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에서 출발하는 내포지역 천주교 공소 탐험〈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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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에서 출발하는 내포지역 천주교 공소 탐험〈7〉
  • 김경미 기자
  • 승인 2015.09.24 1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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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교지역 최초의 순교자, 인언민 마르티노
▲ 주례 공소가 있던 곳에 현재는 복자 인언민 마르티노 사적지로 단장되었다.

삽교 배나드리 교우촌, 주례 공소가 있던 곳

역사의 흐름 속에 드러난 신앙의 증언과 기억들은 공소를 지속적으로 성숙한 신앙공동체로 거듭나게 해 주는 요소로 작용했다. 배나드리는 예산군 삽교읍 북쪽 용동 3리 삽교천 가에 섬처럼 생긴 마을로 도리(島里)라고도 부르는 곳이다. 홍수가 나면 사면이 물바다가 되어 배를 타고 건너 다녔으므로 ‘배나드리’라 하였다고 한다. 이곳은 삽교에서 아주 가까운 곳(1.3km)이지만 삽교천으로 인해 물이 불어나면 배를 타고서야 드나들 수 있는 곳이었으므로 비밀리 신앙을 지키기에 적당한 마을이었으리라 추정할 수 있다. 명칭 또한 바로 이런 지형적 위치에서 연유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1817년 10월 이곳에도 밀고자의 소행으로 여겨지는 박해의 손길이 뻗쳐 해미의 포졸들이 나타나 신자들을 모두 체포했다. 체포되어 간 신자는 20~30명가량인데 대부분은 배교하여 석방되었으며, 민첨지 베드로와 형수 안나, 송첨지 요셉, 손연욱 요셉, 민숙간 등은 혹독한 형벌에도 불구하고 신앙을 지키다가 옥사로 순교하였다. 그리고 손연욱의 부친 손여심은 오랫동안 해미 옥에 갇혀 있다가 10년 뒤인 1827년에 병으로 사망하였다. 그 후 1880년대 초까지도 신자가 한 집도 없었으니 아마도 배교하여 석방된 신자들은 다른 지방으로 이주하였을 것이라 추정되며 또한 그때의 상황이 얼마나 참혹하고 철저하였나를 짐작케 한다.

배나드리의 박해가 공식적인 박해가 아니었으므로 이곳 순교자들의 행적에 대하여도 분명하게 알려지고 있지 않다. 다만 이들 중 민첨지는 결성(結城) 출신으로 목천 소학골(지금의 천안시 북면 납안리)에서 살다가 배나드리로 이주하였고, 손연욱은 홍주출신인 점으로 미루어 볼 때, 배나드리는 박해를 피해 다니던 신자들이 모여 이룩한 교우촌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삽교본당 30년사 참조).

인언민 순교자 기념비는 덕산에서 삽교로 가다가 삽교 충의대교 진입 직전에 고덕, 면천방향619번 도로를 약 4km가면 용동2리 버스정류장 앞에 용동성결교회 푯말이 보인다. 그곳에 ‘순교자 인언민 마르티노 사적지 300m’ 안내표지석 우측 교회 방향으로 들어서면 교회 바로 지나서 순교자 인언민과 무명 순교자 기념비가 나온다. 이곳은 용동리 2구 중용마을(예산군 삽교읍 용동5길 23-1, 용동리 산 10-12)이다. 이곳 배나드리는 인언민 순교자기념비(삽교읍 용동리 중용)를 제외하고 특별히 성지나 사적지로 조성된 것이 없어 마을을 찾는데 어려움이 있으나 용동성결교회와 붙어 있다.
 

▲ 순교자 사적지를 알려주는 도로 입구의 표지석.

배나드리마을도 현재는 배나다리라고 불리는데, 삽교천주교회에서 붙인 환영현수막이 순례객을 맞고 있을 뿐이다. 삽교성당 관할구역인 이곳은 본래 예산 본당 관할의 주례 공소 강당이 있던 곳이었다. 1967년 예산 본당에서 삽교 본당이 분가되면서 공소가 폐지되고 강당이 헐리게 되자 공주에서 체포되어 해미에서 순교한 인언민(印彦敏, 1737~1800) 마르티노 순교자를 기념하는 사적지로 조성했다. 삽교읍 용동리에는 상용과 하용마을이 있는데, 신자들은 주로 하용에 살고 있었다고 한다. 하용에는 주례 공소의 강당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이곳 신자들이 여러 차례 논의를 거쳐 이곳을 사적지로 만들기로 합의를 했던 것은 공소 자체가 오래되었을 뿐만 아니라 용동리는 2014년 8월 16일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복자품에 오른 인언민 마르티노 순교자의 고향이기 때문이다.

김안젤라 해설사는 “인언민 마르티노는 삽교지역 최초의 순교자시죠. 충청도 덕산 주래(지금의 예산군 삽교읍 용동리)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셨는데 온순하면서도 꿋꿋한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고 합니다. 또 어려서부터 학문에 정진하여 상당한 학식도 쌓게 되었는데, 어느 날 평소에 알고 지내던 황사영(黃嗣永, 1775~1801, 알렉시오)을 만나면서 천주교 신앙을 접하게 되었고, 그로부터 교리를 배운 뒤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신주를 단지에 넣어 삽교천에 던져 버리고 한양으로 올라가 주문모(周文謨, 1752~1801, 야고보)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았습니다. 세례를 받은 후에는 내포지방을 중심으로 전교 활동을 하였고, 빈민 구제에 자기의 재산을 모두 바쳐 인근 주민들로부터 존경을 받으셨다.”는 설명이다.

1797년에 시작된 정사박해가 한창 진행되던 어느 날, 마르티노는 공주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다. 청주로 이송되어 심한 고문을 당하였으며, 감사의 명에 따라 다시 그의 고향을 관할하던 해미관장 앞으로 이송되었다. 인언민 마르티노는 청주에서 받은 형벌로 인해 걸을 수조차 없었다. 그러므로 청주에서 해미까지 가는 동안 조정 관리들이 이동할 때 사용하는 말을 타고 가야만 하였다. 해미 옥에서 마르티노는 젊은 이보현(李步玄, 1773~1800, 프란치스코)을 동료로 만나게 되었다. 이후 그들은 언제나 서로를 권면하였고, 갖은 형벌과 문초와 유혹 아래서도 변함없이 신앙을 고백하였다. 

그러자 관장은 어쩔 수 없다는 판단 아래, ‘인언민도 이보현과 같이 때려죽이라.’는 명령을 내렸다. 형리들은 그를 옥에서 끌어내어 매질을 가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그중의 하나가 엄청나게 큰 돌을 들어 그의 가슴을 여러 번 내리쳤다. 이내 그의 턱이 떨어져 나가고 가슴뼈는 부서지고 말았다. 결국 마르티노는 이러한 형벌로 인해 죽음에 이르게 되었으니, 그때가 1800년 1월 9일(음 799년 12월 15일)이다. 당시 그의 나이는 63세였다. 마지막으로 매질을 당하는 동안에도 그는 여러 차례 다음과 같이 되뇌었다. “그렇고말고, 나는 기쁜 마음으로 내 목숨을 천주께 바치는 거야.”

현재 배나드리교우촌에는 성지라고 감을 잡을만한 표시가 하나도 없다. 다만 그곳에서 조금 더 들어가면 성결교회 표지판이 나오는데, 그 교회 앞에 안내판과 표지석, 순교자 기념비가 세워져 있고, 말끔하게 단장됐을 뿐이다. 안내문에는 이곳은 옛날 공소 자리였다고 적혀 있다.

 


복자 인언민 마르티노 (1737∼1800년)

충청도 덕산 용머리(현 충남 예산군 삽교읍 용동리1구 주래)의 교동 인씨 양반 집안에서 1737년에 태어난 인언민(印彦敏) 마르티노는 온순하면서도 꿋꿋한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또 어려서부터 학문에 정진하여 상당한 학식도 쌓게 되었는데, 평소 친분이 있었던 양반이었던 황사영(알렉시오)을 만나면서 천주교 신앙을 접하게 되었고, 그로부터 교리를 배운 뒤 맏아들을 데리고 한양으로 올라가 주문모(야고보)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그는 장남 요셉을 신부 곁에 남겨두었으며,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위해 집과 모든 재산을 버리고 공주로 이주해 생활하였다. 1797년에 시작된 정사박해 때 공주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옥으로 끌려갔다. 청주로 이송되어 심한 고문을 당하고 다시 형집행을 위해 그의 고향을 관할하던 해미진영으로 이송되었다. 그는 해미 옥에서 젊은 이보현(프란치스코)을 동료로 만나 언제나 서로를 권면하였다.

그러자 그를 옥에서 끌어내 매질을 가하기 시작다가 그중의 하나가 엄청나게 큰 돌을 들어 그의 가슴을 여러 번 내리쳐 죽임을 당했다. ‘인언민도 이보현과 같이 돌로 내리쳐 죽이라’는 형을 받았던 것이다. 그는 턱이 떨어져 나가고 가슴뼈가 부러져 나가는 순간에도 “그렇고말고, 나는 기쁜 마음으로 내 목숨을 천주께 바치는 거야”라고 여러 번 되 뇌이며 자신의 신앙을 증거하였다.

이러한 형벌로 인해 죽음에 이르게 되었고, 그때가 1800년 1월 9일(음력 1799년 12월 15일) 순교하였으니, 당시 그의 나이는 63세였다. 2014년 8월 16일 프란치스코 교황의 집전으로 서울 광화문에서 열린 한국천주교 124위 복자 시복 미사에서 복자(福者)로 시복(諡福)되었다.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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