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홍주일보사 홍주신문이 광복 70주년을 맞아 한국독립운동사와 홍주의병사를 연구하는데 소중한 사료가 될 독립운동가이자 홍주의병으로 활동한 이근주(李根周, 철종 11년 1860~융희4년 1910. 10. 25)열사의 행적 등을 기록한 ‘청광자실기(淸狂子實記)’ 등 수십 여종의 관련 자료를 이 열사 사후 105년만에 발굴 최초로 공개한다.

홍주의병 이근주 일가 사료 ‘청광자실기’ 등 최초로 발굴 공개
독립운동사·홍주의병사 연구, 일제 강제징용자 발굴 주요 사료
고암 이응로 화백 조카 이강세 씨 소장 수집분 등 수 십 종 달해
이근주·봉로·인세 3부자 독립운동·홍주의병 활동, 민족 혼 실천
이 사료들은 한국독립운동사와 홍주의병사 등과 관련한 역사적 사실이 비교적 상세히 기록돼 있으며, 각종 사료를 통해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과 홍주의병의 전개과정, 홍성지역에서 강제로 징용된 사람들을 찾고 발굴할 수 있는 근거가 될 수 있는 주요 사료들로 역사적·사료적 가치가 중요한 것으로 판단되는 만큼 최초로 공개하면서 이와 관련된 자료들에 대한 추가제보를 기대하고 있다. 이 관련 자료들은 고암 이응로 화백의 조카이며, 이근주 열사의 손자인 도예가 이강세(70·경기도 광주시 거주)씨가 소장한 자료와 그동안 수집한 자료들로 한국독립운동사와 홍주의병사를 연구하는데 소중한 사료적 가치가 있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홍주출신의 이근주(李根周) 열사는 을미년 민비시해사건이 발생하고 단발령이 내려지면서 김복한, 안병찬, 이설 등과 창의할 것을 모의하는 등 독립운동과 의병활동을 도모하였고, 아들인 봉로(李鳳魯)는 육군상무사 활동을 하면서 독립자금을 마련했다. 손자인 인세(李仁世, 이강세의 형)는 당시 대전공업대학을 다니던 중 일본군에 의해 강제로 징용돼 중국 남경에서 광복군에 가입하기 위해 징용을 탈출, 광복군주둔지로 가던 중 병사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는 광복 이후 살아서 고향에 돌아온 당시의 징용자들에 의한 증언에서 확인됐다고 전한다. 당시 홍성에서 강제징용 된 대학생은 12명이었는데, 이인세를 비롯해 경희대 미대학장을 지냈던 서양화가 최덕휴, 또 당시 서문밖에 살았던 이름이 확실치 않지만 아들이 법조계에 근무한 것으로 알려진 윤병규(?) 등 12명이었다고 한다. 이인세 등과 함께 일제에 의해 강제 징용됐던 최덕휴 화백은 1922년 홍성에서 태어나 동경제국미술학교 재학 당시 일본군에 배속돼 만주에 주둔하다가 탈출, 1945년 광복군으로 재입대해 항일전에 참전했던 독립운동가였고, 6·25 한국전쟁에도 참전했으며, 이후 경희대에서 후학을 양성하며 미술교육자로 여생을 보내다가 1998년 세상을 떠났다.
이근주는 1895년 을미사변 후 홍주를 중심으로 김복한, 이설, 송창식, 송병찬, 임한주 등과 주축이 되어 홍주에서 의병을 일으켜 활동하다가 1910년(융희 4) 8월 일제가 우리나라를 병탄하여 나라가 망하자 망국의 슬픔에 통분을 이기지 못하여 부친의 묘 앞에 제상을 차려놓고 소나무에 기댄 채 목과 옆구리 가슴을 찔러 자결했다. 이근주 열사의 손자인 이강세 씨는 “할아버지께서 자결하시던 날, ‘산소에 가려하니 과도를 준비하라고 한 뒤에 의연히 떠나셨다’고만 들었다”고 회상하고 ‘이날 천둥소리와 함게 엄청나게 폭우가 쏟아졌다’고 뒤에 전해 들었다고 전했다. 이후 일제로부터 탄압을 받으면서 “압수해간 기록물을 돌려달라고 홍성경찰서에 탄원을 했지만 소용이 없었고, 살고 있던 중계리의 집마저도 일본인에게 빼앗겼다. 아버지는 고향을 등지고 타향살이(장곡으로 이사)를 할 수 밖에 없었다”고 전하면서 “내가 홍성중학교 2학년 때 농업담당 선생님이 저를 보고 ‘열사의 손자’라고 불러 주셨던 당시의 감격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고 회상했다.

1920년 12월에 간행된 ‘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에서 이 책의 저자인 박은식(1859~1925)은 자결한 사람들에 대해 “동복의 송완명, 태인의 김천술·김영세, 익산의 정동식, 선산의 허 모, 문의의 이 모, 충주의 박 모, 공주의 조장하, 연산의 이학순, 전의의 오강표, 태인의 김영상, 홍주(洪州)의 이근주(李根周) 등 28명이었다. 이외에 죽은 사람들도 전해지는 이야기는 있으나 그 이름은 알 수가 없다. 대체로 이들은 목매어 죽기도 하고, 배를 갈라 죽기도 하였으며, 혹은 물에 몸을 던졌으며, 단식으로 굶어 죽기도 하였고, 혹은 독약을 마시고 죽었다. 그들은 다른 족속의 종노릇을 하지 않고 몸을 더럽히지 않아 저절로 결백함을 빛낸 사람들이다. 그런즉, 살아서 대한사람, 죽어서도 대한의 귀신이 되기에 부끄러움이 없는 사람들이다.”라고 기록하고 있어 당시의 독립운동가나 의병들의 자결에 대한 내용과 방법을 비교적 구체적으로 묘사해 기록하고 있다. 박은식 선생은 ‘의병정신이 곧 민족정신이요, 민족 혼’이라고 강조하곤 했다.
정부는 이근주(李根周) 열사의 충절·충의정신을 기리어 1963년 대통령 표창을,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2015년 광복 70주년을 맞이한 지금,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 자발적으로 조국을 구하려 목숨을 던지며 앞장섰던 독립운동가와 의병들의 정신과 역사적 의의를 되새기고, 이들의 애국애족정신을 계승, 발전시켜 국가발전의 원동력으로 삼아야 할 때이다. 홍주신문은 이러한 정신을 실천하기 위한 일환으로 이근주·봉로·인세 등 3부자의 독립운동과 홍주의병 활동상 등을 발굴한 자료를 중심으로 연재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