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이 나를 얼마나 사랑해줄지가 화두”
상태바
“춤이 나를 얼마나 사랑해줄지가 화두”
  • 장나현 기자
  • 승인 2016.06.04 00:1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사람이 희망이다>홍성의 인맥-홍성출향인을 찾아서 <7>

최창덕 우리춤협회 부이사장

중요무형문화재 27호 승무, 97호 살풀이춤 이수자
살풀이춤은 우리네 인생을 담은 우리의 인생 자체
고 우봉 이매방 스승이 지어준 별명은 '사자이빨'
홍성에서 부른다면 홍성 문화발전에 헌신하겠다

▲ 살풀이춤을 추고 있는 최창덕 우리춤협회 부이사장.

휘감다가 흩뿌려 허공에 멈춘 명주수건, 때리는 북소리에 하얀 목련 꽃잎처럼 피었다 지고, 가슴 적시는 해금 소리에 구슬픈 백로같이 고개 숙이고 두 팔이 떨려온다. 사뿐한 버선걸음 고요함 속에 저만치 내딛고, 살풀이 장단 고조에 다다르면 흥과 신명의 세계에 동화된다. 최창덕 명무의 춤사위는 관객까지 빨아들여 환희와 절정을 맛보게 하고 감정을 승화시킨다.

“살풀이춤은 우리네 인생을 이야기합니다. 20살 여자가 살풀이춤을 추면 20살 여자의 인생을 보여주는 것이고, 60대 남자가 살풀이춤을 추면 60대 남자의 인생 그 자체이죠.”

▲ 최창덕 우리춤협회 부이사장.

홍성읍 고암리에서 7남매 중 막내로 태어난 최창덕(57) 우리춤협회 부이사장은 어려서부터 국악 재질을 타고나 초등학교운동회 날은 그의 날이었다고 한다. 운동회날이면 최 부이사장은 홍남초등학교 교단위에 장고를 메고 마음껏 끼를 발산하곤 했다. 최 부이사장이 국악과 전통춤에 능했던 배경은 집안 내력에서 찾을 수 있다. 사업을 하였으며 자기치례를 잘했던 그의 어머니는 그의 재능을 적극적으로 밀어줬다.

또한 그의 춤 인생에 단초가 된 고 한영숙 선생과의 인연으로도 거슬러 올라간다. 최 부이사장은 고 한성준 선생의 손녀인 한영숙 선생의 조카로 우리춤의 시작을 한영숙 선생에게 사사해 중학교 때는 토요일 수업이 끝나면 춤을 배우러 주말마다 천안에 올라갔으며 고등학교 때는 서울을 올라다녔다. 몇 년간 한영숙 선생에게서 춤을 배우던 그는 남자는 남자가 가르쳐야 한다는 한영숙 선생의 소개로 20살 때부터 고 이매방 선생 문하에 들어가 이매방류춤을 계승했으며 현재는 우봉 이매방전통춤보존회 부회장직을 맡고 있다.

▲ 살풀이춤을 추고 있는 최창덕 우리춤협회 부이사장.

홍성고등학교 재학시절 유달리 깔끔하고 여성스러운 면모가 엿보여 친구들이 지어준 별명은 ‘안방마님’이었다. 그러나 여성적인 면모와는 대조적으로 경우에 어긋나는 상황을 못 참는 성격덕분에 ‘사자이빨’이라는 별명도 지니고 있다. “후배들에게는 너그러우나 선배들에게는 바른 소리를 잘하고 날카롭다 해서 이매방 스승님께서 제게 ‘사자이빨’이라는 별명을 지어주셨습니다.”

춤에 대한 열정에도 불구하고 최 부이사장은 대학진학 당시 아버지의 반대에 부딪혔다. 홍성고등학교에서 반에서 2~3등 할 정도로 학교 성적도 좋아 집안에서는 인문대학을 가길 원해 결국 단국대 불어불문과로 진학했다. 졸업 후 그는 서산여고에서 불어교사를 하다가 결국 자신의 길이 아님을 깨닫고 서울로 돌아와 중앙대학교 교육대학원 무용전공으로 진학해 본격적인 춤꾼으로서의 행보를 시작했다. 이 때가 그의 나이 26살이었다.

▲ 승무를 추고 있는 최창덕 우리춤협회 부이사장.

“전공이 달라 무용대학원에 진학할 수 없었으나 전주대사습 전국놀이대회에서 무용부 장원을 수상하는 등 활동경력이 다양해 진학할 수 있었습니다. 대학 시절에는 춤 추는 사람이 왜 어문계열을 전공했을까 하루하루 고통 속에서 공부를 했었죠. 그러나 대학교 때 미학과 철학을 접해 무용만 접했던 친구들에 비해 풍부한 예술적 식견을 기를 수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16회의 개인 발표회를 열었고 민속무용의 양대산맥인 이매방 선생과 한영숙 선생을 스승으로 만나 전통춤으로 이름을 알린 최 부이사장은 제자들이 잘 되는 모습을 볼 때가 가장 기쁘다고 말한다. 스승은 절대 제자를 판단할 수 없기에 객석에서 제자들을 알아줄 때가 한 없이 뿌듯하다고 한다. 그러나 무용을 전공한 후배들을 대학의 실업률로 판단하는 사태에 안타까움을 내비쳤다. 예술적 가치를 경제성을 따져 취업률을 떨어트린다는 이유로 폐과를 시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최 부이사장은 후학들이 설 곳을 마련하기 위해 해외대학에 부단히도 문을 두드리고 있다.

최 부이사장에게 춤이란 무엇일까. “짝사랑은 없는 것 아니겠어요? 저는 지금까지 너무나도 춤을 사랑했는데 춤은 나를 얼마나 사랑해 줄지가 제가 갖고 있는 화두입니다. 평생 안고 가야할 숙제인 것이죠.”

▲ 승무를 추고 있는 최창덕 우리춤협회 부이사장.

최 부이사장은 일주일에 한 편 영화를 즐기는데 역사와 예술에 관련된 영화로 취미도 춤과 연관되지 않는 것이 없다. 또한 한 달에 한번 해외공연을 하고 권위있는 전통춤심사에 심사위원으로 위촉돼 활발한 활동을 펼치면서도 고향인 홍성을 늘 가슴에 안고 있다. 홍성에서는 지금까지 1995년도 홍주문화회관과 홍성고등학교 체육대회 전야제에서 마련된 무대에서 두 번의 공연을 펼친적 있다.

그는 고향의 신문에서 찾아와 인터뷰를 하는 것이 무척 반갑다며 홍주신문사를 비롯한 홍성에 당부의 말도 전했다. “홍주신문에서 출향인 인터뷰를 기획해 인물들을 알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출향인들을 고향을 위해 쓸 수 있는 기회 제공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각지에 나가있는 출향인들이 한 데 모일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된다면 홍성을 위해 여러 가지 자문도 하고 각종 사업유치도 꿰할 수 있는 조건이 되겠죠.”

전국에서 혹은 세계무대에서 활약하는 출향인들을 활용해 홍성발전에 위해 쓰일 필요가 있다고 한다. 최 부이사장도 홍성에서 불러준다면 고향을 위해 언제든 달려나가겠다고 애정을 보였다. 최 부이사장은 이 달 2일날 미국으로 출국해 LA와 워싱턴에서 전통춤 공연을 앞두고 있다. 활발한 해외공연을 하면서도 마음은 늘 고향을 향해 있는 그는 홍성사람이다.

▲ 살풀이춤을 추고 있는 최창덕 우리춤협회 부이사장.

최창덕 우리춤협회 부이사장은...
최창덕 우리춤협회 부이사장은 홍성읍 고암리3구에서 태어나 홍남초, 홍성중, 홍성고(32회), 단국대불어불문과를 졸업하고 중앙대학교 교육대학원 무용전공석사, 경기대학교 사회체육학과 박사를 수료했다. 중요무형문화재 제27호 승무 이수자이며 중요무형문화재 제97호 살풀이춤 이수자로 1993년 제19회 전주대사습 전국놀이대회 무용부 장원, 1999년 제1회 전국전통무용경연대회 대상 대통령상, 2002년 김백봉 춤보존회 지도자상, 2007년 21세기포럼 스포츠한국일보사 ‘올해의 한국인상’(문화부문)을 수상했다. 16회의 개인발표회와 1000여회 공연 및 활발한 해외공연을 펼치고 있다. 주요작품으로는 1995년 최창덕 전통무용발표회 ‘천지인의 소리,짓’, 1995년 광복 50주년 상설야외무대 ‘소리,짓’, 2000년 아시안페스티벌 ‘대지의춤’, 2000년 광복55주년 기념 멕기코합중국 6개 도시 순회공연 ‘새천년맞이 한무의맥’, 2002년 제1회 전통무용 경연대회 대통령상 수상기념 공연 ‘최창덕의 수류사덕(水有四德)’ 2006년 추사서거 150주기 기획공연 창작가무악극 ‘붓 천 자루 벼루 열 개’, 2006년 대전시립무용단 기획공연 ‘전통춤의 향기, 2015년 ‘드림오브 치망마이-한무의 맥’이 있다. 현재 단초 최창덕전통춤연구원 대표로 (사)우리춤협회 수석 부이사장, 우봉 이매방 전통춤보존회 부회장직을 맡고 있으며 우봉 이매방전통춤 전수관 관장, (사)영남판소리보존회 상임이사를 역임한 바 있다.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