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시절을 아시나요?
1960년대 서민의 삶 속으로!
상태바
그때 그 시절을 아시나요?
1960년대 서민의 삶 속으로!
  • 이은주 기자
  • 승인 2015.12.24 10:5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신경순 할머니 가계부로 살펴보는 50년 전 홍성 물가 동향

쌀 1말 300원·연탄 1장 7원·두부 1모 20원
3일 동안 품 팔아 쌀 한말 값 겨우 벌어1965년 남편봉급 인상과 함께
물가도 덩달아 올라 한달 생활비 2000~3000원 녹록치 않은 서민 삶

신경순(76) 할머니의 50여년 전 빛바랜 가계부의 첫머리는 남편 봉급 3847원으로 시작된다. 1963년 남편을 만나 시집오면서 당시 친구들은 장롱이며 옷을 몇 벌 씩 해갔지만 신 할머니는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친정아버지가 애지중지 기르던 송아지 한 마리를 팔아 장만해준 이불한 채와 큰 형부가 마련해준 이불 한 채가 혼수 전부였다. 신 할머니는 시집 올 당시 주변 지인들이 결혼 축하선물 목록도 빠짐없이 기록하고 있다. 당시에는 축의금 대신 축하선물로 대신한 듯 했다. 누비이불, 나무 한 마차, 놋대야, 놋그릇, 구리무(?), 갑사 치마, 나이롱 버선 등 당시 싯가 200원에서 많게는 3000원까지 종류도 다양하다.

1960년대, 서민들은 3일 동안 품을 팔아야만 쌀 한말 값을 벌 수 있던 보릿고개 시절, 신 할머니의 가계부에선 그 시절 대한민국 서민 가구의 물가 변천사를 한눈에 들여다 볼 수 있다. 신 할머니가 쓴 1964년도 가계부를 보면 당시 경찰 공무원이었던 남편의 봉급은 3840원이며 방세는 월세로 한 칸에 300원이었으며 쌀 1말에 300원, 연탄 1장에 7원, 두부 1모 20원으로 적혀있어 당시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게 했다. 또한, 64년 2월 어느날에는 소고기 반근 40원, 돼지고기 반근 30원, 빨래비누 3장 60원을 지출한 것으로 되어있다. 2015년 11월 말 기준 홍성군의 물가현황은 쌀 한말에 2만3500원, 연탄 1장에 200원, 두부 1모 1000원, 소고기(등심) 반근 18,000원, 돼지고기(생삼겹) 반근 4,500원, 빨래비누 1장 1000원으로 물가상승 폭이 수치로 계산이 안 될 정도이다. 1960년대 역경과 고난의 시대를 살아온 당시 어르신들은 평당 650원이었던 지가가 65만원으로 평균 1000배정도 올랐다고 증언한다.
 

▲ 신경순할머니의 1960년대 가계부.

1965년 2월 남편 봉급이 4015원으로 올랐지만 물가도 덩달아 함께 올랐다. 64년도에 연탄 50장 385원이었지만 65년도에는 400원으로, 30원이었던 돼지고기 반근은 60원으로, 빨래비누 1장에 20원이었던 것이 비누 1장에 40원으로 두배 나 올랐다. 물가가 크게 올랐으나 살림규모나 질은 다소 나아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65년 10월 갈치 두 마리 값 30원과 돼지고기 값 60원을 외상한 걸 보면 당시 서민들의 삶이 녹록치 않았음을 가늠할 수 있게 했다. 신 할머니의 외상 값은 남편의 봉급 날에 맞춰 바로 갚은 것을 보면 나름 가계부를 쓰면서 수입과 지출에 대한 계획을 꼼꼼히 세운 듯 하다. 신 할머니의 일일 지출을 보면 평균적으로 쌀과 연탄을 구입할 때를 제외하고 200원을 넘기지 않는다. 간혹 집에 아버님이 오실 때면 고기와 담배 값으로 추가 비용이 지출돼 200원을 초과하기도 했지만 아버님은 어김없이 쌈짓돈을 꺼내 주시곤 했다.

신 할머니의 한달 생활비는 평균 2000원에서 3000원으로 빠듯한 가정경제 속에 저축까지 한 것을 보면 억척과 절제를 견디며 산 세월이 느껴진다. 이로 인해 신 할머니는 1979년도에는 알뜰 주부상을, 1986년에는 저축추진중앙회 주최 가계부기록 체험담 공모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했다.

서민의 생활상 오롯이 담겨있는 53년간의 가계부
보릿고개 시절 3남매 알뜰히 키울 수 있었던 힘
힘겨운 삶 속, 꾸준한 저축… 셋방살이 12년 만에 집장만

1964년 1월 14일 남편의 직장을 따라 시댁 천안시 성환에서 홍성으로 이사 온 신 할머니는 작은 방 1칸을 얻어 소꿉장난 같은 살림을 시작했다. 신 할머니는 “목돈이 없어 월세 방만 찾아다니며 살자니 좁고 작은 방에 가구라도 들여놓고 싶어도 여름이면 숨이 막히는 것 같고 겨울이면 갓난아기를 아랫목에 재우면 밤 늦게 순찰 돌고 돌아온 남편은 편히 발 뻗고 쉴 곳도 없어 새우잠을 자야만 했다”고 회상한다.

처음에는 열심히 근무하며 꼬박꼬박 생활비를 가져다 주는 남편에게 보여주기 위해 쓰기 시작한 가계부가 올해로 53년 째, 당시 서점에서 가계부가 500원 이었던 시절 비싼 가격에 구입은 못하고 옛날 국민학생들이 쓰던 공책에 가계부를 적기 시작해 온 것이 요즘의 가계부까지 총 53권에 이르고 있다. 이와 함께 신 할머니는 남편이 봉급을 가져올 때마다 한번도 거르지 않고 저축을 했다. 봉급 3840원 받을 때는 300원을, 5665원을 받을 때는 1300원씩 저축을 했다. 신 할머니는 1968년 남편 봉급이 1만530원으로 오르면서 4640원 씩 적금을 불입하면서 가장 어렵고 힘들게 살았다고 한다. 70년대 들어서 남편의 경찰복 낡은 것을 뜯어서 아이들 바지 만들어 입히고 내복은 장날 시장에 가서  싼걸로 구입해 다 헤질 때까지 몇 번 씩 기워 입힌 적도 있다. 한번은 명절 때 사준 큰 아들 옷 1벌을 나중에 뒤집어서 딸아이 바지 두 개를 만들어 입혔더니 너무도 좋아하는 딸을 보며 눈시울을 붉힌 적도 있단다.
 

어느 해 겨울에는 첫 아이를 낳고도 셋방이 너무 추어 아궁이 앞에서 한기를 면했던 적도 있었다.
살림을 시작한 지 21년 동안 열 두 번이나 이사를 한 신 씨는 티끌모아 태산이라고 “알뜰 살뜰 아끼며 꾸준히 저축한 보람으로 75년도에 조그만 기와 집을 살 수 있었다”며 당시의 벅찬 감정이 아직도 생생한 듯 하다. 당시 집 값이 70만원이었지만 전 주인이 33만원은 농협에 저당 잡혀 37만원만 줘도 됐던 것이 빠듯한 살림에 집 장만이 가능했던 것이다. 신 할머니는 “가계부 10년이면 집장만을, 20년이면 가난을 이길 수 있다는 신념을 잃지 않았다”며 굳은 의지로 가난과 맞서 살아 온 지난 날을 되돌아 본다.

이제는 기억이 가물거려 가끔 지출내역이 생각나지 않지만 하루라도 가계부를 쓰지 않으면 돈이 새는 것 같아 불안하다며 새벽 4시가 되면 어김없이 일어나 가계부부터 펼친다는 신 할머니에게서 이제야 비로소 여유로움이 느껴진다. 희망찬 2016년 새해, 가계부 장만과 함께 힘차게 출발해 보는 건 어떨런지....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