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사회 랜드마크 ‘양조장’ 명맥 잇는 ‘광천·홍동양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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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사회 랜드마크 ‘양조장’ 명맥 잇는 ‘광천·홍동양조장’
  • 취재·사진=한기원·김경미 기자
  • 승인 2024.11.02 0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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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의 재발견, 100년 술도가 전통의 향기를 빚다 〈12〉
광천양조장도 장항선 철로 건너 사거리 중심가에 자리잡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지금의 오래된 양조장은 근대의 생활문화 공간이 되고 있다. 전근대 사회에서 술은 집집마다 필요할 때 빚는 가양주(家釀酒) 형태로 전승돼왔다. 전통적으로 술은 농사일이나 제사 등 일상적인 삶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가정과 주막(酒幕)에서 술을 만들었다. ‘조선주조사(1935)’ 등 관련 자료를 보면, 1909년 주세법 발포로 인해 등록된 자가용 주조의 면허 수는 최대 35만8112건에 이르렀다고 할 정도였다. 

그러나 일제가 세수를 늘리기 위해 주세법(1909)을 제정해 면허가 있는 사람들만 술을 만들 수 있게 했고, 주세령(1916)을 공표하면서 집에서 제조하는 술에 대한 과세를 양조장의 판매용 술보다 높게 매기는 강도 높은 면허제를 시행하게 됐다. 1934년 가정용 술의 제조 면허제를 폐지하면서 가양주는 밀주로 단속의 대상이 됐고, 판매용 술만이 ‘합법적’인 술로 인정됐다. 결국, 양조장은 합법적인 술을 만들기 위해 탄생한 근대의 공간이었던 셈이다.

따라서 양조장은 주세법(령) 등장과 함께 탄생된 것이기 때문에 국가의 정책과 통제에 따라야만 했다. 술의 원료, 주조기술, 도구, 유통과 판매 등 전 분야에 걸쳐 제도로 양조장을 규제하고 관리했다. 이는 해방 이후에도 지속됐는데 특히, 양곡관리법으로 인해 술의 원료가 시기마다 급변하게 됐다. 1965년에는 쌀로 만든 막걸리 생산을 중지시키고, 밀가루 80%, 옥수수 20%인 막걸리를 만들었다. 1977년 대풍(大豐)이 들어 일시적으로 쌀 막걸리 생산을 허용했지만, 1979년에 다시 중지시켰고, 1990년이 돼서야 쌀 막걸리 생산이 다시 허용됐다. 

지금은 쌀 막걸리가 보편화됐지만 현재 50~60대 이상의 연령대가 추억하고 있는 양조장 막걸리는 모두 밀이 주원료로 사용된 밀 막걸리였다. 양조장을 오랜 기간 운영하거나 이용했던 사람들이 기억하는 최고의 전성기는 1970년대였다. 1960년대 말부터 추진된 양조장 대단위화와 지역 통폐합 정책으로 인해 읍면 단위별로 양조장은 한 곳만 운영할 수 있게 됐고, 술(막걸리)의 판매 범위도 읍면 단위를 벗어나지 못하게 하면서 지역 내에서 독점으로 술을 공급할 수 있게 됐던 시기다. 막걸리의 경우, 1974년 168만㎘의 역대 최대 생산량을 기록할 만큼 호황을 누렸다. 

‘막걸리 선거’란 말이 있을 정도로 선거 때마다 막걸리가 등장했고, 농주(農酒)라 불릴 만큼 농사철에는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할 정도로 많은 판매가 이뤄지기도 했다. 이 당시 양조장은 지역사회 내 최고의 기업이자 누구나 들어가고 싶어 하던 최고의 직장이었다.
 

홍동면행정복지센터 앞 사거리 중심가에 자리잡고 있는 홍동양조장.

■ 지역사회 랜드마크가 됐던 양조장
당시의 양조장은 지역사회를 대표하는 상징물이었다. 지금도 양조장은 대부분 지역사회의 중심지역에 위치해 있다. 양조장을 운영하는 이들은 양조장의 입지를 정할 때 제일 중요한 것은 ‘물’이라고 공통적으로 말하지만, 대부분 은행·우체국·면사무소·초등학교 등과 인접해 위치한 것을 봤을 때, 단순히 좋은 물만을 찾아 자리 잡았다고 단정 짓기는 어려운 측면이 있다. 오히려, 관공서처럼 지역주민들이면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접근성을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듯하다. 

이러한 양조장은 최근에는 하나의 건축물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러한 양조장 건물은 예부터 지역사회의 ‘랜드마크’가 됐으며, 수년 전부터는 여행에 있어서 핫이슈로 떠오르는 테마가 되기도 했다. 100여 년 세월, 격동했던 시대상과 삶을 그대로 담은 개화기 전후의 근대문화가 녹아든 건축물이기도 하다. 또 하나의 근대문화유산이 있는데, 그것은 우리에게 친근하게 다가오는 막걸리 양조장이다. 

양조장이 근대문화유산인 이유 역시 시대적 상황 때문인데, 일제강점기 시절에 가양주가 금지된 이후 양조장이 생겨날 수밖에 없었고, 그들의 법으로 만든 수공업 형태의 술 공장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이전에는 집에서 빚는 가양주 형태나 주막 형태의 하우스 막걸리 같은 개념이었다면, 이때부터는 좀 더 산업과 세금징수의 목적으로 술이 활용되고, 그 중심에는 양조장이 있었던 것이다. 조금은 아픈 역사와 연결되지만, 이런 역사를 부정할 수 없는 이유는 애잔한 모습으로 손에 닿을 듯한 추억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역사를 겉과 속 모두를 품은 양조장, 특히 대를 이어 오며 전통을 지키면서도 새로운 아이디어로 차별화를 시도하는 술도가가 주목받고 있다.
 

홍동양조장의 막걸리 판매장 내부 모습.

삼국시대부터 일본과 중국까지 이름을 알릴 정도로 우수성을 널리 인정받아온 우리의 술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본격적인 쇠퇴기에 들어선다. 1916년 일제가 주세법을 공포하며 가양주를 불법으로 간주해 단속하고 양조장을 통폐합하기 시작했다. 이는 해방 이후에도 이어지는데 식량 부족을 이유로 정부 차원에서 주류 생산을 제한했고, 1965년 양곡관리법이 시행되면서 증류식 소주까지 금지되기에 이른다. 막걸리 제조 원료로 쌀 대신 수입 밀가루를 쓰고, 증류식 소주 대신 에틸알코올과 감미료를 섞어 만든 희석식 소주가 등장한 게 이때다. 

가양주의 실종과 희석식 소주의 등장은 우리 술을 획일적으로 바꿔 놓았다. 가양주가 금지된 이후 ‘집에서 술을 빚어 먹는 것’은 오랫동안 ‘불법’으로 여겨져 왔다. 하지만 2008년 즈음 일본에서 막걸리 유행이 이어지고 2009년엔 ‘전통주 등의 산업진흥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면서 전통주를 빚고 마시는 것에 대한 인식 변화와 전통주 활성화 정책이 시작됐다. 

막걸리 등 지역 전통주는 기본적으로 ‘쌀’을 원료로 한다. 지역마다 밤이나 잣, 고구마, 울금 등 특산품을 섞어내기도 하기 때문에 지역 농산물 판매와 소비 촉진에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기도 하다. 한때 많은 지자체가 지역특산물을 홍보하고 부가가치를 높이기 위해 다양한 막걸리 개발에 뛰어들었던 것도 이 때문이다.
 

일본연호 소화(昭和; 1926년)가 찍혀있는 광천양조장의 술항아리.

■ 1930년대 건립된 홍동·광천양조장
이러한 정부의 전통주 활성화 정책에도 불구하고 홍성 지역의 양조장은 부침(浮沈)을 계속되고 있다. 홍성 지역에서는 홍성읍 오관리에 자리하고 있는 호서양조장과 홍성양조장이 일제강점기에 건립돼 양대 축을 형성해 온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홍성 지역의 양조장 중에서 홍동양조장과 광천양조장은 1930년대 초와 1930년대 후반에 건립돼 술을 빚기 시작해 지금도 여전히 전통방식을 고수하면서 홍성 지역에서는 보기 드물게 90여 년의 역사와 전통방식을 잇고 있는 양조장으로 꼽히고 있다.

홍동면 소재지인 송풍마을 입구의 사거리에 있는 홍동면사무소(행정복지센터) 건너편에는 ‘홍동양조장’이 자리하고 있다. 홍동양조장은 1930년대 초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건립 당시에는 사거리의 면적을 모두 차지할 정도로 넓은 규모의 양조장이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도로정비 등이 진행되면서 현재의 규모로 축소됐다는 설명이다. 하지만 양조장 내부에는 1930년대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있어 90여 년 세월의 더께를 지켜온 홍동양조장의 전통과 역사를 안고, 홍동마을, 송풍마을의 역사를 대변해 주고 있다는 평가다.

홍동양조장 관계자의 설명에 의하면 “홍동양조장은 본래 이 자리에 1920년대 말에서 1930년대 초에 건립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1950년대 이후에는 이하영 사장이 운영했고, 이어서 지금의 광천양조장을 운영하고 있는 형님인 윤 사장님에 이어 지금까지 주정모 대표가 맡아 운영하고 있다”고 전했다.

광천양조장은 일제강점기인 1939년에 건립돼 광천읍 신진리에서 영업을 시작, 지금까지 영업을 하고 있다. 광천양조장이 위치한 광천읍 신진리는 광천의 중심지역으로 광천역과 광천농협 등이 자리하고 있으며, 도로변으로는 상가들이 즐비한 상가 중심의 마을이다. 
 

광천양조장.

외곽도로에서 광천5거리 광천읍사무소(행정복지센터) 방향으로 장항선 철로 건너 네거리에 자리하고 있는 “광천양조장은 1939년에 최초로 설립됐다”고 윤찬희 사장이 전한다.

윤 사장은 “1939년에 이 자리에 설립돼 일제강점기, 광복을 거쳐 한국전쟁 등을 겪으며 세월의 부침을 많이 겪으며 지금에 이르렀다”며 “1960~1970년대에는 직원만도 20명이 넘었던 시절이 있었다”고 회고했다. 지금도 사용하고 있는 일본 연호인 소화(昭和, 원년 1926년)가 찍힌 항아리에서는 술이 익어가고 있다. “나이가 들면서 양조장을 이어받을 사람이 없어 부부가 지금까지 지키고 있다”며 한국화와 서예를 취미로 즐기는 부인과 함께 막걸리를 담고 있었다.

또한 홍성과 광천읍을 비롯한 홍동, 홍북, 갈산, 서부, 은하, 결성 등 면 소재지에도 양조장이 있었다. 1980년 홍성군지에는 광복 이후 사업자로 등록된 홍성 지역의 양조장은 결성양조장(1944년), 금마양조장(1951년), 갈산양조장(1964년), 호서양조장(1969년), 홍성·홍북·장곡·은하·서부·구항·광천양조장은 1970년대부터 탁주를 생산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결성의 결성양조장은 3대에 걸쳐 80여 년의 역사를 이어오다 지난 2018년 문을 닫았다. 

이러한 기록을 참고할 때 홍성 지역의 양조장은 1909년 주세법이 제정되고, 1916년 주세령 공표, 1934년 가정용 술의 제조 면허제를 폐지하고 판매용 술만이 ‘합법적’인 술로 인정되면서 양조장이 합법적인 술을 만들기 시작했으며, 1960년대부터 추진된 양조장 대단위화와 지역 통폐합 정책으로 인해 읍면 단위별로 양조장은 한 곳만 운영할 수 있게 되면서 전환점을 맞은 것으로 분석된다. 

막걸리 양조장 최고의 전성기는 1970년대였다. 이후 2009년 ‘전통주 등의 산업진흥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면서 전통주를 빚고 마시는 것에 대한 인식 변화와 전통주 활성화 정책이 시작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또다시 100년 세월의 역사와 전통을 이어갈 양조장을 기대해 본다.<끝>


<이 기사는 충청남도미디어지원사업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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