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산군 대흥면 지곡리마을

고려 말 예산현·덕산현·대흥현 설치, 대흥동헌 짓고 현감 둬
봉수산에 있는 임존성, 백제 멸망 뒤 ‘백제부흥운동’ 근거지
예산에서 가장 작은 마을, 대흥면 지곡리마을 20가구 30명
주민 대부분 농업에 종사하며 노인회·부녀회 활발하게 운영
충남 예산군 대흥면은 동쪽으로는 대술면(大述面)과 신양면(新陽面), 남쪽으로는 신양면(新陽面)과 광시면(光時面)이 접하고, 서쪽으로는 홍성군(洪城郡) 금마면(金馬面)과 응봉면(應峯面)이 접하며, 북쪽으로는 오가면(五可面)과 예산읍을 접하고 있다.
대흥은 신석기 말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이며, 당시 일부 씨족들이 해수와 육수가 넘나드는 기름진 땅 대흥에 정착하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어 청동기 시대에는 북방문화권에 속하는 스키토시베리언 계통의 부족 중 일부가 이주해 집단 거주지를 이뤘다. 근거로는 동서리 뒷산 사방공사 때 청동검 9점, 점파형 동검 3점, 마제 석총 등 다수의 청동기 유물이 출토된 바 있다.
백제의 모태인 삼한 시대에는 마한의 지침국 중 일부로 지심현이라 지칭했는데, 당시부터 임존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기 시작했고 그 뜻이 ‘님이 계신 곳’이라 풀이되므로 부족장이 거처했던 곳이 아니었나 추정된다. 대흥면이 역사기록에 부각되기 시작한 것은 백제 말기부터이다. 서기 600년 백제가 나당연합군에 의해 퇴패하던 중 3만여 명 백제군이 임존성에 입성·항거했다. 사비성 함락 후에도 의자왕의 조카 복신과 승려 도침, 그리고 장군 흑치상지 등이 임존성과 주류성을 근거로 백제부흥운동을 전개했다. 한때 200여 성을 회복하는 등 그 위세를 떨쳤으나 내분과 나·당연합군(신라 김유신, 당의 유인궤)의 공격으로 백제 부흥의 희망은 좌절되고 말았다.
백제 멸망 이후 당의 야욕에 의해 백제의 고토에는 웅진도독부가 설치됐는데, 그중 일부로 예산에는 마진현, 덕산에는 이문현, 대흥에는 지심현을 두었던 것으로 보아 당시 대흥이 군사행정의 요충지였음을 엿볼 수 있다. 이후 신라가 고구려를 멸하고 당까지 추방해 삼국을 통일한 다음 당과 발해를 견제하기 위해 요새를 북방으로 옮기면서 대흥은 급격히 쇠퇴하게 된다.
그후 대흥은 전형적인 고을 형태를 유지해오다 고려 명종 2년 ‘감무’라는 관아를 둬 통치했으며 고려 말기에는 예산현, 덕산현, 대흥현(대흥, 광시, 신양, 응봉 지역)을 설치하고 현 대흥면사무소 옆에 동헌을 짓고 현감을 둬 다스리게 했다.
조선 시대로 넘어오면서 대흥은 홍주목의 소속으로 있다가 태종 13년 다시 대흥현이라 칭했다. 숙종 때에 이르러 대흥군으로 승격, 당시 예산현, 덕산현보다 상위직의 관리로 하여금 다스리게 했다. 이렇듯 한반도 역사의 요충지였던 대흥은 일제강점기(1914년 3월)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대흥현, 예산현, 덕산현을 통합한 예산군에 편입돼 면에 속하게 돼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1964년 12월 예당저수지가 축조되면서 현재의 지세를 이루게 됐다.
■ 인구 1700명 무너진 옛 대흥현고을
오늘날에는 작은 농촌 마을의 형태를 이루는 면 소재지이며, 관광지로 발돋움을 하고 있다. 옛 대흥현 고을의 찬란했던 문화는 봉수산을 중심으로 임존성, 이성만 형제 효제비, 대원군척화비, 태실과 태비, 옛 관리들의 선정비 등 곳곳에 많은 유적을 남겼다.
옛 대흥현 고을은 본래 백제의 지삼촌현으로 당나라가 백제를 멸망시킨 뒤 지심현을 설치해 지심주의 영현을 만들었다고 한다. 신라가 이 지역을 차지한 뒤 757년(경덕왕 16)에 임성군(任城郡)으로 고쳐 웅주 관하에 두고, 청무·고산의 2개현을 영현으로 관할하게 했다.
이곳 봉수산에 있는 임존성은 백제가 멸망한 뒤 ‘백제부흥운동’의 근거지였다. 고려 시대 940년(태조 23)에 대흥군으로 개칭했으며, 1018년(현종 9) 홍주의 속현이 됐다가 1172년(명종 2) 감무를 둠으로써 독립했다. 조선 초의 군현제 개편으로 1413년(태종 13) 대흥현이 됐다. 1681년(숙종 7) 현조의 태를 묻은 곳이라 해 대흥군으로 승격했다. 지방제도 개정으로 1895년 홍주부 대흥군, 1896년 충청남도 대흥군이 됐다. 1914년 군면 폐합 때 읍내면·근동면을 대흥면으로, 일남면·이남면을 광시면으로, 원동면·거변면을 신양면으로, 내북면·외북면을 봉산면으로 통합해 예산군에 병합하고, 대흥군을 폐지했다.
옛 대흥군의 중심지였던 지금의 예산군 중남부에 있는 예당저수지를 품고 있는 곳이 대흥면이다. 주변에는 100m 내외의 낮은 산이 대부분이며, 평야는 북서쪽의 무한천 유역에 소규모로 분포하고 있다. 주요 작물은 쌀과 잎담배 등을 주로 생산하던 마을이다. 서남부 일대에는 1962년 완공된 충남 최대 저수지인 예당저수지가 있으며, 붕어·향어·잉어·메기 등의 가두리 양식을 하고 있다.
유물·유적으로는 대흥향교(충청남도 기념물 제136호)와 경내의 은행나무(충청남도 기념물 제160호), 대흥동헌 및 아문(충청남도 기념물 제174호) 등이 있다. 당진영덕고속도로가 면 중북부를 관통한다. 행정구역은 동서리·상중리·교촌리·송지리·대야리·신속리·노동리·지곡리·하탄방리·탄방리·금곡리·대율리·갈신리·손지리 등 14개 리(법정리 기준, 행정리 기준 17개 리)가 있다. 면사무소 소재지는 대흥면 의좋은형제길 37이다. 면적은 37.54㎢, 인구는 지난 4월 말 현재 1662명(남자 866명, 여자 796명, 외국인 18명)이다.
■ 예산군에서 가장 작은 대흥 지곡리마을
현재 예산군에서 가장 작은 마을인 대흥면 지곡리(芝谷里)는 본래 대흥군 근동면의 지역으로 산이 사방으로 둘러싼 골짜기마을이다. ‘지룰’ 또는 ‘지곡’이라 불리다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지곡리’라 해서 예산군 대흥면에 편입됐다.
지곡리는 대흥면의 중부에 위치하며, 동쪽으로 대률리, 서쪽으로 노동리, 남쪽으로 탄방리, 북쪽으로 손지리와 접하고 있는 마을이다. 마을은 대부분 100m 내외의 구릉지로 이뤄져 있으며, 중부에는 탄방천의 지류가 흐르는 곡간 충적지가 형성돼 있어 논농사에 적합한 지형을 이루고 있다.
대흥면 지곡리는 100m 내외의 산들이 마을을 둘러쌓고 있어 마을이 산의 품 안에 안겨 있는 형국의 마을로 현재 20가구에 30명이 거주하고 있으며, 대흥면에서 가장 작은 마을이다.
이소희 이장은 “대흥면에서 가장 작은 마을로 귀농·귀촌자도 없는 상황이고 80대 이상 어르신들이 몇 분 계시고 대부분 60~70대의 고령”이라면서 “현재는 20가구에 30명이 거주하고 있는데, 한때는 25가구에 40명(남성 16명, 여성 24명) 가까운 사람들이 살았던 때도 있었다”고 회상했다. 이 마을에는 총 25가구 중 3호가 빈집이며, 30년 이상 된 주택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3~4가구는 신축한 집들로 구성돼 있다.
농경지로는 논이 6.50ha, 밭이 11.30ha, 임야가 77.30ha로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마을로 3~4가구는 축산을 하고 있다.
농번기라 그런지 마을회관은 문이 잠겨 있고, 이 마을에서 유일하게 만난 고추밭을 매고 있는 80대의 할머니는 “혼자 살고 있다”고 말하고는 “이 동네에 여덟, 아홉 집은 노인네들 혼자 살고 있다”고 설명한다. 마을의 절반 가까이가 독거노인 가구인 셈이다.
대부분이 농업에 종사하고 있는 마을이다. 노인회와 부녀회가 비교적 활발히 운영되고 있으며, 매년 12월 말에는 대동회가 개최돼 주민 간의 유대를 강화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지곡리에는 마을회관과 경로당이 있어 주민들의 모임과 여가활동의 중심지로 활용되고 있지만 지금은 농번기라 그런지 문이 잠겨 있었다. 또한, 마을 내에는 기독교대한감리회 ‘지곡교회’가 있으며, 주변에는 고추밭이 넓게 펼쳐져 있는 모습이다.
예산 대흥면 지곡리는 전통과 현대가 조화를 이루는 마을로, 주민들의 공동체 의식과 자연환경이 어우러져 살기 좋은 농촌 지역으로 평가받고 있는 마을이다.





<이 기사는 충청남도미디어지원사업의 지원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