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학농민군 세성산 전투 패배, 조선 500년의 몰락 상징적으로 표현해 줘
천안, 목천, 전의 동학농민혁명의 분수령 된 전략적 요충지 ‘세성산 전투’
세성산 동학농민군, 김복용 중심 외부세력 주도·토착세력 인적 물적 지원
세성산 전투 패배 동학농민군 1000명 사상자·22명 처형돼… 유구로 피해
어찌보면 충청도 목천의 세성산(細城山) 전투는 조선조 500년의 사직이 무너지는 서곡(序曲)이었는지도 모른다. 동학농민군의 세성산 전투 패배는 조선의 몰락을 상징적으로 표현해 주고 있음이 역사의 검증에서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충청도 지방에서의 항일투쟁이란 역사의 흐름에서 보면 조선조의 몰락은 이미 이곳 충청도에서도 시작되고 있었다. 당시 한반도를 지탱하고 있었던 항일투쟁의 횃불을 든 것은 동학농민군이었고, 이에 대항해서 싸운 것은 관군과 일본군이었기 때문이다.
동학농민군의 제1차 봉기가 일어났을 때 당시의 정권담당 세력은 농민군의 봉기를 막을만한 내적 응집력을 이미 상실하고 있었다. 조선조 내부는 국가적 토지 공유제(公有制)의 완전 허구화로 사회경제체제는 기반이 이미 상실된 상태였고, 관료기구는 독점된 상태로 부패가 극으로 치닫고 있었다. 따라서 생산은 위축됐고, 백성들은 헐벗고 굶주렸으며 수탈은 가중돼 갔다. 여기에 명치유신을 전기로 급격한 자본주의적 발전의 길을 밟아온 일본은 국제적·국내적 제반 조건으로 말미암아 군국적, 침략적 성격을 띠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제1차 동학농민군의 봉기가 일어났을 때, 지배층은 자체 해결력이 없었으므로 해외세력에 의존키로 하고 청국병(淸國兵)에 원조를 청하나, 이것은 일본의 대한(對韓) 진출에 대한 명분을 줘 한반도는 전쟁의 땅으로 변모된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한반도에서 지배권을 행사하게 돼 동학농민군의 2차 봉기를 유도하고 급기야는 동학농민군과 일본군의 전쟁으로 변모하게 된다.
세성산 전투는 남하하는 일본군과 이를 퇴치하려는 조선조 최대 항거세력인 동학농민군과의 내포지방에 이은 두 번째의 전투였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군은 마지막 항거세력인 동학농민군을 퇴치하면 껍데기만 남은 왕족(王族)과 지배층과의 흥정이 가능했고, 지배권을 확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 농민군, 관군·일본군과 싸워 시체로 변한 산
세성산(細城山, 219m)은 북으로 흑성산과 마주하는 충남 천안시 목천면과 병천면, 성남면 사이에 위치한 해발 200여m의 야트막한 야산으로 흑성산의 ‘독립기념관’을 품고 있다. 산에 오르면 주변 지역을 멀리까지 조망할 수 있고, 사통팔달 도로망이 시원하다. 산의 남·동·북쪽은 절벽을 이루고 있고 성남면의 서쪽은 완만한 지세다. 따라서 남·동·북쪽으로부터 오는 일본군과 친일관군의 경계와 방어에 용이하고, 서쪽으로부터 오는 지원군이나 군수물자를 조달받기에 적합한 지형이어서 전략적 요충지다.
또한 세성산(細城山)은 봉우리가 실낱같이 높아서 ‘가늘 세(細)’를 썼다고 하는데, 지금도 삼한 시대의 농성(農城)이 있었다고 전해져 오는 말이 맞는 듯 성지(城址)가 남아 있다. 산록 밑에는 토성(土城)의 흔적이 남아 있는데, 길이 144m, 높이 3m의 내성과 길이 350m, 높이 3m의 외성이 있고, 당시 이곳에 주둔했던 김복용 등의 동학농민군이 보축한 길이 412m 폭5m의 민보(民堡)가 있어 예로부터 군사적 요충지로의 성지(城址)다. 이 산은 시성산(屍城山)이라고도 불리는데 동학농민군이 관군·일본군과 싸워 시체로 변한 산이라고 해서 명명됐다고 전해진다.
천안지역 동학농민군은 김복용과 옥천에서 기병한 이희인을 중심으로 기병해 세성산으로 북접농민군 5000여 명이 집결했다. 호서의 중심지 홍주(洪州)에는 제4대 동학 교주가 된 박인호를 중심으로 동학농민군 7000여 명을 배치, 남진하는 일본군을 저지토록 했다. 김복용은 북접 소속 대접주로 세성산 동학농민군을 총지휘한 대장이었다. 세성산 전투 이전의 천안지역에서의 활동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볼 때 다른 지역에서 들어온 것으로 추정된다.
반면에 이희인은 천안지역에 기반을 둔 동학지도자였다. 이희인(1846~1894)은 목천현 병천면 병천리 개목마을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살았던 양반 가문의 선비였다. 1893년 동학도 광화문 복합상소 시기에 허연, 서병학 등과 연명하였을 정도로 동학의 지도자로 활동했다. 또한 세성산 전투 당시에는 좌우도(左右道) 도금찰(道禁察)이라는 직책을 맡기도 했다.
이같이 세성산에 집결한 동학농민군은 김복용을 중심으로 한 외부세력이 주도하는 가운데 이희인과 같은 토착세력이 인적, 물적 지원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이 세성산 일대를 중심으로 기병해 주둔지로 삼은 것은, 서울로 진격을 위한 교두보로 삼고자 한 것이다. 전봉준이 이끄는 전라도 동학농민군과 최시형이 이끄는 동학농민군이 서울로 올라갈 상황에서 세성산에 집결, 주둔한 것은 의미가 컸다. 당시 동학혁명군은 어느 곳에나 있었지만, 특히 이곳은 지정학적으로 볼 때 위치상 동학농민군 진영의 최북단에 있고 서울에 근접해 있어서 친일관군이나 일본군에게는 위협적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 세성산전투 패배, 우금티전투 패배 예고
세성산 전투는 10월 18일에서 21일에 벌어졌다. 세성산에는 김복용과 이희인이 이끄는 동학농민군 5000여 명이 집결하고 있었다. 인근 공주, 옥천, 영동, 예산 등에도 농민군이 집결해 남쪽에서 올라올 전라도 동학농민군의 북진과 합치를 위해 대기했다. 천안 세성산은 가장 북쪽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관군으로서는 이를 제압하지 않고는 안심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에 이두황이 이끄는 관군인 장위영군이 세성산을 공격하기에 이른다. ‘천안군지’의 기록에 는 1894년 9월 10일 정주에서는 장위영(서울 수비병)의 영관 이두황을 ‘죽산부사’로 삼아 경기와 충청지방의 동학농민군을 진압케 했다. 수적으로는 세성산에 주둔하고 있는 동학농민군이 우위였지만, 소총과 대포로 중무장한 훈련된 관군과는 전력 면에서 차이가 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두황이 이끄는 관군은 맞은편 산에 병력을 배치해 지원사격을 했다. 일본군은 기관총으로 무장한 2개 소대를 북쪽 절벽 밑에 매복하고, 일부 병력으로 완만한 동남쪽 기슭으로 총을 쏘며 정상을 향해 공격을 했다. 동학농민군은 삼면의 깎아지른 절벽을 이용해 거세게 항전했다. 그렇지만 관군의 막강한 화력에 압도당해 결국 많은 사상자를 내고 군수품을 빼앗긴 채 참패해 퇴각하고 말았다. 이 가운데 수백 명은 세성산에서 북동쪽으로 20리 정도 떨어진 작성산(병천면 위치)으로 후퇴했다. 이때 북쪽 절벽 밑에 매복, 기다리고 있던 관군의 공격을 받으면서 피해는 더 커졌다.
세성산 전투의 패배로 인한 동학농민군의 피해는 막대했다. 세성산 정상에 쌓아놓은 다량의 무기와 군량미를 빼앗겼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개벽(開闢)을 원하며 각지에서 모여든 동학농민군이 많은 희생을 당했다. 전사자 370여 명, 중경상자 770명, 포로가 17명이었다고 하니 1000명 이상의 사상자를 내고 패배했다.
세성산 전투에서 동학농민군을 이끈 지도자 김복용 등 지도자급 농민군 22명은 체포돼 현장에서 처형당했다. 이 밖에 세성산에서 흩어진 동학농민군은 공주 유구 쪽으로 흘러 들어가 활동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 이유는 공주 유구를 ‘목천(천안) 동학도의 소굴’이라고 한 것으로 보아 그렇게 추정하고 있다.

목천은 동학의 뿌리가 강했다. 목천지역의 동학 활동을 지원하는 세력으로 농민, 양반들뿐만 아니라 보부상들도 동학에 가담해 물자를 지원하고 연락을 해주는 역할을 했다. 1893년 4월 25일 충북 보은집회에 목천 사람들이 100여 명이나 참여했다고 하니 목천의 동학 세력들이 상당히 컸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동학의 경전인 ‘동경대전’을 발행하는 것은 교세 확장을 위한 것으로 목천지역에서 2회나 발행했다.
현존하는 동경대전 여러 판본 중 가장 오래돼 문화재 가치가 매우 높은 ‘목천판 동경대전(계미증춘판)’을 천안에서 간행했다. 동경대전은 1883년 당시 목천현(현재 동면 죽계리 450)에서 해월 최시형의 지도하에 김은경 접주의 집에서 간행했다. 세성산성은 산성으로 가치를 인정받아 충청남도 기념물 제105호로 지정돼 있다. 다만 안내문에 ‘동학농민혁명 당시 농민군이 이곳에서 관군에게 패배했음’을 기록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세성산 전투의 패배는 공주 우금티에서 동학농민군 본진의 패배를 예고하는 전투였다. 세성산 전투의 패배는 공주 우금티를 공격하는 동학농민군 주력에게 부담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엄청난 화력의 열세, 근대적 작전개념의 차이 등으로 패한 동학농민군은 서울로의 북상의 길이 막히는 순간이기도 했다. 또 조선조의 해외세력에 대한 항거가 몰락의 길을 걷는 시발점이 되기도 했다.
<이 기사는 충청남도미디어지원사업의 지원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