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에서 출발하는 내포지역 천주교 공소 탐험〈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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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에서 출발하는 내포지역 천주교 공소 탐험〈16〉
  • 조현옥 전문기자/김경미 기자
  • 승인 2015.11.12 1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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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배출한 박해시대 교우촌, 신례원 성당의 뿌리 간양리공소
▲ 간양리본당터, 공소건물은 헐려 흔적도 없고 십자가만이 옛 공소터임을 알려주고 있다.

1962년 간양리공소 신례원 창소리로 옮겨져 신례원본당
간양리·수철리, 6·25 때 공산당(빨치산)세력 활발했던 곳
간양리공소, 패랭신부 보고서 영세문답교육 잘하는 공소


1962년 간양리공소 신례원 창소리로 옮겨져 신례원본당간양리·수철리, 6·25 때 공산당(빨치산)세력 활발했던 곳간양리공소, 패랭신부 보고서 영세문답교육 잘하는 공소간양골은 ‘병인박해 순교자증언록’에 보면 순교자 김동, 박 회장, 신여석 등을 배출한 박해시대 교우촌이 형성되었던 곳이다. 아늑한 산골짜기면서도 가까운 신례원 창말포구(浦口)를 통해 무한천, 삽교천의 수로(水路) 교통과 연결되고, 산길을 통해 충청도 내륙과 연결되었던 위치적 조건 때문에 훗날 내포지역에 초대 본당이 건립되었던 곳이기도 하다.

다른 지역에 비해 비교적 순교자가 적었던 이유는 포졸들이 들이닥치더라도 재빨리 사방으로 피신할 수 있는 지리적 여건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으로 추측된다. 간양리 본당터는 신례원 창말 포구(浦口)를 통해 무한천, 삽교천의 수로(水路) 교통과 연결되고, 고개 넘어 수철리(드른리)와 소통하면서 산길을 통해 충청도 내륙과 연결되는 위치이다.

1861년 제4대 조선교구장 베르뇌(Berneux, 張敬一) 주교가 조선교구 전체를 구분한 8개의 본당 구역 중 5개가 충청도에 있었으며 2개는 내포에 있었는데, 다블뤼 주교가 관할한 홍주(洪州)를 중심으로 한 ‘상내포 본당’과 랑드르 신부가 관할한 충청도 서부지역의 ‘하내포 본당’이었다. 간양리는 ‘상내포 본당’에 속했던 교우촌이었다. 그러나 내포의 두 본당은 1866~1871년에 몰아닥친 병인박해로 인해 풍비박산 나서 해체되고 말았다.

1886년 프랑스와의 수교로 선교의 자유를 획득한 천주교회는 1890년 신앙의 중심지 내포지방에 두 개의 본당을 설립한다. 블랑 주교의 사망으로 임시 교구장을 맡게 된 코스트(Coste, 高宜善, 1842~1896) 신부는 20명의 선교사 중 1889년 6월 21일에 입국한 퀴클리에(Curlier, 南一良, 1863~1935) 신부를 양촌(陽村, 현재 예산군 고덕면 상궁리) 본당 주임 신부로, 같은 해 10월 3일에 입국한 파스키에(Pasquier, 朱若瑟, 1866~?) 신부를 간양골(당시 신창현 소속, 현재 예산군 예산읍 간양리) 본당 주임 신부로 임명하였다.

당시 간양골 본당의 관할 구역은 신창, 온양, 아산 공세리, 천안, 풍세, 보산원, 직산, 목천, 진천, 백곡, 안성, 평택, 안중 등 충청도 북동부와 경기도 남부 지역이었다. 파스키에 신부는 1890년 4월에 간양골에 도착하여 5년간 몸에 큰 병이 들만큼 열정적인 사목활동을 펼쳤다. 그러나 1894년에 몰아닥친 ‘동학농민혁명’으로 인해 내포교회는 큰 타격을 받게 된다.

퀴클리에 신부와 파스키에 신부는 교구장 뮈텔 주교의 명에 따라 같이 서울로 피신하였는데, 파스키에 신부는 병이 깊어져서 본국 프랑스로 귀환 치료를 허락받고 귀국하였다. 이로써 간양골 본당은 설립된 지 5년 만에 폐지되어 양촌 본당으로 흡수되고 말았다. 간양골 본당은 양촌(1898년 양촌에서 합덕으로 본당 위치 옮김) 본당의 공소가 되었다.

한때 본당이었던 간양골 공소 시대(1894~1949)는 이후에도 주변의 다른 공소들과 더불어 순교 신앙의 전통을 간직한 채 충실한 신앙의 보금자리 역할을 하였다. 1922년 페랭 신부의 연말보고서에는 ‘두곡리, 수철리, 봉소리, 구룡리와 더불어 간양리공소가 아이들의 영세 문답교육을 잘 하고 있는 공소’로 나온다. 1928년 예산본당 초대 구천우 신부의 연말보고서에도 ‘대치리와 간양리의 교우들은 그들이 모두 법대로 수계한다는 점에서 지시에 대한 순명에 있어서 다른 공소들보다 아주 낫다’고 적고 있다. 이때는 대개 수철리의 신자들이 고개를 넘어 간양리공소로 와서 예절이나 미사를 드렸다.

이렇게 충실한 신앙이 보금자리였던 간양리공소가 폐지된 것은 해방 후 1950년에 터진 한국전쟁(6·25) 때문이었다. 해방 후 간양리와 인근 도고의 신유리(느랭이), 대술 궐곡리(고새울) 등지에는 공산당 활동을 했던 사람들이 많았다. 그래서 간양리와 수철리는 한국전쟁 때 공산당(빨치산) 세력의 게릴라 활동이 활발하였던 곳이어서 간양리 공소 건물은 이들의 은신처 역할을 하여, 군경의 공격 목표가 되기도 하였고 미군기의 폭격도 당했던 곳이었다. 간양리공소 건물은 점점 파괴되어 결국 폐허가 되고 말았다고 한다.

이후 간양골 입구 마을에 사는 신자들 집에서 예절이나 미사를 드리면서 간양리 공소의 명맥을 이어갔으나, 점차 공소 신앙의 중심지는 수철리 공소로 옮겨졌다. 이리하여 간양리 공소는 점점 약화되다가 1962년에 공소 자체가 신례원 창소리로 옮겨졌고, 1977년 신례원 본당으로 승격되어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그러므로 신례원 본당의 뿌리는 간양리 본당(공소)인 것이다. 

자문=한성준 향토사학자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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