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설 회사 은퇴 후 고향에서 장학사업 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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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설 회사 은퇴 후 고향에서 장학사업 할 것”
  • 김현선 기자
  • 승인 2014.08.21 1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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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대흥산에서 가재잡고 민물고기 잡아 친구들과 어죽을 해먹곤 했던 기억은 잊을 수 없는 추억이죠” 금마면 월암리에서 2남 4녀 중 장남으로 태어난 월암건설 이재구(57) 대표이사는 어릴 적부터 유독 친구들을 살뜰히 챙겼다. “친구들은 지금도 제가 해주는 음식이 제일 맛있다고 말해요.

고향 손맛이라면서요. 우리가 어려서부터 먹던 그 맛이 있잖아요” 이 대표는 지금도 친구들이 고향에 내려오면 손수 닭을 잡아 친구들에게 대접하기도 한다. “과수원에서 사과, 배를 서리해서 친구들한테 주기도 했어요. 친구들은 망을 보고 제가 행동대장으로 나서서 따오곤 했죠.

주인에게 걸려서 맞기도 많이 맞았습니다. 지금은 다 추억이죠” 친구들을 잘 챙기는 그의 성품 때문인지 그는 17년째 동창회장을 맡아 일해오고 있다. 금마초등학교 40회 졸업생인 그는 지난해엔 금마면 명예면장에 취임해 고향 일에도 앞장서고 있다. 나서는 사람이 없어 자신이 맡게 됐다며 겸손하게 말하는 그다.

이 대표이사는 2001년 금마면민회가 만들어질 당시에는 섭외이사로 활동하며 사람들을 모았다. “형님들이 좋은 뜻으로 면민회를 만든다고 하셔서 저도 함께 하게 됐어요. 제가 막내이다 보니 주로 실무적인 부분이나 재정적인 부분을 맡아서 일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아 서운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그는 “내 마음에서 우러나서 하는 일이다보니 겉으로 생색내고 싶지 않다”며 “제가 할 도리만 다 하면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고향에 대한 사랑이 남다른 그는 3년 전인 2011년에는 회사 이름을 진우건설에서 고향인 금마면 월암리의 이름을 따 ‘월암건설’로 바꿨다. 월암건설은 인천시 남동구에 있는 회사로 주택건설사업을 하고 있다. 올해는 인천시 계양구 계산동, 서구 신구동, 화성시 남양동의 3곳에 아파트와 빌라를 지어 분양 중에 있다. 이 대표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서울에 올라와 건설업에 뛰어들어 목수일을 시작했다.

“공부를 잘 하는 것도 아니었고, 대학에 갈 형편도 되지 못했습니다. 성공하려면 기술을 배워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70년대 후반이었던 당시는 건설업계의 성장세가 두드러지던 때였어요. 건설 일을 하면 빨리 자립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스무살 의 어린 나이였던 당시에도 그는 성공과 자립에 대한 열망이 있었다.

“빈농의 집안에 장남으로 태어나 일찍 철이 들었던 것 같습니다” 일찍부터 목수 일을 시작한 그는 자기 일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대한민국에서 목수일로는 누구에게도 지고 싶지 않아요. 고건축부터 양건축, 한옥, 양옥 등 안 지어본 양식이 없습니다. 서울 삼성동에 있는 아셈타워에도 제 손길이 묻어있습니다” 자부심을 가지고 열심히 일한 덕인지 그는 스물여섯의 나이에 목수의 우두머리인 도목수가 됐다. 보통 도목수들이 40대의 나이였던 것을 감안하면 굉장히 이른 나이에 도목수의 자리에 오른 것이다.

도목수는 실력뿐만 아니라 통솔력이 있어야 하는 자리였다. 3년 동안 군대에 다녀오고 나서도 그는 도목수로 일했다. 제대 후 그는 회사를 차려야겠다는 구체적인 목표를 가지고 종잣돈을 만들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안 쓰고 절약하는 방법밖에 있나요. 비와도 일하고, 고생 많이 했습니다”

그렇게 그는 87년 5000만원의 종잣돈을 모아 집을 한 동, 두 동 지어 분양할 수 있게 됐다. 당시 방 한 칸에 부엌 딸린 집에서 셋방살이로 신혼생활을 시작한 그는 함께 고생해온 아내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했다. “집 지으면서 함께 일하는 일꾼들 밥을 챙겨줘야 하는데, 그 일을 아내가 다 했어요. 지금은 식당과 연계해서 식사문제를 해결하지만 그때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점심이며 새참이며 아내가 다 해다 날랐습니다. 지금 이렇게 어느 정도 잘 살게 된 데는 마누라 덕이 커요” 그는 과거 어려웠던 당시를 생각하며 연신 아내에게 고마움을 전했다. 30년 넘게 건설업계에서 일하고 있는 그의 경영철학을 물으니 그는 “거짓말 하지 않고, 성실하게 집 하자 없이 잘 짓는 것”이라고 말한다.

 

 

 

 


와우아파트 붕괴, 성수대교 붕괴 등 부실시공으로 인한 참사를 직접 눈으로 보고 겪은 그다. “집은 한 번 지으면 보통 적어도 10년에서 20~30년까지 가요. 오랜 세월을 견뎌야 하는 만큼 처음 지을 때부터 잘 지어야 합니다. 기업이 이윤을 많이 남기려고 철근을 빼먹곤 하는데, 저희는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기존 도면 설계보다 철근을 더 넣어서 튼튼하게 만들어요” 그래서 그런지 그가 지은 건물은 미분양 사태를 겪은 적이 없다고 한다. “이미 인천 쪽에서는 제 이름과 회사 이름만 대면 다 알아요. 오랜 시간 쌓아온 신뢰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의 회사는 어음을 남발하지 않는다. 그것이 IMF 위기를 넘긴 한 요인이 되기도 했다. “어음을 끊어서 사업을 하기 보다는 자체 자금으로 해결하려고 합니다. 지금도 어음을 잘 발행하지 않아요” 그가 어음을 선호하지 않는 이유는 본인이 어려움을 겪어봤기 때문이다. “어음을 받아놓고 회사가 부도나면 그대로 종이조각이 돼버리는 거예요. 크게 작게 저도 그런 일을 겪어봤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남한테는 그런 일이 없게 하고 싶어요” 이 대표는 수주공사보다는 땅 매입부터 분양까지 다 하는 자체사업을 주로 한다. 그러면서 그는 ‘집 짓기, 밥 짓기’라는 말을 강조한다. “봄에 씨나락(벼 종자)을 논에 뿌리는 일부터 추수하고 도정하고, 밥상에 밥 한 그릇을 올리기 위해 손이 한 두 번 가는 게 아니잖아요. 집 짓는 것도 똑같습니다.

그만큼 집 짓는 일은 하나부터 열까지 정성이 많이 들어갑니다” 자체사업을 하는 데는 입지 선정이 가장 중요하다. “입지 선정에 사업의 성패가 달립니다. 중소업체의 경우 입지선정에 실패하면 자칫하다 한 번에 무너질 수 있어요” 좋은 자리를 찾는 데는 그의 오랜 경험에서 나온 그만의 노하우가 있어 아직도 그는 직접 발로 뛰며 좋은 자리를 찾는다.

어느새 “내일 모레 환갑”의 나이가 됐다는 그는 5년 후쯤엔 은퇴하고 고향에 내려와 장학 사업을 벌일 생각을 하고 있다. “수신제가라고들 하는데, 자식들도 다 컸고 이제는 어느 정도 먹고 살만하게 됐습니다. 이제 저도 은퇴할 나이가 다 됐는데, 다른 데 돈 쓸 일 없이 재단을 세우고 장학 사업을 하고 싶어요. 은퇴 후엔 친구들, 고향사람들 있는 고향에 아예 내려올 생각입니다”
<이 기획취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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