요한 직책이었다. 또 다른 기록으로는 명나라의 원군과 수륙 합동작전을 전개하려는 시점인 1594년 9월 28일 36세 때 체찰사 군관으로 이순신을 방문한 기록이다. 이 기록으로 의주에서 환도를 한 후에는 수륙 양군을 총괄하는 조직인 3도 체찰사 무관으로 왜군과의 전투에 참여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서부 정충사.
충남 홍성군 서부면 판교리 정충사.

임득의는 1596년 충청도 홍산(鴻山)에서 이몽학이 반란을 일으키자 전 우후(虞侯) 박명현, 충청수사 최호, 전 병사(兵使) 신경행 등과 함께 홍주목사 홍가신을 도와 난을 평정하고, 홍주성을 지키는데 공을 세웠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 전란의 과정에서 공을 세운 신하들에 대한 논공행상 논의를 거쳐 선무공신(宣武功臣), 호성공신(扈聖功臣), 청난공신(淸難功臣) 3가지 분야에 대한 공신 책봉이 이뤄진다. 임득의는 이 3가지 모두에서 공신호를 받는다. 1604년 청난공신 정공신(正功臣)에 책봉되고, 1605년과 1607년에는 호성공신과 선무공신에 원종 1등 공신으로 책봉됐다. 임득의는 팔 형제와 가솔 모두를 이끌고 800여 명의 의병을 모아 반란군을 평정하는데 앞장서 17명의 일가족 모두가 홍주지역에서 공신으로 녹훈되는 사례를 남긴다.

임득의 장군과 관련한 역사문화유산은 홍성군 서부면 판교리 신촌마을, 청룡산 서쪽 산 아래에 분포돼 있다. 영정(林得義 影幀,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203호)을 봉안한 정충사(靖忠祠,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401호)와 묘역(林得義 墓,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340호)이 있으며, 마을 입구에는 신도비가 있다. 주변의 관련 유적으로는 홍주청난사와 홍양청난비, 백월산 정상의 산신각 등이 있다. 유물로는 영정과 추증교지, 기타 전적 등 관련 유물 등이 전해진다.

임득의 최초의 묘역은 경기 포천의 축석령에 있었으나 1632년 홍주 서부 일대에 명당자리를 찾아 판교리 청룡산으로 묘소를 이장했다. 임득의 묘는 정충사에서 동쪽으로 100m 정도 떨어진 청룡산 서쪽 기슭에, 신도비는 정충사로 들어가는 마을 길 입구에서 100m 정도에 위치한다. 신도비는 1917년 건립됐으며 정·측면 1칸의 비각 안에 보호돼 있고, 비문은 지산 김복한(志山 金福漢)이 글을 짓고, 글씨는 윤용구(尹用求)가 썼다.

정충사(靖忠祠)는 청난공신 임득의를 제향하는 사우(祠宇)로, 창건연대는 1632년(인조 10)이다. 영정(林得義 影幀)은 별교서에 따라 당시에 그려진 청난공신의 대표적 무관 영정이다. 17세기 초반의 공신상(功臣像)의 전형적인 특징을 지니고 있어 청난공신상을 연구할 수 있는 보물급에 해당하는 중요한 초상화로 인정되고 있다. 현재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203호로 지정돼 충청남도역사박물관에 기탁 보관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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