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주지명 1000년, 예산지명 1100년의 역사와 충남도청 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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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주지명 1000년, 예산지명 1100년의 역사와 충남도청 이전
  • 한관우 발행인
  • 승인 2013.01.31 1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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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일 충남도청이 홍성과 예산시대의 막을 올렸다. 일제강점기인 1932년, 충남도청이 공주에서 대전으로 이전한 이후 일제강점기를 거쳐 광복을 맞았고, 대전광역시 시대를 거쳐 지난해까지 대전발전의 구심점이 됐다. 대전발전의 초석이 된 것은 물론이다. 이제 80년 만에 새로운 충남시대를 맞았다. 그것도 새 충남도청소재지인 홍주(홍성)와 예산의 1000년이라는 지명역사를 오롯이 품에 안고서 말이다. 충남도청이 1000년 역사의 땅에서 새로운 충남의 1000년을 새롭게 시작하며, 이어간다는 점은 정말로 의미 깊은 일이다. 앞으로 충청남도의 새로운 출발점에서 도청소재지 홍성(홍주)과 예산의 도시브랜드의 핵심은 결국 홍주나 예산의 1000년이라는 유구한 지명역사를 제대로 살리는데서 찾아야 할 것이다. 지명역사 1000년의 홍성(홍주)과 예산 모두 과거 홍주목에 속했던 같은 고을이니까. 이곳에 충남도청이 이전해 자리를 잡았으니, 결국 충남도청소재인 홍주와 예산의 1000년이라는 도시의 역사가 곧 도청소재지의 도시브랜드인 것이다. 이를 잘 살려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 2012년 충남도청 이전, '홍주'지명 1000년
충남도청이 홍성 땅으로 이전한 2012년은 홍성의 옛 지명인 '홍주(洪州)'라는 지명이 생긴지 1000년이 되는 해였다. 1000년의 역사란 사실 대단한 역사이며, 우리의 뿌리와도 직결되는 중요한 문제다. 홍성군과 지역주민들을 향해 '홍주지명 1000년 기념사업'을 촉구했던 것은 역사적 고증에 앞서 홍주 1000년의 지명역사에 맞춰 충남도청이 옮겨온다는 사실적 의미가 더했기 때문이다. 1000년 역사의 땅, 새 충남도청소재지가 된 이곳은 삼한시대에 마한의 감계비리국이 있던 곳으로써 백제시대에는 고막부리 현이 있었으나, 좀 더 자세히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고려시대부터다. 고려 왕건은 934년 운주(지금의 홍성)전투에서의 승리를 계기로 충남의 서북부지역을 장악하기에 이른다. 이 여세를 몰아 936년 경북 선산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후삼국을 통일한다. 이후 고려 성종 14년(995) 전국을 재편성 할 때 이곳 홍성지역을 운주라 하고, 현종 3년(1012)개편 때 '홍주(洪州)'로 고쳐 부르기 시작하여 조선조까지 같은 지명으로 불렸다.

■ 1914년 일제강점기, '홍주' 지명 없애
일제강점기인 1914년 3월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홍주군은 '결성현(結城縣, 지금의 결성면)'의 11개 면을 병합하면서 홍주군의 '홍(洪)'자와 결성현의 '성(城)'자를 따서 '홍성군(洪城郡)'이란 새 이름을 갖게 된 이래 지금에 이르고 있다. 지금도 홍성에는 '홍주'라는 지명의 흔적은 물론 각종 명칭으로 불리거나 사용되면서 역사와 삶속에서 '홍성'이란 일제의 지명속에서도 오롯이 '홍주'라는 토종 지명이 그대로 살아 있다. 따라서 1012년부터 지금까지 '홍주'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사용되고 있는 지명이 공교롭게도 충남도청이 홍성으로 이전한 2012년, 지명역사 1000년을 맞이했다는 사실이다. 이렇듯 지명의 역사가 1000년을 올곧이 이어 오는 지역도 드물다. 고려사 등 각종사료와 홍양사, 홍성군지 등에 기록된 역사를 중심으로 '홍주지명 1000년'을 맞는 의미를 새기면서 홍성(홍주)역사의 정체성과 정서적 통합 및 충남도청 이전에 맞춰 '홍주지명 1000년 기념사업'을 대대적으로 실시해 도청소재지로서의 위상제고 및 도시브랜드 가치를 높여야만 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홍성군이나 의회를 비롯해 모두가 아무 일도 없는 듯이 그대로 지나가 버렸다.


■ 목사·부사고을,'홍주' 이름 못 찾아
또 하나 주목할 점은 과거 '목사고을'의 지명 중 유일하게 '홍주'라는 지명만이 제 이름을 찾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일제강점기인 1914년, 일제는 고려 최영 장군을 비롯해 사육신 성삼문 선생, 백야 김좌진 장군, 만해 한용운 선사, 매헌 윤봉길 의사, 추사 김정희 선생, 최익현 등 수많은 독립운동가와 큰 인물이 많이 나왔기에 그 기운을 없애기 위해 의도적으로 홍주라는 명칭을 바꿨다고 한다. 이런 상황을 종합해 볼 때 일제에 의해 강제로 없어진 홍주라는 고유의 지명은 반드시 되찾아야할 일이다. 친일이니, 반일이니를 외치면서 정작 일제에 의해 빼앗긴 자신의 이름을 찾는 일에는 무관심뿐인가? 현재 우리나라의 목사고을 중 유일하게 본래의 이름을 갖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은 한마디로 수치이며, 치욕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 모두의 과제이기도 하다. 충청도의 목사고을은 홍주를 비롯하여 공주, 청주, 충주가 그곳인데 홍주를 제외한 세 곳(공주, 청주, 충주)은 지금까지도 제 이름을 그대로 갖고 있다. 전국적으로도 목사고을은 '주'자를 간직한 채 제 이름을 아직까지도 지키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하고, 명심할 일이다.

홍주목은 태종 13년에 실시된 지방행정구역 개편의 결과에 의해서 신평, 여양, 고구, 흥양, 합덕 등을 속현으로 삼아 직접 관할을 하고, 태안, 서산, 면천의 3개 군을 영군으로 하여 그 아래 해미, 당진, 덕산, 예산, 청양, 결성, 보령, 대흥 등 8개 군을 영현으로 삼게 된다. 이후 세조 때에 이르러 진이 설치되면서 진관체제에 따른 지방행정구역 시스템으로 다시 변동을 하는데, 이때 홍주 역시 그 영향을 받게 된다. 속현 중 신평현 만을 속현으로 삼고 나머지 현들은 폐현하여 모두 홍주목의 실질적인 영향 아래 두었으며, 이밖에 서천군과 온양군이 홍주목으로 편입이 되어 관할지역이 더욱 확장되기에 이른다. 이후 편입된 서천, 온양군 이외에 서산, 태안, 면천 등의 5개 군과 평택, 덕산, 홍산, 청양, 대흥, 비인, 남포, 결성, 보령, 아산, 신창, 예산, 해미, 당진 등의 14개의 현을 추가로 관할하게 되어 위로는 경기도 평택까지 아래로는 충남의 서천에 이르는 차령산맥의 서북쪽을 관할하는 광범위한 행정, 군사요충지로서의 역할을 하게 된다.

물론 홍성지역이 좋았던 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고려 때와 마찬가지로 승격과 강등을 반복하였는데, 중종 25년 홍주부로 승격을 하여 관찰사를 파견한 부분과 조선 후기 현종 때 홍양현으로 강등되었다 다시 목으로 승격을 했다가, 순조 때에 이르러 다시 현으로 강등이 되었다 목으로 승격이 되기도 하는 우여곡절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목사와 부사고을 홍주는 일제시대를 거쳐 1895년 갑오, 을미개혁이 추진되면서 지방제도가 23부제로 개편됨에 따라 홍주목은 홍주부로 승격이 되어 인근 22개의 군을 관할하다가 1896년에 실시된 13도제에 따라서 홍주군으로 개편이 된다. 이후 일제강점기인 1914년 실시된 군과 면의 통폐합령에 따라서 홍주군과 결성군이 통합이 되고 보령군의 일부를 편입하여 홍성군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때의 영역이 현재의 홍성군의 영역으로 굳어지면서 일제에 의해 빼앗긴 제 이름을 아직까지도 찾지 못하고 있는 형국이다.

■ '예산'역사 1100년, 군정 최우선 순위
예산이라는 명칭은 고려 태조 2년(919년)에 예산이라는 지명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1914년 일제강점기 행정구역 개편으로 대흥군, 덕산군, 예산군을 통합해 '예산'으로 그대로 사용해 지금에 이르고 있으며, 2019년 지명사용 1100년을 맞는다. 예산군은 군수를 정점으로 대대적인 발전전략과 비전, 마스터플랜을 구상 중이라고 한다. 홍성군과는 대조적인 면이 아닐 수 없다. 극명하게 인식과 의식의 차이를 보이는 대목이다. 최승우 예산군수는 2013년 군정 7대 발전전략 중 최우선 순위로 '예산역사 1100년의 재조명과 새로운 100년을 위한 비전과 마스터플랜 수립'에 포커스를 맞춘다고 한다. 의미 있는 발상이다.

최 군수는 "찰스 다윈은 '종의 기원'에서 살아남는 종은 강인한 것도 지적능력이 뛰어난 것도 아니다. 변화에 가장 잘 적응하는 종"이라고 설명하면서 역사가 아놀드 토인비는 자신의 저서 '역사의 연구'에서 인류의 역사를 '도전과 응전'으로 보고 외부의 도전에 효과적으로 응전했던 민족이나 문명은 살아남았지만 그렇지 못한 문명은 소멸된다고 말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홍성군이 주목할 일이다.

■ 자치시대, 지명과 역사는 상품이며 돈
이밖에도 전남 순천(順天)의 경우 지난 2010년 지명역사 700년이 된 해에 2013년 정원박람회를 개최키로 하고 제2의 도약을 선언했다. 또 지난 2008년 600주년을 맞이한 마산, 진해, 창원은 통합을 자축하고 대내외적으로 크게 홍보했다. 충북 괴산과 경기 용인은 지명역사 600년을 맞아 각종 역사전시회 등 대규모 행사를 준비해 전국에 알리는데 힘을 쏟는 점에 우리 모두가 주목할 일이다. 예산은 군수와 공무원들이 앞장서 군정의 최우선 순위로 예산의 역사를 조명하고, 이를 통해 지역발전을 위한 비전으로 제시하고 있다. 반면 홍성은 지난 2006년부터 홍주지명 1000년의 의미를 되살리자는 부르짖음과 외침을 외면한 채 역사적 고증 운운하며 명분도 실리도, 기회도 빼앗겼다. 정녕 그대로 메아리가 되고 말 것인가. 충남도청 이전과 궤를 같이하며 '천년 고도'라는 역사적 사실과 명분을 살려 지역과 충남도청이전을 포함한 도청소재지임을 홍보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쳤다. 분명한 것은 지방자치시대, 지명과 역사는 곧 상품이며 돈이라는 사실이다. 도청이전과 함께 1000년의 땅에서 고작 '충남도민체전'이라니, 전국에 이 지역을 홍보하는 수단으로 과연 약발이 먹힐까? 이제라도 충남도와 예산군, 홍성군이 함께 충남도청소재지의 지명역사가 1000년이라는 사실을 명분으로 하는 각종 브랜드사업화 사업 구상과 실천을 재삼 촉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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