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그리며 생계 절실했던 고암, 간판집 사업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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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그리며 생계 절실했던 고암, 간판집 사업도
  • 김혜동 기자
  • 승인 2014.06.20 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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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이 낳은 세계적 화가 고암 이응노 <3>

전주에서의 고암

그림 그리며 생계 절실했던 고암, 간판집 사업도


홍성을 떠나 서울서 그림 배우던 스무살 중반 홀연히 전주로
개척사 간판집 사업 성공 거두며 10여년간 개인전등 작품 활동
정신적 지주 효산 만나 시서화 배우며 지역 예술인들과 교류도

 

 

 

 

 

▲ 전주 개척사 주소가 명시된 이응노 화백의 서신 일부.


고암 이응노 화백의 행적과 관련해 가장 연구가 미진한 부분은 바로 전주에서의 족적일 것이다. 고향 홍성을 떠나 서울에서 당시 사설서화학원을 운영 중이었던 해강 김규진 밑에서 전통사군자를 배우던 고암은 그가 스무살 중반 무렵에 홀연히 전라북도 전주로 내려가 ‘개척사’라는 이름의 간판점의 문을 열었다. 그림을 그리기 위해 고향집을 가출하다 시피 떠난 고암은 서울 스승의 집에 기거하며 그림을 배웠지만 역시 생계가 문제였다. 간판점은 지속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위한 생계수단으로 생활력이 남달랐던 고암은 성공적으로 운영했다고 전해진다.

고암은 개척사에서 상업간판의 글씨를 쓰는 일과 극장 간판 그리는 일을 했다. 간판업을 습득한 고암은 독립해 사업적으로 대성공을 거둬 규모가 클 때는 페인트 장인 30~40명을 거느리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그렇게 모은 돈은 고향에 보내졌다. 생업 이외에도 작품활동에 매진했던 고암은 전주에서 개인전을 개최하기도 했다. 1933년 10월 11일 발행된 동아일보 기사에는 “본적을 충남 홍성에 두고 방금 전주 팔달정에서 개척사라는 미술 간판업을 경영하는 청년화가 이응노(30) 군의 개인전람회를 오는 11월 12일 전주공회당에서 개최하리라는데 동 군은 일찍이 17세부터 해강 김규진 씨의 문하에서 오랫동안 동양화를 연구하야 수차 선전에 특선까지 된 청년화가라 한다. 그래 군의 예술을 아끼는 전주 유지 제씨의 발기로 전기와 같이 개최한다는데 일반은 다수히 관람하기 바란다고 한다”고 게재된 바 있다.

고암이 왜 전주로 향했는가에 대한 이유는 아직까지 모호하다. 그러나 약 10여년의 세월을 전주에 머물면서 생업과 작품활동에 매진했던 그의 면면을 들여다보면 그 실마리가 다소 풀린다. 김진돈 전라금석문 연구회장이 올 6월 월간 묵가(墨家)에 기고한 글 ‘호연지기로 예술혼을 불사른 효산 이광열’에서 20대 중반의 고암이 당시 전주지역의 사상적 지주였던 효산과 막역한 관계였음이 드러난다. 효산 이광열은 당시 전북서화계에서 가교 역할을 했던 인물이다. 그는 1935년 호남 지역 최초의 서예학원인 한묵회를 결성해 서화발전에 힘쓰는 한편, 일제 강점기부터 해방 이후까지 호남일대의 최고의 문화공간으로 역할을 했던 학인당(學仁堂)에 머물며 당시 최고의 지식인이자 예술가들과 활발한 접대·교류를 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김진돈 회장을 비롯한 전주 서화계 원로들에 따르면 고암 이응노 역시 전주에서 활동하는 동안 학인당의 효산을 찾아 시서화에 대한 가르침을 받는 것은 물론 깊은 교분을 나누며 영향을 받았다.

 

 

 

 

 

 

 

▲ 효산 진갑 기념 묵죽(이응노 작, 1945). 일본생활을 마치고 1945년 고국으로 돌아온 고암 이응노가 1928년부터 1935년까지 효산에게서 배운 가르침에 대한 답례로, 효산에게 진갑기념 묵죽 작품을 바쳤다.


이용엽 전주문화원 동국진체연구소장은 “고암의 전주 시절에 만약 효산이 없었더라면 오늘날의 이응노가 있었겠느냐며 목소리를 높이는 지역 어른들이 많았다”고 전했다. 20대 중후반 무렵 전주에 정착한 고암이 결국 개척사를 성공적으로 운영하며 개인전까지 개최한 데는 효산을 중심으로 학인당을 찾던 여타 지역 유지들, 예술가들과의 교류가 큰 힘이 되었을 것으로 유추된다. 고암은 전주생활 동안 꾸준히 작품 활동에 매진, 1931년에는 ‘청죽’으로 특선을 수상하고 이후에도 계속 입선했다. 이후 고암은 1935년 신문물을 배우기 위해 전주 개척사를 정리하고 일본으로 떠났으나 전주에서의 정신적 스승이었던 효산과의 관계는 일본에서도 이어졌다. 효산의 61세(회갑)을 기념해 고암이 일본에서 제작한 작품 ‘묵죽(墨竹)’은 이를 뒷받침하는 대표적 증거이다.

최근 효산의 생애와 효산을 중심으로 전주에서 활동했던 지식·예술인들의 발굴에 매진하고 있는 전북 문화계는 최근 고암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을 드러내고 있다. 지난 2월 전북도립미술관에서 개최된 ‘효산 이광열 전’에는 효산 이광열을 중심으로 그 뒤를 잇는 묵로 이용우와 고암 이응노, 효산의 아들 인당 이영균 및 윤당 이기봉 등 지역 출신이거나 지역에서 활동했던 작가들의 작품이 대거 선보였다. 이 전시에는 고암이 효산의 회갑을 기념해 제작한 작품 ‘묵죽’과 개척사 운영 당시 국내외로 보내진 서신 90장 중 일부가 공개돼 전주에서의 고암의 흔적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계기로 평가받기도 했다. 

<이 기획취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인터뷰] 이용엽 전주문화원 동국진체연구소장

 

 

 

 

 

 

 

“전주시절 고암 행적 밝혀내려 노력”

-고암 이응노와 막역했던 효산은 누구인가
“효산 이광열은 구한말 전주 지역의 향토사와 교육, 문화, 예술을 발전시킨 인물이다. 일제강점기 때 항일정신을 불태운 효산은 글씨와 사군자 분야에 뛰어난 기량을 발휘했고 1927년과 1928년 조선미술전람회에 작품을 출품해 입선하는가 하면 1930년 일본 교토문예전에서 입선하기도 했다. 또 예향의 고장에서 큰 역할을 하며 근현대 전북지역 서화를 주도했던 서예학원인 한묵회를 결성해 서예발전에 힘썼고 그가 머물던 학인당은 전라도 지식인들의 사랑방 역할을 하며 교류에 앞장선 인물이다.”

-고암과 효산에 얽힌 일화가 있나
“이응노 화백과는 그가 전주에서 10여년 이상 긴 세월을 거주하는 동안 개척사(현 중앙동 4가24번지)를 경영하면서 효산 문하에서 사군자를 배웠고 특히 대나무를 익혔다고 들었다. 일각에서는 고암의 ‘죽사(竹史)’라는 호가 해강에게서 받았다고 하는데 전주 지역에서는 효산에게서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고암과 같은 시대를 살던 지역의 어르신들은 고암과 박인경 여사의 혼인도 전주지역에서 중매를 서서 성사됐다고 하시는데 사실 파악은 안된다. 확실한 것은 고암이 20~30대를 전주지역에서 보내면서 효산을 비롯한 묵로 이용우 화백 등 당시 전주지역의 지식인들로부터 상당한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다.”

-최근 전주에서 고암 연구가 움트고 있는 것으로 아는데
“최근 전북도립미술관에서 효산 이광열 전을 열면서 그에게 대나무 그림을 배웠던 고암에 대해서도 작게나마 재조명을 시작했다. 그러나 고암과 동시대를 살았던 어르신들이 모두 돌아가시고 전주에서의 기록이 많지가 않아 행적을 밝혀내는데 어려움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향후 세계적 화가로 발돋움한 고암이 효산에게서 영향을 받았고 또 전주에서 10여년 가까이 거주한 만큼 그의 연구에 있어 전주시절의 행적이 보다 소상히 밝혀졌으면 좋겠다. 그러기 위해선 홍성, 대전, 전주 등의 교류·협력이 무엇보다 중요할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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