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잔재 청산 위해 우리의 옛 고유지명 되찾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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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잔재 청산 위해 우리의 옛 고유지명 되찾아야
  • 글=한관우/자료·사진=한기원 기자
  • 승인 2015.11.26 1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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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70주년 기획-일제에 빼앗긴 고유지명 되찾기
지명역사 1000년 홍주 고유지명 되찾자

 

▲ 창지개명의 대표적인 사례는 왕(王)이 들어가는 지명을 일본의 왕을 뜻하는 ‘왕(旺, 日+王)’으로 바꾸어 표기했다.


일제, 5000년 내려온 지명역사 ‘행정구역 정리’허울로 갈아엎어
땅이름은 언어와 마찬가지 민족의 얼을 묶는 중요 무형적 재산
충북·강원·경북·경남 1995년 이후 지명되찾기 가장 적극적 추진
정부, 전국토의 지명·도로명 변경 고유의 땅이름 말살정책 비난

지명은 땅 이름이다. 사람에게 인명이 있듯이 땅에도 지명이 있다. 인명이 사람의 뿌리라면 지명은 인명을 낳은 땅의 뿌리다. 지명학(地名學)에서 지명은 ‘사람을 제외한 모든 자연과 삼라만상의 이름’이라고 정의했다. 우리를 둘러싼 향토 역사문화가 집대성된 기록이라 할 수 있다. 즉 사람을 둘러싼 지리적, 역사적, 민속학적, 유전자적 특성과 흔적이 지명 속에 살아 숨 쉬는 것이다. 그러나 많은 지명이 형태를 알 수 없을 정도로 변질되거나 멸실됐다. 산업화 과정에서 혁명적 변화가 수반됐지만 40년에 불과한 식민시대에 벌어진 지명 훼손과 왜곡은 뼈저렸다. 일제는 단군 이래 5000년 내려온 우리의 지명역사를 갈아엎었다. 지명에 담긴 사람과 자연의 역사를 모두 처참하리만큼 짓밟았던 것이다.

한국땅이름학회 조사에 따르면 서울의 중심 8개 구의 법정동 명칭 중 3분의1이 그때 일그러졌다. 종로구 지명의 3분의2가 난도질당했다. 광복 후 빼앗겼던 사람의 이름은 되찾았으면서도 비틀린 땅이름은 바로잡지 못했다. 그나마 남은 지명은 유래를 잃고 방황하고 있는 현실이다. 우리의 고유지명은 크게 보아 두 번이나 왜곡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첫 번째는 신라 35대 경덕왕16(757)년에 우리의 문물제도를 당나라 식으로 개편했을 때이고, 두 번째는 일제가 우리의 말과 글을 송두리째 없애고 사람이름과 지명을 일본식으로 고쳤을 때이다.

최근 무엇보다 안타까운 것은 행정안전부가 전 국토의 지명과 도로명을 변경했다. 우리의 시골마을과 이름 하나 하나에도 모두 문화유산의 등재 가치가 있는 우리 고유의 땅이름이 또 한 번 묻히고 세계화라는 이름으로 외국의 주소 체계를 따라가고 있다. 고유지명의 도로명화는 우편번호 변경과 함께 또 한 번의 실패한 정책이며 민족문화와 역사의 말살정책이라고 비난하는 이유다.

일제 잔재 지명 청산에 대한 의견은 매우 다양하지만 가장 중요한 핵심은 무엇보다 올바른 역사의식과 역사적 사명감이다. 일제에 의한 지명 개편은 대상으로 볼 때 행정지명과 일반지명(자연지명)으로 구분하여 살펴볼 수 있다. 그중 행정지명은 1910년 경술국치 이전까지의 개편과 1913년 총독부에 의한 도와 부·군의 명칭, 그리고 이에 근거하여 1914년에 도 단위로 이루어진 각도의 도령 고시로서 읍·면과 정·리·동(町·里·洞)의 명칭이 있다. 그리고 면이 읍으로 승격되면 리·동을 정(町)으로 바꾸는 왜식지명으로서의 산발적인 개편작업도 계속되었다. 이와 함께 자연지명(산, 고개, 자연부락, 섬, 강, 못 등)도 많이 개편되었는데, 이는 획일적으로 이루어 졌으며, 체계적인 방법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므로 원래의 지명을 살리지 못하고 편의적으로 진행되었다.

일본은 우리 땅의 땅이름을 바꾸어 나갈 때 ‘행정구역 정리’라는 허울 좋은 이유를 붙였다. 행정구역이 달라졌으니, 지역 명칭도 달라져야 한다는 것이 지명 변경의 이유였다. 그러나 그것은 한낱 구실일 뿐이다. 행정구역을 변경하더라도 이름을 바꾸지 않고 남길 수 있는 방법은 얼마쯤이라도 있었다. 땅이름은 언어와 마찬가지로 그 민족의 얼을 묶는 중요한 무형적 재산이다. 따라서 일제는 어떤 방법으로라도 이 땅에 남아 있는 땅이름을 퇴색시켜서 우리의 민족정신을 말살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이것은 일본이 식민지시대에 황국신민화(皇國臣民化)정책의 하나로 창씨개명(創氏改名)을 단행한 것과 같이 창지개명(創地改名)도 그 맥을 같이한다. 일제잔재 청산을 위해서라도 우리의 옛 고유지명을 찾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일제에 빼앗긴 고유지명을 되찾은 대표적인 지역으로 충청북도를 꼽을 수 있다. 충북 보은군의 경우는 최근 백두대간 정기 회복을 위해 속리산 말티재 정상부분을 2017년까지 터널로 연결, 복원한다는 계획을 밝혔다. 고려 태조 왕건이 닦은 어로(御路)로 전해지고 있는 충북 보은의 속리산 말티재 정상 부분을 단절 90여년 만에 복원한다는 것이다. 이 길은 일제강점기 때 도로공사를 이유로 끊었던 길이다. 보은군은 오는 2017년까지 58억900만원을 들여 장안면 장재·갈목리 말티재 정상부(해발 430m)의 훼손된 자연생태계를 복원할 계획이라고 한다. 이번 사업은 산림청에서 추진하는 백두대간 마루금 복원사업의 일환으로 추진되는데, 마루금 복원사업은 일제 때 끊어진 이 구간을 친환경 터널로 연결해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고 등산로와 야생동물의 이동통로를 조성하는 사업이다. 마루금은 ‘능선의 선’이라는 뜻이다. 말티재는 보은군 장안면 장재리와 갈목리를 연결하는 고개로 속리산을 오르기 위한 첫 고개다. 고려 태조 왕건은 속리산에서 불경을 읽다 할아버지의 유적을 찾기 위해 속리산 능선을 따라 말티재 길을 닦았다고 전해진다. 이후 조선시대에는 세조가 지병을 치료하기 위해 속리산 법주사를 찾을 때 진흙으로 된 말티재 길에 얇은 돌을 놓아 정비한 뒤 속리산을 올랐다는 일화도 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인 1924년 당시 친일파 충북도지사가 말티재에 도로를 건설하면서 말티재를 가로지르는 도로가 생겼고, 산능선을 따라 내려오던 옛 말티재 길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됐다. 보은군은 끊어진 말티재에 길이 100m, 폭 10m의 터널을 설치해 도로로 인해 단절된 속리산 산능선을 다시 잇는다는 계획이다. 일제 때 끊긴 속리산 줄기가 91년 만에 다시 이어지는 셈이다. 2012년에는 충북 괴산과 경북 문경을 잇는 이화령을 복원했다.

한편 전국적으로 지명되찾기와 관련해서는 충청북도를 비롯해 강원도, 경상남북도 등이 지난 1995년 이후 고유지명 되찾기에 가장 적극적이었던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충청북도의 경우 2000년 이후 20여 곳의 읍·면·동의 명칭이 바뀐 것으로 나타났다. 이 중에 ‘일제 잔재’와 ‘좋지 않은 어감’이 있는 행정구역 명칭을 주민들이 의견을 모아 지역 특색에 맞는 고유 명칭으로 바꾼 곳이 상당수다. 충청남도의 지명되찾기와는 대조를 이루고 있다.

지난해인 2014년 2월 1일부터 충북 충주시 가금면의 행정구역 명칭이 중앙탑면으로 변경됐다. ‘가금면’은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가흥면’과 ‘금천면’의 첫 글자를 따 만들어졌다. 그러나 날짐승이라는 이미지를 줄 수 있고, 인접한 ‘금가면’과 혼동을 일으켜 주민들의 명칭 변경 요구가 꾸준히 제기돼 왔다. 따라서 지난 2013년 9월 면내에 살고 있는 주민을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에서 87.9%가 ‘중앙탑면’으로 명칭 변경을 원했다. ‘중앙탑면’은 중원문화의 중심지인 이 지역에 있는 국보 6호인 중앙탑(가금면 탑평리 7층 석탑)을 활용한 지명이다. 충주시는 2005년 상모면을 수안보면으로, 2012년 이류면을 대소원면으로 변경했다.
충청북도에서는 지난 2005년 상모면이 ‘수안보면’으로 개명한 것을 시작으로 △보은군 내속리면을 속리산면(2000년)으로 △보은군 외속리면을 장안면(2007년)으로 △보은군 회북면을 회인면(2007년)으로 △충주시 이류면을 대소원면(2012년)으로 각각 개명했다. 그 결과 △온천의 이미지가 살아났다(수안보면) △속리산이 지닌 청정의 이미지를 일거에 확보했다(속리산면) △동학의 마지막 취회지라는 역사성을 회복했다(장안면) 등의 평가를 받고 있다. 이밖에도 회인면은 조선시대 현(縣)의 역사성을 회복함은 물론 이웃 회남, 내북면과의 각종 혼란성이 해소됐다는 소리를 듣고 있다. 충주시 이류면은 ‘대소원면’으로의 개명으로 ‘잘 해도 이류’라는 주위의 놀림을 더 이상 듣지 않고,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는 것이 주민들의 설명이다.
1000년의 역사와 문화를 지닌 홍성의 옛 고유지명 홍주(洪州), 특히 전국의 목사고을 중 유일하게 본래의 고유지명인 ‘홍주(洪州)’라는 지명을 되찾지 못하고 있는 홍성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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