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산지역 동학농민혁명, 선장 포구·장터에 집결해 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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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산지역 동학농민혁명, 선장 포구·장터에 집결해 봉기
  • 취재=한관우·사진=김경미 기자
  • 승인 2024.08.24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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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2024 동학 130년, 충남동학혁명 현장을 가다 〈12〉
아산 영인초등학교 앞에 있는 여민루 동학전적지.
아산 영인초등학교 앞에 있는 여민루 동학전적지.

무능하고 부패한 조선 말인 1894년 3월, 동학농민군은 ‘나라를 바로잡고 백성을 살리자’는 ‘보국안민(輔國安民)’의 기치 아래 호남에서 1차 봉기를 시작해 전주성을 점령한 후 조정과 화약을 맺고 자치기구인 집강소를 설치해 개혁을 추진했다. 하지만 외세에 의존하던 조정은 전주성이 함락되자 청군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이를 빌미로 일본군이 조선에 진주해 6월 21일 경복궁을 점령, 고종을 포로로 잡으면서 갑오 친일내각을 출발시켰다. 동학농민군은 일제의 침략으로부터 국권을 수호하기 위해 9월, 전국에서 2차로 봉기해 항일무쟁투쟁을 전개했다.

따라서 충청도 아산지역은 청군이 상륙한 곳이고, 청일전쟁이 발발한 곳이라서 그 어느 지역보다 피해가 컸다. 2차 봉기가 시작되자 아산지역은 10월 5일(음력) 아산현을 혁파하고 내포 지역으로 진격해 일본군·관군과 처절하게 싸웠다. 그러나 홍주성 전투에서 패배하며 엄청난 희생을 당함으로써 동학농민혁명은 좌절됐지만 그 정신은 3·1운동과 독립운동, 4·19혁명을 거쳐 최근의 촛불항쟁으로까지 이어졌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처럼 아산은 내포 동학의 뿌리를 내린 곳이다. 내포 동학농민군의 주된 활동 무대였고, 9월 기포 때는 태안과 서산 지역 동학농민군의 구출을 위해 내포 동학농민군을 태운 배가 아산포구를 떠나 태안 방갈리 해안에 닿았다는 증언도 전해지고 있다. 내포 동학농민혁명군의 주된 무대였던 아산지역에는 아직도 그 당시의 흔적을 지니고 있는 봉기지를 비롯해 아산현청, 향교 등이 남아 있다. 온주아문, 온양향교, 아산향교, 신창향교 등이 그 곳이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 당시 장터였던 지금의 ‘선장포 노을공원’에 세워진 ‘동학농민혁명 신창현기포현장비’.
1894년 동학농민혁명 당시 장터였던 지금의 ‘선장포 노을공원’에 세워진 ‘동학농민혁명 신창현기포현장비’.

■ 아산지역 동학농민혁명과 ‘청일전쟁’
아산지역에는 1860년 동학 창시 20여 년 뒤인 1880년대 초, 동학이 전파되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후 1892~1893년간의 교조신원운동에 아산의 일부 교도들이 참여한 것으로 보이며 그 시기에 동학교도들이 많이 늘어났던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또한 아산지역의 동학농민혁명을 논함에 있어 1894~1895년, 조선의 지배를 둘러싸고 중국(청)과 일본 간에 벌어진 ‘청일전쟁(淸日戰爭)’도 빼놓을 수 없는 사건이다. 

1894년 봄 전라도에서 제1차 동학농민군이 봉기하자 조선 정부는 양력 5월 7일 홍계훈(洪啓薰)을 양호초토사(兩湖招討使)로 임명, 진압하도록 했다. 그러나 전라도 장성에서 정부군을 격파한 동학농민군은 31일 전주까지 함락시켰다. 6월 2일 전주가 함락됐다는 보고를 받은 정부는 자력으로는 동학농민군을 진압할 수 없다고 판단, 임오군란 진압 당시의 전례에 따라 청국의 주차조선총리교섭통상사의(駐箚朝鮮總理交涉通商事宜) 위안스카이(袁世凱)에게 원병을 요청했다. 위안스카이를 통해 파병 요청을 받은 청국의 직례총독 겸 북양대신(直隷總督兼北洋大臣) 이홍장(李鴻章)은 6월 6일, 톈진조약(天津條約)에 의거 해 일본에 파병 사실을 통고하는 한편, 직례 제독 예즈차오(葉志超)와 딩루창(丁汝昌) 휘하의 군사 2800명을 충청도 아산에 급파했다. 

이때 이미 일본 정부는 조선의 독립을 공고히 하고 ‘내정개혁’을 도모한다는 등의 명분을 내세워 한반도에 대규모 일본군을 파병, 청일전쟁을 일으키고자 계책을 꾸몄던 것이다. 이러한 계획에 따라 6월 5일 참모본부 내에 대본영(大本營)이 설치되고, 동시에 오시마가 거느린 혼성여단 선발대가 요코스카(橫須賀)항을 출발, 9일 인천에 상륙해 곧바로 서울로 진군했다. 그 뒤 6월 하순까지 8000여 명의 일본군이 경인(京仁) 간에 집결했다. 조선 정부는, 일본이 독단으로 대규모 군인의 파병에 당황하고 이에 항의, 즉시 철병할 것을 요청했다. 더욱이 6월 11일 정부군과 동학농민군 사이에 전주화약(全州和約)이 성립됐기 때문에 외국군이 간섭할 구실이 없어진 상황이었다. 23일 경복궁을 불법 점령, 쿠데타를 통해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과 김홍집(金弘集) 등을 앞세운 친일정권을 수립했다.

청일전쟁은 7월 23일 일본군이 경복궁을 공격함으로써 시작됐다. 이어 일본군은 서울의 조선군대를 무장시킨 다음 아산 근처에 집결한 청군을 공격할 태세를 갖췄다. 청일 간의 본격적인 전투는 7월 25일 일본 해군이 풍도(豊島) 앞바다에서 청국함대를 기습적으로 공격함으로써 시작됐다. 이어 29일에 벌어진 성환 전투에서 일본 육군은 아산에 상륙했던 청국군을 쉽게 격파해 버렸다.
 

아산 온주아문과 동헌.
아산 온주아문과 동헌.

■ 신창 주둔 농민군 대흥 거쳐 홍주로
1894년에 일어난 동학농민혁명에 아산지역 동학교도들이 대거 참여한 것으로 파악된다. 아산지역에서는 이 시기 반외세·반제국주의를 주창한 동학농민혁명이 있었다. 동학이 아산에 전래된 최초 시기는 안교선(安敎善)과 그 친인척들의 활동으로 보아 1880년대 초반에 어느 정도 세력을 형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전라도 지역의 남접이 중심이었던 이른바 1차 봉기 때, 2대 교주 최시형이 직접 이끄는 북접에 속했던 아산지역에서 직접적인 봉기는 없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다만 가을의 2차 봉기 이전에 소규모 활동은 확인된다. 이후 교주의 기포령이 내려진 뒤 내포 지역에서도 말 그대로 벌떼처럼 대대적으로 들고일어났던 것이 바로 2차 봉기다. 

9월 18일 기포령이 내려지자 아산지역을 중심으로 한 인근 지역 동학농민군 1000여 명이 곽완, 김경삼, 이신교, 정태영 등의 주도 아래 선장 포구의 장터에 집결해 마침내 봉기했다. 음력 10월 3일로 추정되며, 이틀 후인 10월 5일 새벽 2시경에 덕포 동학농민군 수천 명이 아산현 관아를 습격, 무기를 탈취한 뒤 신례원을 거쳐 예산 방향으로 이동했다. 역시 10월 5일 전후에 온양 관아도 습격을 시도했으나 성공하지는 못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어 10월 6일 새벽 신창현(新昌縣) 지루동으로 이동한 후 주둔했다. 이들 동학농민군은 당진지역 동학농민군과 합류, 내포의 중심인 홍주로 향해, 홍주성 전투에 참가했다. 세성산 전투에서 패한 동학농민군은 신창현으로 이동했다는 기록이 있다. 정태영의 아들 정수길(규희)은 1919년 3·1운동 때 선장 장터에서 4·4 만세운동을 주도하기도 했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 당시 신창현에 속한 선장포구와 장터였던 지금의 ‘선장포 노을공원’에는 ‘동학농민혁명 신창현 기포비’가 세워졌다.

아산지역 동학농민군들은 내포 지역 동학농민혁명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승전목(현재 당진 면천) 전투, 예산 관작리 전투 등 몇 차례 승전을 이어갔으나 홍주성을 점령하려 했던 10월 28일의 홍주성 전투에서 일본군에게 패퇴했다. 이때 이신교는 부상으로 붙잡힌 뒤 북문 밖에서 참수됐고 시신조차 찾지 못했다. 그 뒤부터 아산을 포함한 내포 지역 동학농민군들은 보복 살육과 재산 몰수 등 약탈에 계속 시달렸고, 살아남기 위해 깊은 산속에 숨어들기도 했다. 이후 동학농민군들이 항일의병에 참여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구체적 사항은 확인되지 않는다.
 

아산 신창향교와 신창초등학교.
아산 신창향교와 신창초등학교.

아산지역은 내포 지역과 함께 덕산 등지에서 활동한 덕의대접주(德義大接主) 박인호(朴仁浩)와 예산 등지에서 활동한 예산대접주(禮山大接主) 박희인(朴熙寅)이 이끄는 두 포(包) 소속이었으며, 공주 교조신원운동, 보은 취회를 거쳐 동학교도가 급격히 늘어났다. 1894년 1월 고부봉기를 거쳐 3월에 전면 봉기한 호남 중심의 1차 동학농민혁명 시기에 내포 지역은 당진 합덕과 서산 원벌에서 부분적으로 봉기했으나 기포령을 내리지 않아 조직적으로 호응하지는 않았다.

전봉준 등이 이끄는 동학농민군이 전주성을 점령하자 조선 조정은 청나라에 원병을 요청했고 청은 조선에서 일본에게 밀린 세력을 만회하고 종주권을 강화하기 위해 파병했다. 청군 선발대는 5월 5일 아산 백석포에 도착했고, 5월 7일 본진이 상륙했는데, 통령 섭사성은 보병 1000명을 거느리고 하륙 아산읍으로 향했다. 마군(馬軍) 100명과 제독 섭지초가 거느린 보병 1500명과 마군 150명이 하륙했다. 이때 청병의 아산지역 주둔은 지역민들에게 인적, 물적 징발을 강요했다. 6월 27일 청군이 패퇴할 때까지 주둔한 청군에게 막대한 금액을 식비로 지급했고, 3만 2918명이 군역에 동원됐으며 이들은 거의 이틀에 한 번씩 군역으로 동원을 강요당했다. 이때 우·마필의 먹이로 지급한 콩이 4만 4678되로 248석 3두 2되나 됐다고 한다. 당시 생산량이나 5월이 춘궁기라는 점을 고려하면 지역민들의 경제적 부담은 엄청난 것이었다.

청군이 아산에 진주하는 것을 사전에 인지한 일본군은 5월 8일 인천에 정박한 군함에서 상륙해 곧바로 3000여 명 병력으로 서울에 진을 쳤다. 이후 6월 6일에는 고종에게 내정개혁안 5개조를 제시하는 등 내정간섭을 하다가 마침내 경복궁을 무력으로 점령하는 갑오변란을 일으켜 김홍집 친일내각을 출범시켰다. 곧바로 일본군은 4500명을 아산으로 출동시켰고, 6월 3일 아산 풍도 바다에서 청국 군함을 격침시키면서 청일전쟁이 시작됐다. 6월 27일 성환 전투에서 승리한 일본군은 청군 주둔지 아산현까지 들이닥쳤다. 패퇴한 청군은 온양을 지나 공주로 갔다가 청주 등을 거쳐 평양으로 패퇴했다.

일본은 아산만으로 개선해 백석포 일대에 웅장한 개선문과 환영장을 만들고 정부 대표로 군국기무처 의원 이윤용(李允用)을 파견, 강제로 주민들을 동원해 대대적인 환영식을 거행했다. 또한 아산리 산 위에는 ‘아산일청전적기념비(牙山日淸戰戰蹟戰記念碑)’를 건립해 위세를 떨쳤다. 청의 주둔과 청일전쟁의 전화(戰禍), 일본군의 횡포는 아산지역에 반외세의 감정을 갖게 하기에 충분했다. 

특히 러일전쟁 기간에 유서 깊은 ‘온양온천’이 일본인 소유로 강탈당했다. 1904년 궁내부 허가를 빙자한 일본인들은 왕실의 휴양지로 ‘온궁(溫宮)’까지 건축해 운영하던 온천 시설을 모두 철거했으며, 인근 민가를 빼앗고 토지 경작을 금지한 후 온천장을 신축했다. 대한제국의 외부(外部)는 온천의 운영권이 민간에게 있으므로 궁내부의 허가를 받았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처사라며 엄중히 항의했으나 일제의 비호를 받은 일본인들은 이를 묵살하고 끝내 강점했다.
 

<이 기사는 충청남도미디어지원사업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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