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의병봉기와 홍성지역 항일민족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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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의병봉기와 홍성지역 항일민족운동
  • 한관우 발행인
  • 승인 2016.03.17 1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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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쓰는 홍주의병사, 치열했던 구국항쟁의 진원지 탐사 <1>

홍주의병 180여명의 민병(民兵) 모집 홍주성서 창의
충청도 홍주(洪州)땅 최초의 의병(義兵)이 궐기한 곳
의병이 일본군진지 홍주성 탈환 유일, 최후 마친 곳
의병, 3·1운동의 원동력·독립투쟁·민중저항 시원지

 

▲ 홍주아문과 홍성군청 느티나무. 둘레가 7미터에 이르며 수령이 600년 가까이로 추정되는 이 느티나무에 창의기가 꽂히면 홍주성의 점령을 알리는 상징으로 의병들의 사기를 돋우곤 했다.

홍성지역의 본격적인 항일의식의 표출은 홍주의병(洪州義兵)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강탈당한 우리 민족의 주권과 생존권을 되찾고자 한 항일운동은 우리 민족 독립운동의 출발점이다. 구한말 우리는 외세의 침략을 막아 민족과 국가의 자주독립을 지켜야 하는 민족운동과 근대적 발전을 위한 자강운동을 함께 추진했다. 당시 홍주지역의 사상적 배경에는 일제의 침략과 단발령 등 개화 세력들의 정책에 반발하여 1896년 1월 12일(음력 1895년 11월 28일)에 100여명의 홍주 일대의 유생들이 청양 화성의 이인영의 집에서 모임을 갖고 군사 활동을 결의하면서 홍주의병은 구체화 되었다. 이때 180여명의 민병(民兵)을 모집하여 홍주성에 입성, 김복한을 중심으로 창의소를 설치하였으나 당시 홍주군수 이승우의 배반으로 김복한 등 23명이 구금되었다. 홍주의병은 반제국 투쟁이었고, 유생을 비롯한 농민 등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켰으며, 이후 1906년 홍주성 전투 등 항일운동의 기반을 제공하였다.

따라서 의병이라는 개념은 신분과 시대에 따라 차이는 있으나 결국은 민군(民軍)이다. 국가가 위급할 때 의(義)로써 일어나 조정, 다시 말해 국가의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자발적으로 일어나 국가와 민족을 위해 싸운 민중의 의용군이다. 우리 민중은 아득한 옛날부터 외적의 침략이 있을 때마다 용감히 일어나 싸웠고, 이러한 전통 가운데 뿌리를 박은 중심이며, 국가의 정수(精髓)가 바로 의병(義兵)인 것이다. 이러한 의병항쟁이 가장 많았고 혁혁한 업적을 남긴 곳, 최초의 의병이 궐기한 곳이 충청도이며, 충청도 중에서도 홍주(洪州) 땅 이었다. 한 지역에서 세 번의 창의가 있었던 곳도 이곳 홍주 땅이라 ‘충절의 고장’이라 하지 않았던가.
 

▲ 홍주의병 창의소 홍주동헌 안회당(安懷堂). 홍주목사의 동헌인 안회당은 고종 7년인 1870년에 당시 목사 한응필이 건립했다. 을미홍주의병 당시 관찰사 이승우가 의거에 가담하면서 의병진의 본부인 창의소가 설치됐던 곳이다.

홍주의병은 1895년 10월의 ‘민비시해사건’과 11월의 ‘단발령’ 공포 직후 봉기하였다. 홍주에서는 세 번의 의병 궐기가 있었는데, 1895년의 을미봉기와 1905년의 을사외교권 박탈 때, 1907년의 한국군 해산때의 봉기가 그것이다. 1906년에는 홍주의병이 일본의 정규군과 맞서 홍주성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이기도 했다. 또한 의병이 당시 일본군 진지인 홍주성을 탈환한 것도 유일하며, 의병 대다수가 장렬한 최후를 마친 곳도 충청도 홍주였다. 일제는 을사조약을 늑결하기 1년여 전부터 한국의 주권을 빼앗는 일련의 조치를 취하였다. 1904년 일본공사 임근조는 이른바 황무지개척권을 요구하였다. 이는 50년간 우리나라 전국토의 3할에 달하는 진황지의 개간 및 정리, 척식 등 일제의 경영권과 기타 모든 권리를 넘기라는 것이었다. 이는 의병봉기의 단초가 되었다. 이렇듯 홍주(洪州)는 반외세 투쟁이 처음 발발하고 그 성과가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연속성을 갖고 있어 한국민족주의의 본향 내지는 발현의 고향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산증거로는 기록된 역사가 있고, 유허지로는 홍주구백의병의 묘인 홍주의사총(洪州義士塚)이 있어 지금도 당시의 상황을 그대로 전해주고 있다.

그 많은 국토의 편린 중에서 어떻게 해서 충청도 홍주가 의병의 발상지가 되었을까. 충청도를 시발로 일어난 의병투쟁은 일제의 침략에 대항, 전면적인 전쟁상태를 선포하게끔 하여 우리의 민족사를 살아있게 했다. 일제 식민지로 전락한 이후에도 무력항쟁을 계속할 수 있도록 민족저항사의 원류가 되게 한 것도 의병이다. 의병은 국권이 강탈당한 이후에도 간도나 연해주로 옮겨가 항일투쟁을 벌이는 독립군의 모체가 되기도 했다. 이는 1940년 중경의 임시정부가 광복군 창설 때 발표한 ‘한국 광복군총사령부 설립보고서’에서 의병이 바로 광복군의 시초라는 기록에서도 찾을 수 있다. 또한 1918년 만주에서 발표된 대한독립의군부의 ‘독립선언서(일명 무오독립선언서)’에서도 의병의 맥은 끊이지 않고 이어져 3·1운동의 원동력이 되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렇듯 의병정신을 통해 독립투쟁사나 민중저항사의 시원지가 충청의병, 즉 홍주의병이 출발점이라는 점에서의 사상을 재조명해야 할 것이다.

한국의 의병(義兵)운동에 대한 연구는 계속되고 있으나 의병운동의 성격이 다양하고 특정 의병장에 대한 것에 머물고 있어 의병운동의 성격을 이해하는 데는 아직 부족한 점이 많은 실정이다. 민족주의 시각에서 의병운동을 바라보자면 의병운동이 민족운동이라면 그의 중심개념이 민족주의이기 때문이다. 특히 의진의 성립과 의진의 주체, 그들의 이념과 민족주의상의 위치를 살펴 볼 필요가 있는 이유다. 보편적으로 의병의 구분은 을미의병(乙未義兵), 을사의병(乙巳義兵), 정미의병(丁未義兵) 등으로 구분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세부적으로 연구하는 역사학자들은 1894년부터 1915년까지 20년간의 의병전쟁사를 세부적으로 구분하는 경우도 있다. 제1기는 일제의 반식민지적 침략과 의병전쟁의 발단이며, 을미사변(乙未事變)을 전후로 한 단계로 나눈다. 제2기는 일제의 준식민지적 강요와 의병전쟁의 발전이며,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의 체결로 인한 의병의 봉기와 을사조약(乙巳條約)이후의 의병봉기의 단계로 구분한다. 제3기는 정미조약과 국민적 전쟁의 시기이며 1908년 5월에 있었던 서울 탈환작전을 계기로 한 전후로 나눈다. 제4기는 의병전쟁과 독립군 편성의 시기이며, 대한제국의 멸망을 전후한 단계로 구분한다. 이렇게 시기를 구분하는 것은 민족주의상의 성격을 규명하는데 편리한 방법일 수가 있다는 관점에서 의병봉기의 계기에 기준을 두기 때문이며, 특히 기존의 3분법으로는 을미의병에 앞서 갑오년에 의병이 기병한 사실이나 을사조약 이전에 기병한 내용들을 포함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같이 의병운동을 단계적으로 분석하고 그 단계와 단계적 변천이 민족주의와 어떠한 관계를 나타내고 있는가를 규명하는 것이 의병사를 체계화하는데 있어 필요하다는 점을 들고 있다. 하지만 민족주의의 한국사적 개념이 분명치 않기 때문에 민족주의의 한국적 특질부터 따져보아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하고 있다.

민족이란 생활공동체이면서 문화공동체라는 점에서 혈연에 의한 분류인 종족과 다르고, 또 단순히 국가 소속원인 국민과도 다르다. 민족 구성원의 자각의식을 민족의식이라 하고, 그 민족의 보존과 발전을 위한 행동논리 또는 행동철학을 민족주의라 할 수 있다. 한국에서는 고전적 민족주의와 근대적 민족주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한국의 경우 삼국통일을 종족의 통일이 아닌 민족통일로 파악하였고, 단군을 민족의 시조로 올렸으며, 민족의 문자인 한글을 창제하는 등의 모습이 분명 민족의식을 표현한 것임에 틀림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민족의식이 조선 중기에 심화된 성리학의 보편주의적 지배가 강화 되면서 봉쇄당하여 민족의식이 확산되지 못하고 침체되고 말았다. 근대민족주의는 시민민족주의에 의해서 제고되기 시작하는 것이 세계사적으로 공통되는데, 우리의 경우도 조선 후기 실학 때에 시민민족주의가 태동하여 그 이전의 고전적 민족주의가 근대민족주의로 대체되어 가기 시작하였다. 근대민족주의가 고전적 민족주의와 다른 가장 중요한 점은 민족의 동질적 발전 즉, 민족 구성이나 성장에 계급을 부정하는 논리가 전제된 점이고, 이러한 인간의식은 대내적 동질의식인 동시에 인류의 평등이념으로도 연결되는 것이다.

따라서 의병전쟁에 관한 역사서술은 한말의 개화사상이나 개화운동에 밀려 낮게 평가되어온 측면이 강하다. 이처럼 개화위주의 근대화 서술은 식민지화를 호도하거나 정당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된 제국주의 이론의 하나였다는 사실을 망각한 역사해석에서 비롯돼 왔기 때문이다.

국가와 민족을 외적의 침략으로부터 지키고자 자발적으로 무장항쟁을 한 민병으로서 죽음을 각오하고 봉기했던 국가의 정수(精髓)인 의병정신의 계승. 오늘의 시각에서 홍주의병사를 새롭게 조명하기 위하여 당시 홍주의병들이 걸었던 처절하고 치열했던 역사의 현장을 찾아 역사의 기록과 현재를 비교하기 위해 구국항쟁의 진원지를 찾아 나선 이유이기도 하다.
글=한관우/사진=김경미 기자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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