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리엔 한 오라기 꿈도 없는 밤이건만
상태바
천리엔 한 오라기 꿈도 없는 밤이건만
  • 홍주일보
  • 승인 2014.03.27 15:3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장희구 박사의 번안시조 만해 한용운의 시 읽기 <12>

 

우수수 지는 가을 잎을 보면 한 해가 그렇게 저 멀리 뒷모습을 보인 것으로 생각한다.흔히 가을은 수확의 계절이라고 하지만 겨울을 재촉하면서 다사다난했던 한 해를 저 만큼 보내면서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늘 소소한 가을에 아쉬움을 보낸다. 어디 보내는 아쉬움뿐이랴. 산 너머 저만큼 멈칫멈칫 기다리고 있는 봄도 어서 오라고 손짓하면서 맞이한다. 시인의 시상 주머니는 오늘밤 천리엔 한 오라기 꿈도 없는 밤이건만, 밝은 달을 벗 삼아 가을 잎만 우수수 지는구나 라고 읊었던 시 한 수를 번안해 본다.


述懷(술회)
마음은 성글어서 빗장 없는 집과 같고
미묘한 것 무엇 하나 바른 것이 없어라
천리 밖 한 오라기 꿈들 가을 잎에 우수수.

心如疎屋不關扉 萬事曾無入微妙
심여소옥부관비 만사증무입미묘
千里今宵無一夢 月明秋樹夜紛飛
천리금소무일몽 월명추수야분비

천리엔 한 오라기 꿈도 없는 밤이건만(述懷)으로 번안해본 칠언절구다. 작자는 만해(卍海) 한용운(韓龍雲:1879~1944)이다. 위 한시 원문을 의역하면 [마음은 성글어서 빗장 없는 집과 같아서 / 미묘한 것 무엇 하나 바른 것이 없어라 // 오늘 밤 천리밖엔 한 오라기 꿈도 없는 밤이건만 / 밝은 달 벗을 삼아 가을 잎만 우수수 지는구나]라는 시상이다. 아래 감상적 평설에서 다음과 같은 시인의 시상을 유추해 본다. ‘마음은 빗장없는 집 바른 것이 없어라, 꿈 없는 한 오라기 밤 가을 잎만 우수수’ 라는 화자의 상상력을 만난다.
위 시제는 [지나온 세월! 회포 속에 담고]로 번역된다. 한 많은 세월을 가슴에 품고 지나온 세월의 무게만큼 큰 회한에 젖는다. 그것이 나와 가족만을 위하는 일이 아니었다면 더더욱 그러하리라. 시인은 불교중흥을 위해, 민족중흥을 위해, 문학의 저변확대를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해본다. 100여년이 지난 오늘날의 자취는 큰 걸음으로 남아있지만, 당시만 해도 본인이 노력한 만큼 얻은 것이 없어 보였을 지도 모른다.
시인은 이제 아무런 거리낌 없이 깊은 회한에 젖는다. 그래서 마음은 빗장 없는 집과 같다고 표현했다. 그렇지만 미묘한 무엇 하나 가진 것도 이루어 놓은 것도 없다고 했다. 마음은 빗장 없는 집과 같다는 시상에서 선사의 큰 시심을 발견한다. 마음은 닫혀져 있는 것이 아니라 열려 있다는 뜻으로 해석하는 편이 더 나을 것 같다. 시인은 열린 마음, 열린 생각을 먼저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열린 마음과 활짝 열어젖힌 생각으로 화자는 천리에는 한 오라기 꿈도 없는 소박하고 거룩한 밤에 [밝은 달에 가을 잎만 우수수 지네]라는 시상을 떠올렸다. 가을은 겨울이 다가오는 전단계이며, 낙엽이 우수수 진다는 시심은 꿈 부풀었던 생각들 하나하나들이 조각조각 떨어지고 만다는 회한에 젖어보는 시상 속에 일구어진다.


<한자와 어구> 
心: 마음. 如:~같다. 疎屋: 성근 집. 不關扉: 빗장이 없다. 萬事: 모든 일. 曾無: 이루어 놓은 것이 없다. 入: 들다. 微妙: 미묘한 것. // 千里: 천리. 먼 곳. 今宵: 지금의 밤. 오늘 밤. 無一夢: 한 오리가 꿈도 없다. 月明: 달이 밝다. 秋樹: 가을 나무. 夜: 밤. 紛飛: 어지럽게 날리다.
시조시인․문학평론가․사)한국한문교육연구원 이사장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