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짓손짓으로 호흡하며 전통방식 명맥 잇는 대장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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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짓손짓으로 호흡하며 전통방식 명맥 잇는 대장간
  • 한관우·장윤수 기자
  • 승인 2015.07.20 17:2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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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지는 전통기업 대를 잇는 사람에게 길을 묻다 <1>

홍성읍 홍성대장간 모무회 대장장

급격한 도시화와 산업화 진행으로 각 지역이 특색을 잃어버린 최근, 장인 정신이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일에 대한 투철한 사명감으로 자신의 일을 해 온 장인의 정신은 지역민에게 귀감이 될 뿐만 아니라, 주먹구구식으로 살아가는 청·장년들에게 도전 정신을 주고 있다. 또한, 일본이나 유럽에서는 가업을 수 백 년에 걸쳐 이어온 브랜드들이 명품으로 자리 잡고, 지역을 대표하는 가치로서 자리매김하고 있다.이에 우리 지역에서 오랜 기간 대를 이어온 장인들을 취재해 지역민들에게 자긍심을 고취시키고, 전문성을 갖춘 마인드를 심고자 한다. 또 현재 전통가업을 이어가는 후계자들에게 긍지와 자부심을 갖게 하고, 이들이 우대받고 존경받는 사회풍토를 조성시키고자 한다. 그 첫 번째로, 홍성대장간 모무회(69) 대장장을 만나봤다.

 

홍성대장간에서 판매하고 있는 각종 기구들.

 

모무회 대장장이 각종 기구를 만드는 무쇠를 살펴보는 모습.

충남무형문화재 제41호 대장장 기능보유자로 3대째 가업이어
어린 시절 아버지가 쇠메 내리치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해
쇳조각이 눈에 들어가는 등 어려움도 많지만 사명감으로 일해
“젊은이들도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할 수 있었으면” 

“아버지는 고덕에서 대장간을 하시다가 홍성으로 오셨죠. 대장간은 할아버지 대부터 3대째 이어온 가업입니다. 지금은 저희 아들까지 4대에 걸쳐 같은 일을 하고 있네요.” 모 대장장의 선친은 초등학교를 졸업하던 해부터 대장간 일을 시작했고, 모 대장장의 고모부와 함께 반평생이 넘도록 대장간 일을 했다. 기계나 설비가 전혀 없던 옛날에는 하얀 바지저고리를 입고 넓은 터에서 두 세 명이 쇠메로 무쇠를 내리쳤다. “어린 시절 쇠메로 쇠를 내리치는 모습이 얼마나 멋있었는지 모릅니다. 물론 옛날 방식은 정말 어렵지만, 그럼에도 그 때 아버지와 일꾼들의 모습이 아직도 제 뇌리에 남아있습니다.”

모 대장장도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줄곧 아버지를 도와 대장간 일을 하기 시작했다. 모 대장장이 아궁이에 불을 피워놓으면 아버지가 나와서 일을 했다. 이후 모 대장장이 서른 살이 넘어서부터 아버지는 대장간 일에서 손을 뗐고, 모 대장장은 본격적인 대장장이의 길을 걷게 됐다. 모 대장장은 “아버지는 가르치실 땐 정말로 엄격하셨어요. 거의 매일 농기구를 잘 못 만든다며 얻어맞는 게 일상”이었다고 말했다. “한참 대장간이 잘 될 때는 장날이면 가게 앞에 너도 나도 호미를 들고 와 줄을 서곤 했죠. 점심 먹을 시간도 없어서 해가 지고 난 뒤에 허기져 밥을 먹으려면 너무 힘들어 들어가지도 않던 날이 일상이었습니다.” 모 대장장은 “그래도 젊었을 땐 속옷이 땀범벅이 되도록 일을 해도 자고 일어나면 괜찮았다”면서 “요즘은 일이 많지도 않지만 하고 나면 힘에 부칠 때도 있다”며 쓴웃음을 지었다.

 

모무회 대장장(사진 왼쪽)이 후계자인 아들이 작업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여러 농기구를 만들기 위해서는 재료가 되는 무쇠가 필요한데, 모 대장장은 자동차 부품인 스프링만을 가져다 사용했다. 예전에는 스프링이 많아 마음대로 가져다 쓰기도 했는데, 최근에는 중국으로 수출되는 통에 쇠를 구하기도 쉽지 않은 형편이라고. 또, 모 대장장은 젊은 시절 철을 때리는 기계가 필요해 아버지께 부탁했지만, 5남매를 키우기 빠듯했던 아버지는 기계를 사주지 않았고, 한참 후에 친목회를 통해 기계를 선물 받기도 했다. “옛날 사람들은 기술이 참 좋았습니다. 기계나 설비 없이 손만으로 쇠를 단련시키고 날을 갈고, 자루를 끼워 기구를 만들었습니다. 도치며 돌쩌귀며 낫, 호미 등을 만들어 일렬로 한 판 씩 만들어 놓으면 장 날 하루 새 몽땅 팔리는 건 일도 아니었죠.” 하지만 최근에는 중국산이 많아 모 대장장의 대장간도 어려움을 겪고 있다. “요즘에는 사람들이 호미고 뭐고 죄다 중국산을 사다 쓰니 경기가 좋지 않습니다. 그래도 꾸준히 우리 대장간을 찾아주는 분들이 있어 고맙죠. 중국산이 싸긴 하지만, 아직 우리 품질을 따라오진 못합니다. 한두 번 사용하면 망가지기도 부지기수고요. 또 최근에는 저희가 만드는 기구들을 중국으로 가져가 똑같이 만들어와 파는 사람들도 있어 어려움이 큽니다.”

현재 모 대장장은 충남무형문화재 제41호로 대장장 기능보유자로, 무형문화재 선정 당시의 일화도 공개했다. “충남도에서 10명이 오고, 군에서 5명이 와서 평가를 했습니다. 그런데 100% 사람 손으로만 기구를 만들어야 한다더라고요. 기계를 사용하며 만들면 그나마 빠르게 만들 수 있지만, 정말 전통 방식만으로 만들려면 굉장히 더딥니다. 그렇게 자루까지 모두 맞춰 자귀 2개를 만들고 나서야 무형문화재로 등록됐습니다.”
모 대장장은 “현재 무형문화재들이 모이는 모임이 있는데 회원 수가 56명 정도 된다”면서 “각자 기능을 가진 이들이 모이니 어찌나 재밌는지 모르고 앞으로도 계속 모임이 활성화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모무회 대장장이 칼을 다듬고 있는 모습.

모 대장장에게 좋은 날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대장장이의 힘들고 어려운 순간들을 털어놨다. “하기 싫고 꾀가 나지 않는 날이 왜 없었겠습니까. 빨갛게 쇠를 달구면 그 열기에 아무리 좋은 옷을 입어도 다 타고 그을려 소용이 없습니다. 게다가 쇠를 절단하다가 쇳덩어리가 한쪽 눈에 튀어 들어가 지금도 한쪽 눈이 붉습니다. 다치는 것도 일상이죠. 쇳가루며 돌가루가 얼굴에 튀니 매번 일을 마치고 빼내는 것도 이제는 익숙합니다.” 모 대장장은 “할 수 있는 일이 이것뿐이기도 하지만, 내가 해야만 하는 일이라는 사명감을 느끼기에 지금까지 해 올 수 있었던 것 같다”면서 “젊은 사람들은 힘든 일을 피하고 어렵게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 책임을 다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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