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제서품 받은 한국의 첫 사제 김대건 신부 첫발 디딘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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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제서품 받은 한국의 첫 사제 김대건 신부 첫발 디딘 곳
  • 취재·한관우/사진·김경미
  • 승인 2014.10.23 1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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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홍주순교성지 성역화·관광자원화가 ‘답’

 

 

 

 

 

 

올해로 110주년을 맞은 전북 익산의 나바위 성당은 한옥의 전통양식과 특이한 회랑 등으로 국가지정문화재(사적 제318호)로 지정됐다.

전북 익산 나바위성지
전북 익산시 망성면 나바위길 화산리 금강가에는 나바위가 있다. ‘나바위’라는 이름은 이 지역에 있는 화산(華山)과 연관되어 있다. 우암 송시열은 이 산이 너무 아름답다고 해서 ‘화산’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산의 줄기가 끝나는 곳에 마당처럼 너른 바위가 펼쳐지는데, 이름 하여 나바위다.

오늘날 화산 위에 자리 잡고 있어 ‘화산 성당’으로 불리어 오다가 전북 완주군 화산면과 혼동을 피하고자 1989년부터 ‘나바위 성당’으로 부르고 있다. 나바위는 나암의 우리말 표기인데 너른 바위가 화산 정상에서 강가를 따라 남서쪽으로 널려 있어 생긴 마을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나바위 성당은 1897년 이곳에 주임으로 부임한 베르모렐 신부가 동학혁명 때 망해버린 김여산의 집을 1000냥 100푼을 주고 사들여 개조한 후 성당으로 사용했다.한국 초기 본당의 하나로 당시 풍속에 따라 남녀좌석을 칸막이로 막고 출입구도 따로 냈다. 나바위는 금강의 선착장이었다.

1845년(조선 헌종 11년) 10월 12일 밤, 한 청년이 배에서 내려 이곳에 발을 내디뎠다. 중국에서 사제서품을 받은 한국인 최초의 신부 김대건이었다. 그는 페레올 주교, 다블뤼 신부와 함께 작은 배 한 척에 몸을 실어 이곳에 신부로서 첫발을 내딛은 것이다.

그때 그의 발밑으로 금강의 거친 탁류가 넘실거리며 흘렀다. 마치 닥쳐올 고난을 예고하듯. 그가 나바위에 도착하기까지 여정 또한 파란만장했다. 1836년 12월 열다섯 살의 어린 나이로 고국을 떠나 다음해 6월 마카오에 도착한 그는 1844년 12월 부제품을 받고, 이듬해 1월 천신만고 끝에 홀몸으로 의주 변문의 수구문을 통해 그리던 고국 땅을 밟았다.

하지만 3개월 뒤 다시 11명의 한국인 신자들과 함께 라파엘호라는 작은 목선을 타고 떠나 6월 4일 상하이에 도착, 8월 12일 김가항 성당에서 페레올 주교에게 사제품을 받는다. 그리고 8월 31일 함께 간 조선인선원들과 두 외국인 신부인 페레올 주교, 다블뤼 신부와 함께 귀국길에 오른 것이다.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긴 가운데 지금의 강경에서 좀 떨어진 ‘황산포구 나바위 화산 언저리’에 닻을 내렸다. 나바위로 정박한 일을 페레올 주교는 “하느님의 섭리”라고 기록했다.

귀국 1년 만에 관헌에게 붙잡혀 순교함으로써 고국에서의 사목활동은 너무도 짧았지만, 그가 남긴 족적은 한국천주교사에서 가장 찬란한 자취다.
 전북 익산시 망성면 나바위길 화산리 금강가에는 나바위가 있다. ‘나바위’라는 이름은 이 지역에 있는 화산(華山)과 연관되어 있다. 우암 송시열은 이 산이 너무 아름답다고 해서 ‘화산’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산의 줄기가 끝나는 곳에 마당처럼 너른 바위가 펼쳐지는데, 이름 하여 나바위다. 오늘날 화산 위에 자리 잡고 있어 ‘화산 성당’으로 불리어 오다가 전북 완주군 화산면과 혼동을 피하고자 1989년부터 ‘나바위 성당’으로 부르고 있다. 나바위는 나암의 우리말 표기인데 너른 바위가 화산 정상에서 강가를 따라 남서쪽으로 널려 있어 생긴 마을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나바위 성당은 1897년 이곳에 주임으로 부임한 베르모렐 신부가 동학혁명 때 망해버린 김여산의 집을 1000냥 100푼을 주고 사들여 개조한 후 성당으로 사용했다.한국 초기 본당의 하나로 당시 풍속에 따라 남녀좌석을 칸막이로 막고 출입구도 따로 냈다. 나바위는 금강의 선착장이었다.1845년(조선 헌종 11년) 10월 12일 밤, 한 청년이 배에서 내려 이곳에 발을 내디뎠다. 중국에서 사제서품을 받은 한국인 최초의 신부 김대건이었다. 그는 페레올 주교, 다블뤼 신부와 함께 작은 배 한 척에 몸을 실어 이곳에 신부로서 첫발을 내딛은 것이다. 그때 그의 발밑으로 금강의 거친 탁류가 넘실거리며 흘렀다. 마치 닥쳐올 고난을 예고하듯. 그가 나바위에 도착하기까지 여정 또한 파란만장했다. 1836년 12월 열다섯 살의 어린 나이로 고국을 떠나 다음해 6월 마카오에 도착한 그는 1844년 12월 부제품을 받고, 이듬해 1월 천신만고 끝에 홀몸으로 의주 변문의 수구문을 통해 그리던 고국 땅을 밟았다. 하지만 3개월 뒤 다시 11명의 한국인 신자들과 함께 라파엘호라는 작은 목선을 타고 떠나 6월 4일 상하이에 도착, 8월 12일 김가항 성당에서 페레올 주교에게 사제품을 받는다. 그리고 8월 31일 함께 간 조선인선원들과 두 외국인 신부인 페레올 주교, 다블뤼 신부와 함께 귀국길에 오른 것이다.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긴 가운데 지금의 강경에서 좀 떨어진 ‘황산포구 나바위 화산 언저리’에 닻을 내렸다. 나바위로 정박한 일을 페레올 주교는 “하느님의 섭리”라고 기록했다. 귀국 1년 만에 관헌에게 붙잡혀 순교함으로써 고국에서의 사목활동은 너무도 짧았지만, 그가 남긴 족적은 한국천주교사에서 가장 찬란한 자취다.

 

 

 

 

 

 

나바위성당 내부에는 한국의 유교문화가 반영돼 남녀가 따로 미사를 볼 수 있도록 구분하는 칸막이 기둥이 세워져 있으며, 이는 지금까지도 지켜지고 있다.

김대건 신부 일행이 본래 상륙하려던 한강 길을 포기하고 제주를 거쳐 금강을 선택한 과정, 착륙지와 유숙지를 밝히는데 앞장 선 김진소 신부(전 호남교회사연구소장)는 “1845년 8월 31일 저녁 무렵 밀물을 이용 상해를 출발했다.

페레올 주교는 김대건 신부와 함께 타고 갈 작은 목선의 이름을 라파엘(Raphael)호라 명명했다. 배의 크기는 길이 25자, 너비 9자, 깊이 7자였고, 거기에 종선이 달렸다. 이들은 계절풍에 시달리며 표류하다가 9월 28일 배가 서울과는 정반대인 제주 앞 용수리 포구에 표착했다.

이곳에서 부서진 배를 수리하고 서울을 향해 출발했으나 산더미 같은 파도와 역풍, 급류, 암초에 부딪혔다. 배가 더 이상 항해가 어려워지자 목적지를 서울에서 강경으로 바꾸도록 결단을 내렸다. 당시 강경에는 신자들이 살고 있었고 선원 중에 강경의 지리와 신자들을 잘 아는 사람이 있었다.

하지만 일행과 라파엘호의 착륙지점에 대해 황상포에 정박했다고 하다가, 근자에는 나바위라고 했다가, 포구에서 약간 떨어진 곳이라 했다가, 더 구체적으로 나바위 화산 언저리를 지목하는 등 여러 설이 있다”고 소개하며 “여러 결과를 종합해 볼 때 착륙지는 나바위 화산 언저리라는 견해에 변함이 없고 유숙지는 옥녀봉 아래 현 강경읍 홍교리 100-1번지 구순오의 집이다.

따라서 교회의 일차적 활동은 사목이기 때문에 이곳은 나바위 못지 않게 중요한 사적지”라고 설명했다. 나바위 성당은 1897년 초대 본당 주임으로 부임한 베르모렐(장약슬 요셉) 신부가 1906년에 신축공사를 시작해 1907년에 완공했다.

설계는 명동성당을 설계한 프와넬 신부가 했고, 목수일은 중국인들이 했으며 건축양식은 한옥의 전통양식을 따랐다. 1916~7년에 흙벽은 양식벽돌로, 용마루 부분의 종탑은 헐고 성당입구는 벽돌조로 바꿨으며 고딕식 종탑을 세웠고 외부마루는 회랑으로 바꿨다.

한옥건물에 기와를 얹은 성당은 특이한 회랑 덕분에 한국적인 아름다움을 맛볼 수 있어 지방문화재(사적 제318호)로 지정됐다. 올해로 110주년을 맞는 나바위 성당은 일제강점기, 6·25를 거치면서 민족과 애환을 같이했다.

1907년 계명학교를 세워 1947년 폐교될 때까지 일제의 탄압 속에서도 애국계몽운동을 통한 구국에 앞장섰고, 신사참배에 저항하던 사제와 신자들이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6·25 당시에는 죽음을 무릅쓰고 성당을 지킨 사제 덕분에 단 며칠을 제외하고는 매일 미사가 봉헌된 기록도 갖고 있다.

나바위 성당은 1955년 김대건 신부의 시복 30주년을 맞아 화강암으로 만든 순교비를 세웠는데, 이는 김대건 신부 일행이 타고온 라파엘호의 크기를 본떠 만들었다고 한다. 1991년에는 피정의 집과 300여명의 인원을 수용할 수 있는 대건교육관을 건립했다.

피정의 집 앞과 뒤에는 6600㎡(2000평) 규모의 잔디광장과 수영장 등이 있어 야영장으로도 활용되고 있다. 나바위 성당 사도요한 주임신부는 “나바위 성지는 천주교 성지로서의 가치가 아주 뛰어난 곳”이라며

“지난 8월에는 교황님이 한국을 방문한다는 소식에 많은 신자 및 순례자들이 이곳을 찾았고, 직접 방명록에 기록을 남겨주는 순례자의 수만 해도 1년에 4만 여명은 족히 넘을 것”이라고 설명하고 “나바위 성당의

초대 주임 베르모렐 신부는 당시 지역의 유지 김두환·서재양·박익래·강인수·박준호 등과 함께 성당 안에 지금의 초등학교인 ‘계명소학교’를 설립, 운영한 점이 특징적이다. 이들은 학생들에게 ‘국가 대본은 교육

하는 것이고, 배우는 것이 힘’이라고 가르치며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등 민족정신을 일깨우는데 앞장섰다. 그러던 중 1924년 강경공립학교의 가톨릭 학생들이 신사참배를 거부 퇴학당한 사건이 발생했다.

 

 

 

 

 

나바위성지 표지석.

당시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신사참배 강요가 사회문제로 불거진 사건이었다. 이 사건으로 계명학교는 일제에 의해 강제 폐교됐다. 하지만 1929년 제5대 주임으로 부임한 이약슬 신부는 ‘계명학교’를 복교해 학생들을 다시 가르치고 계속해 신사참배를 거부했다.

1941년 신사참배를 거부한 김영호 신부는 일본 경찰에 체포돼 교도소에 수감됐다가 해방과 함께 석방되는 고초를 겪었다. 계명학교는 1947년 11월 재정난으로 폐교됐다. 또 1949년 간이진료소인 ‘시약소’를 설립, 1987년 폐쇄 때까지 40년 가까이 가난한 농민들의 건강을 돌봤다는데 큰 의미가 있다”고 밝혔다.

한편 나바위 성당은 천주교가 이 땅에 정착하면서 완전한 서양식 건축을 짓지 않고, 한국 전통적인 목조건축과 조화되도록 절충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성당내부로 들어가면 중앙통로 한가운데 당시 남녀칠세부동석의 한국의 유교문화를 반영해 남녀가 따로 미사를 볼 수 있도록 자리를 구분하는 칸막이 기둥이 세워져 있으며, 이는 현재까지도 지켜지고 있다.

한옥의 목조 빛깔과 서양 고딕양식의 위엄을 함께 담고 있는 나바위 성당의 창문 스텐드글라스는 한지에 그린 채색화 등이 잘 어우러진 동서양의 조화는 경이롭기까지 하다. 성당의 앞면은 고딕양식의 3층 수직종탑과 아치형 출입구로 꾸며져 있다.

건물 옆쪽으로 돌아서면 한국적인 미를 보여주는 전통목조 한옥형태의 지붕과 벽면, 서까래가 드러난다. 이렇듯 뾰족하고 직선적인 성당의 모습과도 전혀 어색하지 않게 어우러진 모습이다. 익산시 문화재담당자는 “익산은 우리나라 ‘4대종교의 성지’라는 독특한 매력을 지닌 도시다.

그 중에서도 우리나라의 최초의 사제인 김대건 신부가 첫발을 디딘 축복의 땅으로 ‘첫 마음의 성지’로 불리는 나바위 성당은 익산의 대표적인 천주교 명물”이라고 말했다.

 

<이 기획취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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