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고종 때 지어진 한옥, 갈산 물안이 ‘안동김씨 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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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고종 때 지어진 한옥, 갈산 물안이 ‘안동김씨 가옥’
  • 한관우 발행인
  • 승인 2023.08.19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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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자란 땅’ 천년홍주 100경 〈52〉
  • 갈산 김우열 가옥(金宇烈 家屋) (충청남도 민속문화재 제10호)

홍성군 갈산면 갈산로 71(상촌리 234)에는 19세기에 지어진 전형적인 중부지방의 가옥인 ‘김우열 가옥(충청남도 민속문화재 제10호)’이 있다.

‘김우열 가옥’은 노동마을 물안이라 불리는 나즈막한 야산인 병암산 자락 대나무숲 앞에 자리 잡고 있는데, 집으로 들어가는 별도의 대문 등은 없고 곧바로 사랑채에 접근할 수 있다. 사랑채 앞에는 문화재 안내 표지석과 안내문이 세워져 있다.

김우열 가옥은 조선시대 고종 때 지어진 한옥으로 안동김씨 문정공파 김학근이 마을을 지나다가 집을 짓기 좋은 터라 집을 짓게 됐다고 전한다. 가옥의 뒤로는 병암산이 펼쳐져 있고, 앞으로는 갈산천이 흐르는 배산임수형의 전형적인 명당 터이다. 

김우열의 부친인 고(故) 김홍진의 기억에 따르면 “물안이 인근에 기와집 200여 채가 있었는데, 모두 철거되고 김우열 가옥과 상촌의 전용일 가옥 등 세 채만 남았다”고 회고한 바 있다.

‘김우열 가옥’은 홍성에서 서산으로 연결되는 지방도에서 바라보면 뒤쪽에는 소나무숲과 대나무숲이 떡하니 받치고 있어서 안정감이 있으며, 가옥의 앞쪽에는 콩 등의 농작물이 싱싱하게 자라고 있는 텃밭이다.

‘김우열 가옥’의 건물은 앞쪽에 중문이 있는 ‘ㅡ자’형 사랑채를 두고, 뒤편에 ‘ㄱ자’형 안채와 헛간채를 두고 있어 전체적으로 ‘ㅁ자’형을 이루고 있다. 사랑채는 대문과 문간채가 합쳐져서 앞면 6칸 규모를 하고 있는데, 마당 쪽으로 툇마루를 두고 있다. 안채는 가운데 대청마루를 중심으로 안방과 건넌방, 부엌을 배치했으며, 툇마루를 둬 통로로 이용하고 있다. 19세기 후반에 지어진 집으로 당시 한양에서 유행했던 건축양식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당시 상당한 재력을 보유했던 지주계층이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갈산면 소재지가 있는 상촌마을은 홍성에서 천수만 등으로 연결되는 교통로에 자리 잡고 있다. 주변에는 비교적 넓은 농지가 있으며 조선 후기 이후 간척 등으로 경제력이 풍족했던 것으로 보인다. 마을에는 ‘99칸 반’의 저택이었던 ‘전용일가옥’이 자리하고 있고, 인근에 비교적 큰 규모의 ‘김좌진장군 생가’가 있었던 것으로 볼 때 교통이 편리한 지역에 형성된 지주계층이 모여 살았던 마을로 추정된다.

‘김우열 가옥’은 19세기 후반에 세워진 주택으로 안채, 사랑채, 헛간채 등 세 동의 건물로 구성돼 있다. 세 개의 건물이 각각 독립된 형태를 갖추고 있는 전통한옥이다. 전체적으로는 ‘ㅁ자’형의 집이다. 안채는 ‘ㄱ’자형으로 가운데 대청마루를 중심으로 서쪽에 안방과 부엌, 동쪽에 건넌방을 두고, 앞으로 툇마루를 둔 전형적인 중부지방 가옥형태이다. 사랑채 앞에는 툇마루를 넓게 두고 있는데, 손님이 걸터앉아 쉴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든 것으로 보인다. 사랑채의 창은 섬세하고 세련된 건축기술을 보여주고 있다. 사랑채는 안채 앞에 ‘ㅡ자’형으로 놓였는데, 서쪽으로 대문과 문간방을 두고, 동쪽에는 대청과 사랑방을 둬 행랑채를 겸하게 하고 있다. 구조적으로도 앞뒤만 기둥을 세우고, 가운데는 문설주를 세운 간략한 축조방법을 쓰고 있다. 

사랑채는 앞면 6칸 규모의 ‘ㅡ자’형 건물로 대문이 있는 문간채를 겸하고 있다. 대청마루 1칸과 온돌방 3칸을 두고 있는데, 일반적인 사랑채에 비해 방이 많은 편이다.

김우열 가옥은 지역의 학교 설립에 많은 기여를 한 안동김씨 유지의 아들 김우열과 어머니 박계연 할머니가 거주한 가옥으로 지난 1985년 충청남도지정 민속자료 제10호로 지정됐다.

황해도 출신으로 엽전을 등에 진 일꾼들의 행렬이 끝이 보이질 않을 만큼 잘 사는 집안의 남편을 만나 서울 본집에서 신혼생활을 하며 지내온 박계연 할머니는 그때 당시 김우열 가옥은 안동김씨 가(家)에서 일하던 일꾼들이 거주하던 집이었다고 지난 2010년 인터뷰 당시 전했다. 

일제강점기가 끝나고 6·25 한국전쟁이 이어지면서 당시 서울에서 피난을 내려오게 돼 현재의 김우열 가옥에 살게 됐다고 전했다. 피난 당시 가옥이 넓었던 만큼 어려운 피난민들이 가옥으로 모여들게 됐는데, 당시 20여 명의 피난민을 받아줬다고 했다. 식량이 부족하고 모두가 어려웠던 당시, 먹을거리가 없어 함께 풀죽으로 연명하며 어렵고 힘든 6·25 한국전쟁 시절을 보냈지만 서로 의지하며 지탱해준 힘든 시절을 간직한 가옥에 대해 ‘작은 도움으로 다 같이 살 수 있었다’며 가옥에 대한 애틋한 추억을 전하기도 했다. 

1922년생인 박계연 할머니는 안동김씨 맏며느리로 “한옥에서 쉰 살부터 일흔 살까지 갈산초·중·고교 교사들을 대상으로 하숙을 쳤다”며 “새벽 네 시에 일어나 아침밥과 도시락을 싸줬다”고 회고하면서 ‘후손들에게 대대로 가옥을 전해 유지하고 싶다’는 바람을 전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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