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랑이도 제 고을을 섬긴다는데 하물며 사람이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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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도 제 고을을 섬긴다는데 하물며 사람이랴
  • 장나현 기자
  • 승인 2016.07.14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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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희망이다>홍성의 인맥-홍성출향인을 찾아서 <10>

삼농 김구해 서예가

근원을 찾는데 혼신의 노력을 다해야 한다
전각 생략은 미인이 루즈 안 바른 것 같아
유치원 손주와 그림 전시 ‘손지와 하르방’ 전
애향심 울리는 내 고향은 충청도 홍성이라네

▲ 삼농 김구해 선생.



一去不來 少年時(일거불래 소년시)
自遠近 讀講(자원근도 독강시)
幼而學知 將欲行(유이학지 장욕행)
如流光陰 誰敢遲(여류광음 수감지)

한번 지나가면 돌아오지 않는 소년/ 멀고 가까운 곳에서 와서 함께 모여 글을 외우고 읊조리네/어렸을 적 학문을 배워서 지혜를 익히는 것은 장차 행하고자 함이다/흐르는 것 같은 세월을 그 누가 감히 더디게 하리요.

“고향 청룡산 자락에서 春季花游(춘계화류) 할 때 韻字(운자)를 時(시)·詩(시)·遲(지)로 정해주심에 지은 시가 생각납니다. 제가 14살의 나이에 지어올린 시를 보시고 스승이신 최송학 선생님께서 흠 잡을 데가 없다고 말씀하시면서 칭찬하셨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삼농 김구해(71) 선생은 결성면 박철마을이 고향으로 만해 한용운 생가 옆의 잠방골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유년기 서당에서 글 공부를 할 시기, 최송학 스승의 훈도 아래 읽고 쓰던 시기로 위 시는 지금으로부터 57년 전인 14살 때 직접 지은 시다. 현재는 이름과 같이 ‘龜(구)海(해)’ 바다로 떠난 거북이처럼 제주에 22년째 안착해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배경으로 창착활동에 매진하고 있다.

▲ 김구해 선생이 직접 쓴 부채.

김 선생은 시·서·화·를 넘어 전각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문화예술 활동을 하며 자신의 예술세계를 펼쳐나가고 있다. 창 안으로 들어온 달빛이 온 방을 환하게 밝히듯, 김 선생 안으로 들어온 달빛은 자신을 너머 온 세상을 밝히려 한다. 시·서·화·전각의 예술세계를 하나하나 풀면서 김 선생은 정신을 집중해 하얀 종이 위에 글자를 써내려갔다. 서예는 단순한 글씨가 아닌 동양예술의 근간이기에 인문학 연구를 소홀히 하면 결코 예술적 표현의 본질을 터득할 수 없다고 한다. 김 선생은 서예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문학의 근원을 심도 있게 연구해야 하고 더욱이 문화예술적 콘텐츠는 대자연 어느 분야에도 연관되므로 궁극은 진선미 표현과 작가의 정신적 사조를 어떻게 승화시키느냐에 달라졌다고 봅니다. 최근의 추세는 동서양문화 즉 탈장르시대로 접어든지 오래지만 결국 어느 분야든지 핵심 근간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 근원을 찾는데 혼신의 노력을 다해야 한다고 봅니다. 주지하다시피 서예연구에는 타장르와 달리 취미와 호기심으로 접근하기에 쉬울 수 있는데 문장, 자학, 조형, 음악, 무용 등에 관한 이해가 병행되어야 합니다.”

동양화(문인화, 한국화, 소묘, 크로키 포함) 역시 선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골기를 중요시 하는 것도 바로 핵심이라고 강조했다. 현대 회화에서 처음으로 순수추상 작품을 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 칸딘스키가 예술의 표현에 있어서 강조했던 점·선·면 표현을 말하는 것이다.

정방에 들어가는 전각에 대해 김 선생은 심혈을 다해 피력하며 전각의 아름다움을 이야기 했다. “전각 역시 동양예술의 한 장르로 부상되어 연구자들의 폭이 넓어졌는데 이른바 문자의 발전과정과 역사의 궤를 같이 하기 때문에 필수요소로 전개되었습니다. 방촌세계라고 하는 용어는 곧 전각을 말함인데 사방 한치(기본 사이즈)에 우주를 담아 표현한다는 말입니다. 평면서예, 문인화, 동양화 작품에 전각이 생략되었다면 마치 미인이 화장을 마치고 루즈를 바르지 않은 것과 다르지 않다고 말할 수 있지요.”

김구해 선생의 전각.

예술인에게 창작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으며 창작물이 나왔을 때의 희열 또한 크다. 김 선생은 여기까지 종이에 차곡차곡 써내려가서 대학에서 예술학 개론을 청강한 것과 같이 느껴졌다.
“창작은 작가마다 가장 중요시 하는 부분인데 추구하는 목표가 어느 시점이냐에 따라 천차만별입니다. 즉 작가 자신의 정신세계가 무엇이냐는 것을 표현하는 작품을 보면 한 눈에 알아보게 되는데 그것은 만인 앞에 발가벗고 서있는 그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예술을 사랑하는 김 선생은 아이들에게도 예술적 재능을 발견하고 물려주고 싶어 하는 손주 사랑이 지극하다. 딸이 귀한 김 선생의 집에 딸이 태어나자 스케치북과 과일을 선물로 사들고 갔다. 손주 민주에게 과일을 그리고 먹으라고 하니 그 자리에서 슥슥 곧잘 그렸다고 한다. 독특한 관찰력을 발휘해 머리를 안 깍고 수염도 기르던 시절의 김 선생의 특징을 잘 잡아내어 주위의 칭찬을 한 몸에 받았다.

유치원 다니던 아이들의 끼를 놓치지 않고 예술의 세계로 인도해주기 위해 차곡차곡 모은 아이들의 그림에 선생의 작품을 함께 전시해 ‘손지와 하르방’ 전이 탄생했다. 세 손주인 민주, 시웅, 인아와 함께한 전시회는 할아버지가 손자를 예술로 인도하고자 하는 뜻이 담겨있다. 이 전시는 제주도 이중섭미술관 창작스튜디오에서 2011년 개최돼 많은 호응을 얻었다.

비록 지금은 제주에 있지만 마음은 늘 홍성을 향해있는 김 선생의 마음은 누구보다도 애틋하다. 그가 고향을 생각하며 지은 시는 홍성역의 지하도의 벽에 걸려 고향을 찾는 사람들의 애향심을 불러일으켜왔다. 그러나 지하벽에 누수가 되어 벽에 걸린 작품에 습기가 차고 훼손되자 더 이상 작품을 걸 수 없게 돼 작품들은 홍성역 창고로 들어가고 그 자리에는 타일로 만든 홍성관광명소 소개가 붙었다.

▲ 홍성역에 걸려 있던 김구해 선생이 쓴 시.

홍성역 측은 “작품을 기증하신 분들의 안타까운 마음은 충분히 이해하나 작품을 걸 수 있는 공간이 없어 부득이하게 창고에 보관하게 됐다”고 말했다. 김 선생은 작품이 훼손되어 쓸 수가 없다면 다시 써서라도 홍성을 향한 마음을 전하고 싶어했다. 다음은 홍성역에 걸려있던 홍성을 향한 애향심이 잘 드러나 있는 김 선생의 시 전문이다.

내 고향은 충청도 홍성이라네
내 조상 부모 형제 모여 사는 곳
선현들의 애국충절 본받은 자손
내 고향은 자랑스런 홍성이라네

三農(삼농) 김구해 선생은 …  

삼농 김구해 선생은 1947년 홍성군 결성면에서 태어나 유년기 서당에서 사서삼경을 공부했다.  1983, 1984년 대한민국미술대전 서예부분 연특선, 1985년 국립현대미술간 초대작가 선정, 1986년 한국서예100년전(예술의 전당 주최 생존, 작고작가 80인 선정), 1989~1995년 서울시립미술관 초대작가전, 1990년 한글날기념 한글서예대잔치(세종문화회관), 1995년 한국전각대전(한국전각학회 회원전), 한·중·일 전각대전 출품(중국·서령 인사), 1997년 세계서예 전북비엔날레 초대전, 1998년 21세기 10대 중진작가 선정(평론가 합동심의), 서예전각 초서전 초대출품(예술의 전당), 1999년 한글서예 30인 초대전(도올아트센터), 2002년 전현직대통령 및 현대서예 100인전(세종문화회관 미술관), 한글 자·모음 28자 주재 작품 개인전(물파아트센터), 동아시아필묵정신전(예술의 전당), 서예고전과 재해석: 우리글씨 체험보고전; 퇴계이황 서체연구(예술의 전당), 2011년 손지와 하르방전(손주 민주, 시웅, 인아, 할아버지), 2012년 김구해 임진메아리전: 임진왜란 7주갑 임진록 전문 124m(제주도문예회관), 2013년 몽지삼연전(시·서·화·전각) 기획전시 주재(제주도 이중섭창작스튜디오), 2014년 서귀포 예술의 전당 개관기념전 초대출품, 2015년 문자문명전 초대출품(경남 창원아트홀), 소암기념관 초대전 출품(서귀포시 소암기념관)했다. 대한민국 서예대전, 대한민국 서예전람회, 동아미술대전, 대한민국 서예 현대문인화대전, 충남도전, 인천광역시 서예대전, 예술의 전당 청년작가 선발, 전국대학생 휘호대회 등에서 심사위원을 역임했다.
 

글=장나현 기자/ 사진=김경미 기자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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