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에서 출발하는 내포지역 천주교 공소 탐험〈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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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에서 출발하는 내포지역 천주교 공소 탐험〈8〉
  • 김경미 기자
  • 승인 2015.09.24 1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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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들의 압송로 한티고개 너머 대곡리 공소
▲ 서산시 해미면 대곡1리 778번지 근처의 대곡리 공소. 공소 앞에는 성모상이 있고, 공소는 현재 비어있다.

해미성지에서 빼놓을 수 없는 성지의 한 곳으로 ‘한티고개’를 꼽는다. 이 한티고개는 당시 죽음의 길로 악명 높던 순교자들의 압송로로 달레의 ‘한국 천주교회사’에도 그 기록이 나온다. 예산군 덕산면과 서산시 해미면을 가르는 가야산의 끝자락에 자리 잡은 한티고개는 교우들이 무리지어 살던 면천의 황무실 마을과 덕산의 용머리 마을, 삽교의 배나드리 마을 등지에서 집단으로 체포된 천주교 신자들을 해미 군졸들이 압송하여 넘던 고개이다.

한티고개를 넘어 붙잡혀 가던 숱한 순교자들이 고개 마루터에서 고향 마을을 마지막으로 뒤돌아보던 곳에는 주막이 있었다는데 지금은 흔적도 없다. 이름 없는 수많은 신자들이 포졸들에 이끌려 거친 숨을 몰아쉬며 순교의 마지막 길을 떠났을 것을 생각하니 저절로 마음이 숙연해 진다.

해미는 일찍이 천주교가 전파된 내포 지방의 여러 고을 가운데서 유일하게 진영이 있던 군사 요충지였다. 1418년에 병영이 설치되었고, 1491년에 석성이 완공된 해미진영(사적 116호)은 1790년대로부터 100년 동안 천주교 신자들을 무려 3000명이나 국사범으로 처결한 곳이다.

이곳 한티고개는 1790년부터 1880까지 내포지방에서 주님을 배교하기보다는 기꺼이 죽음을 택한 수많은 무명 순교자들이 매질과 압박 속에서도 해미로 끌려가면서 주님의 영광을 노래하며 넘던 고개이다. 1790년대에 순교한 박취득(라우렌시오)을 비롯한 순교자들은 1870년대에까지 수십 명이 이름을 남겨놓고 있지만 그 외의 수천 명의 이름은 그들의 목숨과 함께 사라져 버렸다. 해미의 땅은 이렇게 알 수 없는 수많은 순교자들이 쓰러져 갔다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1799년에 이보현과 수많은 신자들이 순교하였고, 1814년에는 김대건 신부의 증조부인 김진후(비오)가 10년 옥고 후 옥사하였으며, 충청도 지방의 대대적 박해 시기였던 1815(을해)년과 1827(정해)년 기간 동안에는 손여옥 등 수많은 신자들이 집단으로 체포되어 순교하였다. 주로 면천, 덕산, 예산 등지에서 살던 천주교 신자들의 마을을 해미진영 군졸들이 수시로 급습하고 재산을 약탈한 후 신자들을 체포하여 한티고개를 끌려 넘어가 해미 진영 서문 밖 사형장에서 처형하였다.

체포된 신자들 가운데에 신분을 고려하여야 할 사람들(양반층)은 상급 치소인 홍주, 공주, 서울로 이송되었으며, 대부분의 보잘것없는 사람들은 심리 절차(기록) 없이 해미에서 처형되어, 글자 그대로 무명 신자들이 수천 명 순교한 곳이 해미 땅이다. 1866(병인)년 이후 몇 년 간의 대 박해 동안에만 순교한 숫자를 1000여 명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1790년대부터 희생된 순교자가 3000여 명으로 추정된다. 이름이 알려진 순교자는 박취득(라우렌시오)등 수십 명 뿐이다.

한티고개를 올라가는 길은 두 곳이 있다. 해미 성지를 돌아보고 덕산방향으로 갈 때는 서해안고속도로 밑을 지나 산수저수지와 한서대학교 입구를 지나 언덕길을 오르다 보면 대곡리 마을이 있고 이를지나 조금 오르면 오른쪽에 유성주유소가 보이고 이를지나 약 100m 오르면 왼쪽에 대왕석재가 있다. 여기가 한티고개 입구이다. 입구에 ‘한티고개-순교자 압송로, 1km’푯말이 있다. 다소 가파르긴 하지만 약 30분 오르면 고개 정상이다. 덕산 쪽에서 오르는 길은 덕산읍내에서 해미방면으로 가다가 오른쪽에 계곡장 2층 건물이 보이고 이를 막 지나면 오른쪽 입구에 ‘한티고개-순교자 압송로, 2km’ 푯말이 보인다. 푯말 옆에는 남원양씨 효행비가 길가에 보인다. 고갯길에 설치되어 있는 십자가의 길은 고개 정상에 1처가 시작되어 해미 방면으로 14처가 설치되어 있다.

한티고개는 한국 천주교 순교사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곳이다. 박해시대 청양, 대흥, 덕산, 홍산, 예산, 홍주지역의 천주교 신자들이 체포되어 해미로 압송될 때 반드시 거쳐야 했던 곳이기 때문이다. 한티 고개는 그 옛날 천주교 신앙의 전파로였고, 오페르트의 남연군묘 굴총 사건 때 왕래한 통로였으며, 순교의 길이요, 교우촌 재건의 길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한티공소는 다른 공소에 비하여 그 변화의 추이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이는 한티공소가 여러 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우선 한티 고개의 해미방향과 덕산방향의 양쪽 모두에 한티공소가 있었다. 또한 해미 쪽에 위치한 한티의 경우 1901년 신자 수가 증가하자 좀 더 아래쪽에 한티공소를 신설하고, 윗 한티공소와 아래 한티공소라고 하였다. 게다가 이 공소들은 때때로 송뜸과 벌뜸이라는 다른 이름으로 부르기도 하였으며, 윗 한티, 아래 한티, 송뜸, 벌뜸 등을 혼용하기도 하였다. 공소가 분리, 독립하기 전까지는 신자 수가 190여 명에 이르렀다고 전한다.

해미 쪽의 한티공소(지금의 해미면 대곡리 1구)는 밭농사를 주로 하는 전형적인 화전민 마을로 출발하였다. 교회 측 기록에 때때로 나타나는 ‘벌뜸공소’와 ‘대곡공소’는 바로 이 한티공소, 지금의 ‘대곡리 공소’의 다른 이름이다. 또 이와 함께 기록되고 있는 ‘송뜸공소’(아래 한티, 대곡리 2구)는 이곳 한티에서 해미 쪽으로 1km 남짓 더 가서 고개가 끝나는 지점에 위치했는데, 해방 이전에 이미 신자들이 다른 곳으로 이주해 버렸다고 한다.

한티마을은 비록 1893년에서야 합덕 본당의 퀴를리에(Curlier, 南一良, 1863~1935, 레오) 신부에 의해 정식 공소로 설정되었지만, 교우촌은 이미 그 이전에 형성되어 있었다. 현지 교우들의 구전에 의하면 적어도 1870년대에는 신자들이 이곳에 살기 시작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교우촌의 초창기에 한티에서는 김씨, 황씨, 박 씨 등의 집안이 같이 교우촌을 일구었다고 전한다. 그 후 이들 집안에 자손이 번창 하고, 다른 교우들이 이곳으로 이주하면서 신자 수가 크게 늘기 시작하였다.

해미 쪽 대곡리(한티)공소의 초대 공소 회장은 최 씨였고, 제2대 공소 회장은 김인제 안드레아였다. 황규천 마태오 회장의 회고에 따르면 이들이 공소 설립 때부터 일제시대까지 공소를 이끌어 나갔다고 한다. 이후 한티공소의 회장은 김 씨 집안에서 맡게 되었다. 특히 제2대 김인제(김동석 회장의 부친) 회장 때, 즉 1943년에는 신자들이 힘을 합하여 마을 중앙에 공소 강당을 건립하였다고 한다. 이것이 지금까지 내려오는 ‘대곡리 공소(한티공소)’인데, 김기덕 라우렌시오 회장이 공소 옆의 사가에서 살면서 돌보아 오던 중 1990년 중반에 신자 수의 감소로 폐쇄되었다.

그동안 대곡리 공소는 합덕 본당 퀴를리에 신부, 결성(수곡) 본당의 폴리 신부(1909년)와 라리보 신부(1914년), 금학리(서산) 본당의 안학만 신부(1917년)와 폴리신부(1919년), 멜리장 신부(1921년)의 사목을 받다가 1985년부터 해미 본당 소속이 되었으나 1990년 중반에 신자수의 감소로 폐쇄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현재 신자는 10여 세대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1990년대 말 이후로는 신부의 공소 방문이 없다. 신자들은 해미성당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현재 대곡리 공소(한티공소)는 공소로서의 기능을 상실하게 되었고, 공소 강당도 사용되지 않고 있으며 폐쇄 당시 그대로 남아 있다. 변화라면 대곡리 공소의 슬레이트 지붕이 언젠가 함석기와 지붕으로 교체된 채 그대로 비어있다. 대곡마을에는 현재 신자는 10여 세대 정도로 파악되고 있으나 중요한 것은 ‘신부 3명, 수녀 8명을 배출한 성소의 마을’임에는 분명하다.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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