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희망이다 홍성의 인맥을 찾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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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희망이다 홍성의 인맥을 찾아
  • 이수현 기자
  • 승인 2013.07.26 1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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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신두호양복점 신두호 대표

 

▲ 국제기능올림픽대회에서 한국최초 양복부문 첫 금메달을 획득한 한국기능인의 산 증인, 신두호 씨.


역대 대통령 옷 맞춤… 양복제작 53년 외길인생 

69년 국제기능올림픽서 우리나라 역사상 첫 양복부문 금
재경홍성군민회 등 열정 참여… "고향있기에 행복한 삶" 

 

역대 대통령 옷 맞춤… 양복제작 53년 외길인생

국제기능올림픽에서 전 세계 국가들을 제치고 양복기술부문에서 첫 금메달을 안겨준 주인공이 홍성군 출신이라는 사실을 아는 이가 얼마나 될까? 국제기능올림픽 대회에 출전해 대한민국 사상 첫 양복부문 금메달을 안겨줬던 홍동면 홍은리 출신 신두호(67) 씨를 만나 그의 장인정신과 인생철학에 대해 들어봤다.

"당시에는 정말 획기적인 일이었습니다. 전국기능대회에 뽑힌 국가대표들이 훈련하는 곳에 박정희 전 대통령은 '일인일기로 공업국가 이룩하자'라는 휘호를 써 주셨습니다. 그때는 기술이 부족한 나라였기 때문에 기술자들을 양성시키는 일이 중요한 과제였습니다. 지금은 전 세계 앞선 기술로 스마트폰 등을 만들어내는 대한민국이 되었잖아요. 그때의 노력 오늘날의 자랑스러운 결과를 이루어 낸 것 같습니다."

국제기능올림픽대회는 1947년 스페인직업청년단이 주최자가 돼 청소년 근로의욕을 고취하고 심신의 건전화를 위해 기능경기대회를 개최한 것이 시초가 됐다. 우리나라는 1969년 스페인에서 개최된 16회 대회에 첫 출전해 공업선진국 선수들과 기량을 겨뤄 양복과 제화직종에서 종합 4위의 성적을 얻었다. 이 가운데 신두호 씨는 양복기술부문에서 사상 첫 금메달을 안겨 온 국민의 주목을 받았다. 그는 국제기능올림픽대회에서 금메달을 따고 돌아와 국가의 위상을 드높인 공으로 대통령훈장을 받고 당시 100만원의 상금을 받아 시골의 부모님에게 어려운 형편을 도울 수 있었다고 말했다.

신 씨는 "그때는 정말 큰 금액이어서 논과 밭을 사고 양계장을 지을 돈을 마련하고도 남았었다"며 "당시 훈련소에 입소했었는데 중대장님과 고참들이 대통령훈장을 받은 사실을 알고 영웅대접을 해줬었다"고 그때의 시절을 회상했다. 그는 제대 후 서울 중구 경찰서 인근에 신두호 양복점을 열고 국제대회에서 인정받은 그의 기술로 청와대를 출입하며 대통령과 관복들을 만들었다. 그는 박정희·전두환·노무현 대통령 등의 옷을 오랫동안 지어왔다.
 


그는 아직도 신두호 양복점을 소박하게 운영하고 있다. 그의 낡고 허름한 양복점 안에는 문외한이 보기에도 멋진 옷감과 양복들이 그의 녹슬지 않은 기술로 빛나고 있었다. 산업화시대로 변모해 양복점을 찾는 손님의 발길은 줄었지만, 그는 양복기술을 버릴 수가 없었다고 한다. "초등학교 시절 선생님이 장래희망을 물어보면 저는 늘 기술자가 되겠다고 당당히 말하곤 했습니다. 학교를 다녀도 결국 농사일을 할 것이 뻔했죠. 없이 사는 처지에 남일 돕는 일을 할 바에야 기술을 터득하겠다고 다짐했죠.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14살 되던 해 부산으로 내려가 미싱 공장에서 미싱사 일을 배우며 야간학교를 다니며 공부했어요. 60년대에는 화폐단위가 바뀌기 전이었는데 심부름 값으로 몇 푼 받는 게 전부였지만, 그걸로 감사했죠. 요즘 젊은 사람들은 어려운 시절을 겪지 않아, 이해 못해요. 어릴 때부터 어머님께 맛있는 고기를 사드리겠다고 약속했는데 금메달을 따고 그 약속을 지켜드려 살아 계실 때 효도해 드렸다고 생각합니다."

메달을 따고 돌아온 그의 금의환향을 누구보다 기뻐한 것은 고향사람들이었다. 신 씨는 "당시 홍동면에서는 카퍼레이드와 환영식을 열고 열렬한 환영인사를 보내줬었다"고 회상했다. 신 씨는 또 "모교인 홍동초등학교에서 초청연설을 했었는데 한 여학생이 나를 롤모델로 삼아 경찰의 꿈을 이뤄 성북경찰서 민원실장이 되었다"며 "아직도 동문회에 참석하면 그 시절 이야기를 하며 고마움을 되새긴다"고 전했다.

 

 

 

 

▲ 홍동면 홍은리 출신 양복기술자 신두호 씨가 자신이 손수 지은 양복을 만져보이고 있다.


"많은 분들의 도움으로 그때의 자리에 올랐기 때문에 고향사람들에게 마땅히 보답해야한다고 생각해요. 모교에 공사가 있으면 작게나마 보탬이 되도록 학교에 기부도 하고 면사무소에 집기류를 담는 서랍이나 케비넷이 부족하면 서울에서 사다가 실어 보내드리기도 했었습니다. 고향은 나를 낳게 한 곳이고 고향을 지키는 친구들이나 후배 선배님들은 더없는 애국자입니다. 마음속으로 늘 고마운 마음을 잊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는 재경홍성군민회와 홍동향우회 등 타향에서 활동하는 출향인모임 등에 참석하여 오랫동안 고향을 돕는 일에 적극적으로 도모했다. 홍동향우회에서 45차 홍보대사와 제10대회장을 2년간 역임하기도 했었다. "고향을 그리워하는 출향인들은 모임을 통해서 늘 고향을 잊지 않고 고향을 생각하는 마음으로 하나가 되어있습니다. 많은 출향인사들이 몸과 정신을 다해 고향을 생각하기에 발전하고 더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지 않았을까요? 요즘은 재경홍주산우회와 홍동산악회 등 출향인 산악회 모임을 빠지지 않고 등산을 다닙니다. 700미터정도의 적당한 산에 오르며 심신을 단련하는 일이 저의 즐거움이자 낙이 되었습니다. 산을 오르면 모든 사물을 가슴으로 볼 수 있어요. 산에서 내려다 보이는 풍경을 품안에 담으면 그렇게 기쁘고 좋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 기쁨에 다시 산을 오릅니다."

신씨는 "먼 길을 가면서 쉬지 않고 끝까지 가는 것이 중요하고 큰 것을 목표로 삼지 않고 작은 것부터 하나씩 단계를 밟다보면 나중에 큰 비바람을 만나도 쉽게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 같다"며 "큰 것보다 작은 것을 선택해서 크게 만드는 힘을 비축하는 것이 중요하다. 쉽게 포기하지 않고 주위사람들과 함께 발맞춰 나가다보면 어느 분야에서든지 성공하는 사람이 될 뿐만 아니라 경영자 마인드를 갖출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53년 양복기술인 외길 인생을 계속하며 양복을 짓는 일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신 씨는 슬하에 2남 2녀를 두었는데, 독일과 싱가포르, 미국 등지에서 다양한 방면에서 활동하고 있다.

 

 

 

 

 <이 기획취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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