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로 간 이응노, 문자추상으로 세계를 놀래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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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로 간 이응노, 문자추상으로 세계를 놀래키다
  • 홍주일보
  • 승인 2014.07.07 1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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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이 낳은 세계적 화가 고암 이응노 <5>

1961년 도불 파케티 화랑서 초대전

 

고암 이응노는 1989년, 프랑스 파리에서 실험과 도전의 연속이었던 이승에서의 삶을 내려놓았다. 그는 그리웠던 고국과 고향을 뒤로하고 자신의 육신을 파리의 ‘페르 라쉐즈’ 공동묘지에 맡겼다. 이응노는 국제적으로 제1·2차 세계대전이라는 혼돈의 시대와 국내적으로는 나라를 빼앗긴 민족으로서의 굴욕적인 일제식민지를 경험했고 여기에 더해 6·25까지 겪는 등 혼란의 시대를 살아온 예술가였다.

또 간첩으로 오인 받아 옥고를 치르는 등 고국에서의 뼈아픈 세월은 예술가로서 고암이 어떻게 그림을 그릴 것인가 이전에 무엇을 그릴 것인가에 대한 실존적 고민으로 이어졌다. 개인을 넘어 시대적 아픔에 방황하던 이응노는 56세의 나이에 대담한 파리행을 시도했다. 다행이 그의 선택은 탁월했고 서양미술의 본고장 파리에서 한지와 수묵이라는 동양정신을 담은 매체에 서양의 방법론을 조화시킨 ‘서예적 추상’과 ‘파피에 콜레’라는 독자적인 예술세계를 구축해냈다.

이응노는 마침내 1961년 당시 평론가 미셀 타피에와 함께 앵포르멜 운동을 일으킨 파리 굴지의 전위적 화랑 파케티 갤러리(Galerie Paul Facchetti)로부터 개인전 제안과 함께 전속작가 계약이라는 성과를 얻게 된다. 1962년 파케티 화랑에서 열린 ‘이응노 콜라주 展’은 파리화단에서의 동양인 이응노의 위치를 확고히 하는데 결정적인 기회가 됐다. 미술평론가 자크 라센느는 당시 전시 서문에서 “서양에 와서 배우면서 성장했던 일본작가들과는 달리 고암은 이미 동양의 전통적인 서예와 수묵으로 완숙의 예술경지에 도달했으며 파리에서는 이것을 토대로 새로운 예술세계를 개척해 나가고 있다”고 극찬했다.
 

이후 이응노는 파리를 비롯한 유럽 각지와 미국으로 무대로 활동의 폭을 넓혀갔다. 해외에서 이응노의 명성이 점차 높아졌던 것에 반해 국내에서는 1967년 동베를린 사건, 1977년 백건우·윤정희 부부 납치사건 등에 이응노가 연루되며 금기인물로 지목, 전시·거래가 모두 중지됐다. 결국 이응노는 1983년 한국 국적을 포기하고 프랑스로 귀화했고 이후 일본, 북한, 대만, 한국 등 아시아 지역의 진보적 화가들과 연대활동을 펼치기도 했다. 그가 세계화단으로 진출키 위한 초석을 다진 프랑스 파리에는 여전히 이응노의 자취를 엿볼 수 있는 곳들이 곳곳에 산재해 있다.

세르누쉬 박술관 내의 동양미술학교, 프레 생 제르베 거리에 위치해 있던 그의 아틀리에, 파리의 유명한 지식인들이 묻혀있는 페르 라쉐즈 묘지, 미망인 박인경 여사가 건립한 ‘고암서방’이 그곳들이다. 특히 고암서방은 박인경 여사가 파리 교외 지역에 건립한 한국 전통의 기와집으로 목수 신영훈 씨를 비롯한 많은 도편수들이 한국에서 기와집을 지은 후, 분해해 프랑스에서 재조립한 것으로 유명하다. 프랑스 최초의 한국식 기와집임은 물론이다. 고암서방은 이응노의 기념관이기도 하다. 바로 옆에 마련된 미술관과 더불어 유럽에서 이응노의 업적을 알리는 역할을 하는 곳이기도 하다.

당초 고암서방의 주인인 박인경 여사는 2007년경 일반에게 개방한다는 계획이었으나 건강악화 등의 이유로 개방은 지연되고 있다. 이번 연재에서는 박인경 여사의 건강악화를 이유로 취재가 성사되지 못한 ‘고암서방’을 제외하고 세르누쉬 박물관의 동양미술학교, 이응노의 아틀리에, 페르 라쉐즈 묘소 등 고암의 흔적이 묻어있는 곳들을 면면히 살펴보고자 한다.
 

우선 세르누쉬 박술관은 1898년 은행가 앙리 세르누쉬(Henri Cernuschi, 1821~1896)가 개인 소장품의 전시를 목적으로 건립한 동양 예술품·유물 전문 박물관이다. 중국, 한국, 일본 등 극동 아시아 지역의 예술품 1만 2400여 점을 소장하고 있으며 주로 신석기시대부터 13세기까지 중국 예술품들을 소장하고 있는데 B.C. 15세기에서 A.D. 3세기 사이의 청동 작품이 많다. 한(漢)시대 주화, 북위(北魏)와 수(隋) 시대의 부장품, 당송(唐宋)시대 예술품 등을 볼 수 있다. 현대 중국 회화 작품들도 있다. 때문에 이곳은 유럽의 5대 중국 예술품 소장 박물관으로 꼽히고 있다.

18세기 후반 메구로불상을 비롯해 세르누쉬가 일본에서 직접 수집한 청동 작품과 도자기 등 일본 예술품도 3500여 점에 이른다. 최근 세르누쉬 박물관은 동양의 근현대 미술가들에 대한 작품수집·전시에도 큰 의욕을 보이고 있다. 이는 1950년대 세르누쉬 박물관의 관장인 엘리셰프(Elisseef) 씨의 영향이기도 하다.

매리본느 딜로(Maryvonne Deleau) 세르누쉬 박물관 커뮤니케이션 담당자는 “당시 파리에는 아시아 지역에서 건너온 젊은 화가들이 많았었다”며 “그 중 이응노는 엘리셰프 관장과 막역한 관계를 유지했고 이응노의 예술활동을 지지하기 위해 박물관 내에서 동양미술을 강습할 수 있도록 교육과정을 개설했다”고 설명했다. 한국에서 흔히 동양미술학교로 알려졌기에 정식 교육평가과정을 이수하는 교육기관으로 오인하기 쉽지만 실제 세르누쉬 박물관 내의 동양미술학교는 일종의 평생학습강좌와 유사한, 동양미술강좌로 불리는 것이 더 적합할 것으로 보인다. 이응노는 세르누쉬 박물관 한켠에서 동양미술학교 일부 강좌를 통해 유명 화가들을 비롯해 일반인까지 다양한 이들에게 동양화를 가르쳤다.

수업은 처음부터 끝까지 한국어로 이뤄졌으며 한국미술에 대한 파리시민들의 관심을 한층 더 고양시킨 혁신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제자들 중에는 ‘묵기회’를 구성해 전 세계에서 활동하는 작가들이 있는가 하면 현재 박인경 여사와 아들 이융세 씨가 명맥을 이어받아 수업을 이어오고 있다. 최근 ‘이응노 회화 연구’ 논문을 발표한 김학량 동덕여대 교수는 “이응노가 35년간 꾸준히 참여한 동양미술학교는 해방 직후 서울에서 화실과 대학교육을 통해 동양화를 현대풍으로 갱신하고자 했던 그의 교육자적 정체성의 연속선이라고 할 수 있다”고 분석하기도 했다.

<다음호에 계속> 
<이 기획취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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