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의 꼬리인 호랑이 이름을 되찾은 곳 ‘호미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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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의 꼬리인 호랑이 이름을 되찾은 곳 ‘호미곶’
  • 한관우 발행인
  • 승인 2015.08.13 1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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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70주년 기획-일제에 빼앗긴 고유지명 되찾기
지명역사 1000년 홍주 고유지명 되찾자

 

포항시가 2000년을 앞두고 새로운 세기의 인류 화합을 기원하고자 만든 상생(相生)의 손이라는 조형물과 호미곶등대.

단조로운 동해안 해안선이 포항 어귀에서 거대한 만과 곶을 형성하는데, 움푹 들어간 곳은 영일만이고, 불쑥 튀어나온 곳은 호미곶이라 한다. 호미곶(虎尾串; 호랑이 꼬리 상징)의 지명변천사는 우리나라 대표적인 국토지리사이자 지역향토사라 할만하다. 원래 생김새가 말갈기와 같다하여 장기곶으로 불린 이곳은 일제강점기 때 일본식 표현인 장기갑으로 불리다가 1995년 장기곶으로 바뀌었고, 2001년 호미곶으로 변경되었다. 아직도 호미곶을 우리 국토의 토끼 꼬리라고 일컫곤 하는데, 이것은 일제가 남긴 대단히 잘못된 인식의 소산이다. 일본인 지리학자 고토 분지로(小藤文次郞)가 택리지 등의 일부 내용을 빌미로 이탈리아는 외형이 장화와 같고, 조선은 토끼가 서 있는 형국이라며, 장기갑은 토끼 꼬리에 해당한다고 해 한민족을 열등한 존재로 왜곡시키기 위한 술수였던 것이다.

 

대동여지도, 영일-장기부근 호미곶의 해안선이 현실과 부합하게 그려졌는데 지명을 동을배곶이라 적었다.

포항시 남구 대보면 대보리 ‘장기곶’ 명칭 ‘호미곶’으로 공식 변경
일제가 1918년 장기갑으로 바꾸면서 토끼꼬리로 비하해 낮춰 불러
연해주 향해 발톱세운 채 포효하는 위풍당당한 호랑이모습 한반도
주왕산 1~3폭포, 용추폭포, 절구폭포, 용연폭포로 고유지명 되찾아

 

호미곶으로 바뀌기 전에 제작된 대보면가 비석이 호미곶으로 바뀌면서 ‘대보’라는 글자를 지운 흔적이 보인다.

호미곶은 경북 포항시 구룡포읍 대보면에 위치하고 있다. 실제로 남한 내륙 중 가장 동쪽에 있는 것은 포항의 석병리지만 일반적으로 호미곶을 동쪽의 끝이라 하며 ‘해맞이 공원’을 조성했다. 이곳엔 새해 첫날이 되면 해맞이를 보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찾는다. 새해 일출을 보며 새로운 다짐을 하는 ‘해맞이 광장’에는 ‘상생의 손’과 ‘새 천년의 불씨’, ‘연오랑 세오녀 상’, ‘풍력 풍차’ 등이 있어 평소에도 볼거리들이 많다. 바로 옆에는 ‘국립등대박물관’도 있다. 16세기 조선 명종 때 풍수지리학자인 남사고(南師古)는 ‘동해산수비록(東海山水秘錄)’에서 “한반도는 백두산 호랑이가 앞발로 연해주를 할퀴는 형상이며 백두산은 호랑이 코, 호미곶은 호랑이 꼬리에 해당된다”고 했다. 호랑이는 질주할 때 꼬리의 힘으로 균형을 유지하고 무리를 지휘한다고 한다. 그래서 한반도의 꼬리에 위치해 있는 호미곶에 대한 국민의 관심은 남다르다고 한다. 일제 강점기 때는 호미곶(虎尾串)을 토끼꼬리로 비하한 장기갑(長寅岬)이라 불려지다가 80여 년 만에 호미곶이란 제 이름을 찾아 정식 명칭으로 바꾼 것이다.

한반도의 꼬리인 호랑이 이름을 되찾은 곳이다. 한반도의 꼬리 부분인 경북 포항시 남구 대보면 대보리 ‘장기곶’ 명칭이 ‘호미곶’으로 공식 변경됐기 때문이다. 본래 ‘곶’은 바다 쪽으로 길게 내민 부리 모양의 육지를 일컫는다. 국립지리원은 경상북도지명위원회가 장기곶을 호미곶으로 변경해 달라는 신청을 받아들여 지난 2001년 12월 29일 지명을 변경하기로 의결해 바뀌게 됐다. 포항시 관계자에 따르면 “영일만에서 열리는 호미곶 해맞이 축전 등 일상적으로는 호미곶이 널리 알려졌는데도 공식 지명은 장기곶으로 돼 있어 혼란스러워 지명 변경을 요청해 바꿨다”고 밝혔다. 호미곶은 조선 철종 때 고산자 김정호(古山子 金正浩)의 대동여지도에는 ‘동을배곶(冬乙背串)’으로 표기돼 있으나 일제가 1918년 장기갑으로 바꾸면서 토끼 꼬리로 낮춰 불렀다. 정부가 광복 50주년을 맞아 지난 1995년 일본식 표기를 바꾼다는 취지에서 장기곶으로 변경했던 지명을 주민들의 힘으로 본래의 고유지명인 ‘호미곶’을 되찾은 것이다.

 

호미곶호랑이상.

한반도가 토끼 모습을 닮았다는 말은 일제가 퍼뜨렸다. 1905년 조선통감부가 고토 분지로라는 지리학자의 ‘산맥체계론’을 교과서에 실으면서 조선인을 나약한 민족으로 깎아내리려고 한반도 모양을 연약한 토끼에 비유했던 것이다.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은 이에 정면으로 맞섰다. 그는 여암(旅庵) 신경준(申景濬)의 ‘백두대간’을 원용해 산맥체계론을 비판하고 연해주를 향해 발톱을 세운 채 포효하는 위풍당당한 호랑이로 한반도를 그렸다. 이른바 ‘맹호형국론’이다. 우리 국토를 호랑이에 비유한 이는 육당에 앞서 조선 명종조 풍수학자인 남사고(南師古)가 처음이다. 그의 ‘산수비경’에 보면 한반도를 앞발을 치켜든 호랑이 형상으로 기술하고 있다. 그 중에 백두산은 코에 해당하며 운제산맥 동쪽 끝인 호미곶은 꼬리 부분으로 천하의 명당이라고 했다. 꼬리 부분을 국운이 상승하는 명당으로 친 것은 호랑이는 꼬리를 축으로 삼아 달리며 꼬리로 무리를 지휘한다고 봤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일제가 이곳에 쇠말뚝을 박아 우리 정기를 끊으려 했던 것도 그와 무관하지 않을 터이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연오랑 세오녀’ 설화도 바로 여기를 무대로 하고 있다. 호미곶에 살던 연오랑 부부가 바위를 타고 일본으로 가버리자 해와 달이 빛을 잃었다. 이에 신라에선 일본으로 사신을 보냈고 세오녀가 손수 짠 비단을 받아와 제사를 지내자 빛을 되찾았다는 줄거리다. 그러고 보면 이곳은 예로부터 해와 달이 가장 먼저 뜨는 곳으로 여겨져 온 것 같다. 조선말 김정호(金正浩)도 영일만 지역을 일곱 차례나 답사한 끝에 대동여지도에 호미곶을 한반도 동쪽 끝으로 표기했다지 않은가. 우리나라 지도를 펼쳤을 때 영일만 옆으로 불쑥 튀어나온 끝 부분이 호미곶이다. 새해 첫날이면 이곳은 전국에서 일출을 보려고 몰려든 사람들로 북적댄다. 육당이 백두산 천지, 변산 낙조 등과 함께 조선십경으로 꼽았을 정도로 호미곶 일출은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호미곶마을 주민 하민주 씨는 “이곳에서 태어나 지금까지도 살고 있는데, 이 마을 청년들이 중심이 돼서 장기곶으로 표기되어 오던 이곳의 정식 지명을 호미곶으로 되돌린 것은 참으로 잘된 일이라는 것이 이곳 주민들의 한결같은 반응”이라고 전하고 “이 마을에는 하·최·양씨가 주를 이루는데 해마다 10월이 되면 할배들의 제사를 지내죠. 제가 하씨인데 하씨 할배는 임진왜란 때 이곳으로 피난 와서 낙향 1대조가 되었죠. 저곳이 할배들 비석”이라며 소나무 밑의 비석들을 가리켰다. 그는 “중요한 것은 일제가 1918년 이름을 바꾼 지 83년 만에 본래의 고유지명을 되찾게 됐다는 것이죠. 그동안에도 장기곶보다 호미곶으로 더 알려지긴 했지만 마을의 청년들과 주민들의 의식이 하나가 돼 정식으로 지명을 바꾼 일은 정말로 각별한 의미가 있다”고 설명했다.

한편 경상북도 청송군 주왕산국립공원 안에 있는 주왕산 제1폭포는 ‘용추폭포’로, 주왕산 제2폭포는 ‘절구폭포’로, 주왕산 제3폭포는 ‘용연폭포’로바꿔 옛 지명을 되찾았다. 경상북도 지명위원회가 심의·의결해 변경된 지명은 국가지명위원회의 심의·의결을 거쳐 고시된 후 국가 기본도 및 각종 포털 사이트, 지리부도, 관광안내도 등에 공식지명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와 관련 경북도 관계자는 “주왕산국립공원 내에 있는 폭포의 일제 지명 잔재를 청산하고 우리 고유의 지명을 복원함으로써 민족의 자존심 회복과 주왕산 국립공원의 위상을 높이는 한편 대중 매체 등 홍보를 통해 관광객들에게 고유지명을 알리는 시너지 효과를 얻고 있다”고 밝혔다. 옛 고유지명을 되찾는 일이 지역의 정체성을 살리는 측면과 지역을 알리고 홍보하는 측면에서도 고유지명이나 옛 지명을 찾아 활용하는 방안이 중요하다는 실증을 보여 주는 사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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