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천주교 발상지, 홍주성과 홍주성지 성역화가 ‘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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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천주교 발상지, 홍주성과 홍주성지 성역화가 ‘답’
  • 글=한관우/자료·사진=김경미 기자
  • 승인 2016.09.13 1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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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주천주교순교성지, 부활을 꿈꾸다 <2>
▲ 현재의 ‘천주교홍주순교성지’비가 세워진 합수머리의 생매장 터와 북문교 밖의 참수 터 근처 등에는 더 많은 순교자들이 묻혔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목사 동헌 근민당 1870년 홍주성 개수 때 안회당으로 옮겨
진영의 동헌 경사당 1870년 12칸 신축 순교자 신앙증거 터
첫 순교자 1793년 원시장 베드로 홍주성 밖에 버려져 동사
흥선대원군, 천주교 신자 혹독한 탄압, 박해 상징물 척화비


 

지금의 홍성으로 불리는 홍주지역은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직후부터 신앙이 빠른 속도로 전파된 내포지역으로 분류되는 곳이다. 충청도 지역에서는 공주 다음으로 많은 순교자들을 배출할 정도로 교세가 번성한 곳이 바로 ‘홍주’였다. 그러다 보니 홍주지역의 순교자들이 처음으로 신앙을 증거한 장소는 다양하게 분포돼 있다. 홍주의 한복판에 위치하고 있는 홍주성은 성(城) 전체가 순교의 현장이기도 하다. 군청, 객사, 동헌 등 구석구석이 처형지로 사용됐던 곳이며, 조양문, 저잣거리도 바로 순교의 생생한 숨결이 배어 있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청사 안뜰에 무심하게 서 있는 고목들은 당시 순교자들이 처분만을 기다리며 오랏줄로 꽁꽁 묶여 있던 기둥들이었고, 바닥에 깔린 흙 위에는 선조들의 피와 고통이 서려 있다. 다만 아쉬운 것은 이 지역에서 모진 고통을 당하고 숨을 거둔 선조들이 정확하게 누구누구이며, 얼마나 많은지가 명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는 점은 큰 아쉬움이다. 과거 홍주목이란 관할 지역의 규모와 지리적 위치로 볼 때 많은 순교자가 배출 됐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당시 홍주군의 문서에는 천주교 박해와 관련된 부분들이 전혀 나타나있지 않아 이에 대한 조사와 정리를 통한 기록 작업 등 성역화사업이 시급한 실정이라 하겠다.

 

■멀쩡한 신자 고문해 시체로 홍주성 밖으로
지금도 홍성에 들어서면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이 조양문인데, 홍주성을 드나들던 동서남북 4개의 문 가운데 유일하게 남아 있는 문이 바로 동문인 조양문이다. 당시 홍주 고을이 관할하던 넓은 지역에서 붙잡혀 온 천주교 교우들은 이 문을 통해 홍주성 안으로 들어갔고 멀쩡하게 걸어 들어갔던 그들은 시체가 되어 홍주성 밖으로 나오게 되었던 것이다. 초기와 중기 박해 때의 순교자들은 목사와 영장 앞에서 신앙을 증거한 것으로 나타나지만, 병인박해 때의 순교자 대부분은 포교들에 의해 영장 앞으로 끌려가 경사당 앞에서 신앙을 증거 했던 것으로 나타난다. 조양문으로 끌려 들어온 많은 천주교 교우들은 관청 뜰 안에 있는 나무에 묶여 있다가 동헌으로 끌려가 심한 문초를 받아 죽기도 했고, 옥에서 굶어 죽기도 하였으며, 얼려 죽이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조선 후기 홍주에는 목사가 진영장을 겸할 수도 있었지만, 대개는 문관(文官)인 목사와 함께 무관(武官)인 진영장이 별도로 파견되었고, 목사의 동헌과 진영의 동헌이 별도로 존재하였다. 이중에서 목사의 동헌인 근민당은 1870년의 대대적인 홍주성 개수 때 현재의 동헌인 안회당으로 옮겨졌다고 전해진다. 또 진영의 동헌인 경사당은 1870년에 12칸으로 신축되었다. 따라서 시기적으로 볼 때, 천주교 순교자들이 신앙을 증거한 장소는 지금의 안회당 앞이 아니라 기존의 근민당 앞과 진영장의 집무처인 경사당 앞으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에 설득력이 더하는 대목이다. 기록상으로 홍주지역에서 처음 순교한 사람은 1793년 원시장(1732~1793, 베드로)이다.

홍주의 원정리에 사는 원 베드로는 이곳 관아에서 모진 혹형을 받고 홍주성 밖에 버려져 얼어 죽은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이것을 시작으로 80여 년간 잡혀 온 수많은 교우들이 처형되어 죽어갔던 순교의 현장이란 점에서 홍주성과 홍주성 천주교순교성지에 대한 의미가 더하고 있다. 따라서 홍주는 이존창 등에 의해 복음이 전파돼 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있던 곳임에 틀림없다. 기록상으로 홍주에서 가장 많은 순교자를 배출했으며, 지금도 잘 보존된 홍주성 동문인 조양문을 비롯한 4대문 안으로 끌려 온 천주교 신자들은 심한 문초를 받아 죽거나 옥에서 굶어죽기도 했으며, 수많은 무명 순교자들이 한꺼번에 구덩이에 묻힌 것으로 기록된 곳이기도 하다.

▲ 척화비는 조선 고종 때 흥선대원군이 병인양요·신미양요 이후 서양 제국주의의 침략을 배격하고 쇄국(鎖國)을 강화하기 위한 결의를 나타내기 위해 세운 비석이다. 서울을 비롯해 전국에 93개를 세웠다. 충남도내에는 홍성군 구항면 오봉리<사진>·아산군 신창면·예산군 대흥면 등에 남아 있다. 척화비의 비문에는 ‘오랑캐가 침범하는데 싸우지 않는다는 것은 화해를 하자는 것이다. 화해를 하자는 것은 나라를 팔아먹음과 같으니, 우리들의 만대 자손에게 경고하노라(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 戒我萬年子孫 丙寅作 辛未立)’라고 새겨져 있다.

■교회 순교록, 홍주지역 순교자 115명 기록
지난 1984년 로마교황청의 심사를 거친 103명이 성인으로 공표됐는데, 2000년 2차 순교자 124명 중 충청출신이 51명으로 가장 많았고, 경기도가 23명으로 그 다음이었다. 충청도출신 중에서도 홍주(홍성)출신이 16명으로 가장 많았고, 덕산 12명, 예산 6명, 청양 5명 등인 점으로 볼 때 내포지역인 홍주지방의 천주교 박해실태를 미뤄 짐작 할 수 있는 것이다. 홍주지역 순교자들에 대해서는 일부 홍주성지 안내서와 교구사를 통해 살펴보면 1866년과 그 후 2년간에 걸쳐 수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순교했던 것으로 기록돼 있다.

‘치명일기’에만도 80여 명의 명단이 전해지지만 전체적으로 명확한 숫자나 기록이 전해지지 않는 아쉬움이 남는다. 이밖에도 무명의 순교자들도 많았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실제로 현재의 ‘천주교홍주순교성지’비가 세워진 합수머리의 생매장 터와 북문교 밖의 참수 터 근처 등에는 더 많은 순교자들이 묻힌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들의 유골을 수습하여 묻은 ‘홍주의사총’은 900여구의 유골이 묻혀 있는 곳으로 과거에는 ‘홍주구백의총’이라 불렸으나, 지금은 홍주의사총으로 불리고 있다. 다분히 동학을 포함한 홍주의병과 홍주천주교 신자들의 뼈가 함께 묻혔을 가능성도 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 대목이다.

기록상으로 홍주지방에서의 첫 순교자는 1793년 원 베드로이며, 1797년에 박해가 발생 이듬해 원 야고보, 배 프란치스코, 방 프란치스코 등이 잡혀 방 프란치스코는 이곳에서 순교하고 나머지는 청주로 이송돼 순교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하지만 ‘홍주’의 관할지역의 범위와 지리적 위치 등을 고려할 때 상당수의 천주교 신자들이 더 많이 순교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천주교 신자들에 대한 혹독한 탄압을 일삼았던 흥선대원군이 1866년 병인양요와 1871년 신미양요에서 승리하고, 그 해 서울 종로와 전국 각지에 세운 척화비가 홍주(지금의 홍성군 구항면 오봉리 산5)에도 현재까지 남아 있기 때문에 박해의 정도를 미뤄 짐작할 수 있는 상징물로 후세들에게 전해지고 있다.

교회 순교록에는 홍주에서의 순교자가 모두 115명(무명 순교자 11명을 포함해 1866년 51명, 1867년 19명, 1868년 27명, 1869년 2명, 연도미상 16명)으로 수록돼 있고, 관변 측 기록에는 1868년 4~7월까지 4개월 동안의 순교자만 모두 102명이 수록돼 있다. 따라서 이러한 실상을 제대로 파악하여 홍주성 복원에 따른 홍주천주교 순교성지 성역화 조성사업에 따른 올바른 대안과 방향 등을 제시해야 할 때이다.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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