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에서 출발하는 내포지역 천주교 공소 탐험〈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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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에서 출발하는 내포지역 천주교 공소 탐험〈18〉
  • 조현옥 전문기자·김경미 기자
  • 승인 2015.11.19 1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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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기 굽던 전형적인 천주교마을, 당진 면천 구룡리공소

 

▲ 당진시 면천면 구룡리공소.

교리교육·수계생활 힘쓴 성소의 고장 구룡리·사근절교우촌
사근절교우촌 1901년 퀴를리에 신부를 맞아 정식 공소 형성
1909년 합덕본당 크렘프 신부 시절 대화리공소 이름 나타나
구룡리공소 3명의 신부 탄생, 수도자들 배출한 성소의 고장

당진시 면천면사무소 소재지에서 당진 방향으로 4.5km에 있는 사기소를 지나 구룡 3거리 직전에 평안마을 표지판에서 우회전하여 500m쯤 마을 쪽으로 들어가면 당진시 당진읍 구룡리 371번지 마을의 남향언덕에 구룡리 공소가 자리하고 있다. 

당진 구룡리와 사근절 교우촌은 박해 후 형성된 교우촌으로 신자 자녀들의 신심 교육에 특히 힘쓴 교우촌이다. 강습소도 설립하여 자녀들의 교리 교육에도 힘썼으며 세 명의 목자와 여러 수도자들을 탄생시킨 성소의 고장이었다. 옹기를 굽는 데 필요한 점토가 부족해 다른 곳으로 이전하기도 하였다. 구룡리 공소는 본래 대화리 공소라고 불렸다. 행정 구역이 분명하기 전에는 이웃의 대화리(혹은 대활)와 한 마을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이곳 구룡리에 교우촌이 형성되기 시작한 것은 군난이 끝난 뒤 지금으로부터 120여 년 전이었다. 그때 박해를 피해 이리저리 떠돌다가 한 신자가 처음 이곳에 정착했다고 한다. 처음에는 조그만 교우촌으로 출발했지만, 곧 제법 큰 교우촌이 되었다고 전한다. 옹기점이 잘되자 이웃에 있는 신자들이 몰려오고, 외교인들도 옹기점 덕을 보았다고 한다. 옹기공장은 이 일대 교인들의 중요한 생업이기도 했지만 교인이 아닌 사람들도 일자리를 찾아와 이들에게 교화되곤 했다고 한다. 말하자면 이때가 공소의 전성기였던 것이다.

구룡리에 공소가 언제 부터 세워졌는지 분명치 않으나 기록에 의하면 1909년 합덕본당의 제3대 주임 크렘프 신부 시절 대화리 공소 이름이 나타나 있다. 이곳에서 남쪽, 즉 서산시 운산면 쪽으로 1.5km쯤 가다가 왼편에 있는 사근절 교우촌(지금의 당진시 구룡리)도 일찍부터 이루어졌던 것으로 나타난다. 이 마을의 이름은 그 뒷산에 낡은 절이 있었다는 데서 유래되었는데, 이곳은 이미 1901년에 퀴를리에(Curlier, 南一良, 1863~1935, 레오) 신부를 맞이함으로써 정식으로 공소가 형성되었다. 처음 이곳의 신자 수는 54명이었는데, 다음 해에는 79명으로 증가하였고, 대화리 공소의 이름이 나타나는 1909년에는 123명의 신자가 있던 것으로 나타난다.

이렇게 볼 때 구룡리의 교우촌은 일찍 형성되었지만 그 공소 설립 시기는 좀 늦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아마 이곳의 신자들은 공소 설립 이전에는 사근절 공소를 다녔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대화리 옹기마을에 신자들이 늘어나고, 또 수계생활도 열심히 하는 공소로 인식되면서 이 공소는 점차 주목을 받게 되었다. 처음 공소로 설정되었을 때 이곳 공소 회장은 심 회장이었다. 심 회장이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지방으로 이주함에 따라 전치삼 바오로가 제2대 회장을 맡게 되었는데, 전 회장 재임기간 동안에 자신의 옹기점 옆에 한옥으로 10칸 정도의 공소 강당을 건립하였다. 신자는 110여명이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1915년 합덕 본당의 라리보 신부가 방문하여 성사를 행하였다.

당시 297명이 영성체를 받은 것으로 보아 인근 공소 신자도 함께 참여 한 것으로 판단된다. 구룡리 공소 신자들은 자녀들의 교리 교육에 온갖 힘을 쏟았다. 뿐만 아니라 제7대 페랭(Perrin, 白文弼, 1885~1950, 필립보) 신부 재임 시기, 즉 1923년 전치삼 회장 때 강습소(학교)를 강당에 설립했다. 당시 교사는 합덕의 매괴학교를 졸업한 젊은 교우였고, 학생은 33명(28명은 신자)이었다. 구룡리 공소에서는 3명의 신부가 탄생 하였는데, 전용구 회장의 아우인 전용선(사도 요한)신부, 이춘식의 아들인 이상룡(필립보)신부, 이철우의 아들인 이상호(세자 요한)신부가 그들이다. 또 이곳에서는 이들 외에도 여러 수도자들을 배출하였으니, 바로 이곳이 성소의 고장이었다.

본래는 합덕성당 소속이었으나 지금은 당진본당 소속으로 되어 있다. 1992년부터 본당으로 미사를 드리러 가기에 이곳에서는 예절을 드리지 않고 있다. 대전교구 소속인 당진본당은 당진시 당진읍 읍내리 507에 자리하고 있다.

1970년대에 당시 대전교구 소속인 합덕본당(合德本堂)은 당진군 내의 10개 공소를 관할하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 당진면 구룡리 공소가 신자 수 170여 명으로 가장 큰 공소였다. 1939년 5월 교구 사제피정이 끝난 후 당진은 합덕본당 관할에서 분리되었고, 당시 금사리에서 전교하던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프로망투(Emile Fromentoux, 包萬壽) 신부가 초대(1939~1940년) 본당주임으로 부임함으로써 당진본당이 설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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