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혁명, 자유·평등·평화 등 인류 보편적 가치 지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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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혁명, 자유·평등·평화 등 인류 보편적 가치 지향
  • 취재=한관우·사진=김경미 기자
  • 승인 2024.05.05 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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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2024 동학 130년, 충남동학혁명 현장을 가다 〈1〉

 ‘반일 민족항쟁 출발점으로 재조명돼야한다’ 주장에 설득력 실려
동학농민혁명 기록물, 2023년 유네스코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돼
충남동학농민혁명, 의미·가치 새롭게 조명, 유적 문화재 지정돼야

 

130년 전인 1894년, 충청과 호남 일대에서 동학이 중심이 돼 벌어진 농민들의 봉기가 있었다. 이는 학술 연구자의 역사적 관점에 따라 또는 발생 배경, 결과, 수행 주체 등 어디에 집중하느냐에 따라 그 명칭이 제각각이었다. 역사학계에서 관심을 둔 것은 박은식이 1915년 펴낸 ‘한국통사’에서 명명한 ‘갑오동학란(甲午東學之亂)’이었다. 동학이 중심이 됐음을 드러내고 당대 사회질서를 위협했음에 주목한, 주류의 시각이 반영된 호명이었다. 이후 ‘동학혁명’, ‘갑오동학운동’, ‘갑오농민전쟁’, ‘동학농민전쟁’ 등으로 학자들마다 명칭이 엇갈렸다.

기존 질서를 지키려는 관군과 외세와의 대결이라는 점에 집중한 학자들은 ‘전쟁’으로 파악했다. 그들이 주창한 왕조 타도, 계급 타파, 인재 등용, 조세·토지·무역 개혁 등 봉건체제 혁파 노력에 집중한 학자들은 ‘혁명’의 성격을 강조했다. ‘운동’이라는 성격을 부여한 쪽은 이후 지속적으로 벌어지는 의병운동의 출발점으로 보는 시각이기도 했지만, 혁명과 전쟁이 주는 치열함과는 다소 거리를 두려는 보수 사학계의 시각이기도 했다. 수행 주체 역시 동학 세력이냐, 농민계급이냐 등 주장과 견해에 따라 달랐다. 이처럼 학계의 의견은 여전히 분분하지만, 최소한 법적 용어만큼은 ‘동학농민혁명’으로 정리됐다. 지난 2004년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등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되면서부터다. 

동학농민혁명은 국내 학계를 중심으로 진행되던 동학농민혁명 연구의 지평을 당대 세계사적 질서재편이라는 의미로 넓힘과 동시에 동학농민혁명이 담고 있던 자유, 평등, 평화 등 인류 보편적 가치 지향성을 확인하는 차원이었다. 평화·화해·상생의 시대를 열었던 동학농민혁명, ‘사람이 하늘’이라는 평등사상을 바탕으로 한 동학혁명은 탐관오리를 징벌하고, 노비 문서를 소각하고, 과부의 재혼을 허락하는 등 신분제를 폐지하는 데 많은 영향을 끼쳤다. 반일 민족항쟁의 출발점으로도 재조명돼야 한다는 주장에 설득력이 실리고 있는 이유다.
 

■ 충남지역 역사·문화·관광 자원화 필요
1894년 동학에 기반을 둔 반제·반봉건 근대화 운동이다. 갑오년에 일어나 갑오농민전쟁, 동학 정신에 기반을 뒀다고 해서 동학난·동학혁명·동학혁명운동·동학농민전쟁이라고도 한다. 동학농민혁명은 1894년 1월에 봉건적 수취체제의 모순에 대항한 고부 농민봉기에서 시작됐다. 이후 전봉준은 무장에서 손화중·김개남과 함께 4000여 명의 농민군을 조직하고 탐관오리의 숙청과 보국안민을 위해 일어서자는 내용의 창의문을 발표했다. 1894년 6월 일본군이 왕궁을 점령하고 개화파의 연립정권을 수립시키자 동학농민군의 지도부는 전북 삼례에서 재봉기했다. 남접·북접 연합군은 일본군의 우세한 화력을 견디지 못한 채 패퇴하고 말았다. 동학농민혁명 관련 기록물은 2023년 5월 18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됐다. 이러한 상황에서 충남지역의 동학농민혁명의 유적지와 현장을 찾아보고 체계적인 보존과 관리 대책 등을 마련, 향후 이를 기반으로 충남지역의 역사·문화·관광지로 자원화해야 할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다.

1860년대부터 군현을 단위로 한 농민항쟁이 광범위하게 일어났다. 이러한 농민항쟁에 대해 정부는 봉건 지배체제의 두 축인 지주제와 신분제의 모순을 개혁하지 않고 단지 현상적인 부세제도의 부분적인 수정을 통하여 이를 무마하려 했다. 한편 개항을 계기로 제국주의 침략을 받으면서, 종래의 봉건적 모순은 더욱 심화·확대됐다.

개항 이후 불평등무역구조 속에서 소수의 지주·부농층은 대일 미곡 수출을 통해 많은 이익을 얻어 토지를 사 모으고 지주제를 강화시켰다. 이에 반해 대다수 농민들은 지주제의 강화와 상인층과 지주들의 ‘고리대’의 수탈로 더욱 몰락하게 됐다. 영세수공업자·상인 층도 외국 상인의 침투에 따라 동일한 운명을 맞이했다. 농민전쟁의 진원지인 호남지방은 전통적으로 대지주에 의한 봉건적 수탈이 심하고, 강경·법성포·줄포·논산포 등의 포구·개항장은 대일 미곡 수출이 활발한 지역이었다. 미곡 무역에 편승한 지주층의 지주제 강화로 인해 소농·빈농층이 몰락했으며, 농촌사회 내부의 분화와 계급대립이 전면에 나타났다. 이러한 상황에서 동학의 교세가 급속히 확대됐으며, 봉건사회를 변혁하려는 일본군의 혁명적 지식인들과 결합하게 됐다. 호남지역에서는 유형원의 학문적 전통을 잇는 부안(扶安) 동림서원(東林書院)과 오랫동안 강진에 유배됐던 다산 정약용 등 실학자의 진보적 사상이 암암리에 몰락 양반을 비롯한 지식인들에게 유포되고 있었다. 농민전쟁의 지도자인 전봉준도 그중의 한 인물이다.
 

■ 충남지역 동학농민혁명 유적지 많아
이들은 기존의 군·현 단위의 농민봉기가 가진 지방적 분산성을 극복하고 체제개혁을 위한 대규모 농민전쟁으로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각지의 농민들을 조직·동원할 수 있는 수단으로써 광범위하게 교세를 확장하던 동학 조직을 주목했다. 동학(東學)은 몰락 양반 최제우가 창시한 종교로, 후천개벽(後天開闢)을 통해 만민평등의 지상천국을 건설하려 했다. 동학의 이념을 실현하는 방법으로는 ‘무위이화(無爲而化)’라는 관념적 차원에 머물렀으나 만민평등의 원리를 기반으로 한 반봉건 의식과 ‘척왜양(斥倭洋)’이라는 반침략의 민족 논리를 바탕으로 깔고 있었다.
동학 교단은 1892년 11월 전라도 삼례 집회와 1893년 3월 충청도 보은집회에서 교조신원운동이라는 종교적 운동을 벌였다. 동학농민혁명은 투쟁 과정을 통해 농민 대중에게 봉건 지배층과 일본 침략세력의 본질을 알게 했으며, 그들을 민족적·계급적으로 더욱 각성시키는 한편 광범한 대중을 반제·반봉건 투쟁세력으로 강화시켰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서 충남지역의 동학농민군 주력은 일본군에게 제압당한 뒤 그 기세가 수그러들어 각 군·현의 관아가 평정에 나선 후에 해산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동학농민혁명의 진압과 수습과정에서 희생됐는지는 알 수도 없고, 130년이 지난 지금도 역사적 과제로 남아 있다. 특히 충남서북부지역인 내포 지역 농민들은 봉건적 토지 관계의 모순과 억압된 신분제 아래에서 착취와 수탈의 이중고에 시달렸다. 이런 사회경제적 배경은 동학이 충남의 내포 지역에 유입 내지 포교되는데 적지 않은 영향을 줬다. 

충남지역에는 곳곳에 많은 동학농민혁명과 관련이 있는 유적지가 존재하고 있다. 충남지역의 동학 관련 유적지로는 공주 우금티 전투지와 서산 해미읍성 전투지, 당진의 승전곡 전투지, 금산 진산 배티고개 전투지, 홍성 홍주성 전투지 등 충남지역 곳곳에 산재해 있다. 이를 기반으로 역사·문화·관광지 등으로 자원화하는 방안 등을 모색해야 할 필요성이 절실하다.

충청도의 농민봉기는 1862년 5월에 집중적으로 일어났다. 공주의 충청감영과 청주의 충청병영 중간에 위치한 회덕을 시작으로 은진, 진잠, 연산, 청주와 회인, 문의에서 민란이 일어났다. 사태수습에 나선 충청우도 어사 정기회는 임천, 은진, 정산, 공주, 회덕, 진잠, 연산을 순회하며 실상을 조사했고, 1878년에는 이건창이 충청우도 암행어사로 파견돼 젊은 관료로서 관료사회를 강직하게 감찰하는 선례를 남겼다. 또 당진, 면천, 서산, 태안, 홍주, 결성, 보령, 서천 등 연해의 8개 군현에서 물고기를 잡는 장치인 어살과 소금가마를 개인의 이익을 목적으로 설치해 세금을 지나치게 많이 거두는 것을 금지하기도 했다. 내수사와 충훈부에서 이를 다시 설치하고 균역청보다 세 배나 세금을 더 걷는 것도 하지 못하도록 했던 동학농민혁명의 교훈과 실상을 통해 제대로 판단할 필요성이 있다.

충청남도의 동학농민혁명은 그동안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했던 충남동학농민혁명에 대한 의미와 가치를 새롭게 조명하고 관련 유적에 대한 문화재 지정 등을 추진하도록 유도함은 물론 동학농민혁명의 최대 격전지였던 공주의 우금티(치) 전투를 제외하고는 별로 주목을 받지 못했다.

1894년 10월 18일 천안 세성산 전투, 10월 28일 홍주성 전투에서 잇따라 패배한 농학 농민군은 공주 우금티(치) 전투에서 치명적 타격을 입었다. 특히 홍주성 전투에서는 수만 명의 동학농민군이 패배하면서 우금티 전투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지만 우금티 전투를 제외하면 별 주목을 받지 못했는데, 이러한 사실 등을 통해 지역향토사에 대한 새로운 정립이 필요한 시점이다.
 

<이 기사는 충청남도미디어지원사업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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