핏물계곡의 진실? 경산코발트폐광산 민간인 집단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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핏물계곡의 진실? 경산코발트폐광산 민간인 집단학살
  • 글=한관우/사진·자료=김경미 기자
  • 승인 2016.10.25 1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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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북 경산코발트폐광산의 입구. 이곳에서는 민간인 3500여명이 학살된 것으로 추청하고 있다.

1950년 7월 20일~9월 20일 민간인 3500명 군경에 집단학살
대구형무소재소자 1402명, 부산형무소이감 1172명 학살 추정
보도연맹원 국군·경찰이 잡아들여 7~8명씩 수직갱도서 사살
2007년 ‘진실화해위’ 유골 440여구 발굴 민간인 최대 학살지 

 

한국전쟁전후의 민간인학살 문제는 ‘과거청산’의 여러 과제 중에서도 가장 많은 수수께끼를 담고 있는 한국 현대사 최대의 블랙박스다. 그 속에 대한민국 탄생의 비사(秘史)가 숨겨져 있고, 오늘 우리 사회에 깊숙이 박혀 있는 각종 문제와 폐해의 뿌리가 거기에 맞닿아 있다. 민간인학살 진실규명은 그동안 묻혀 있던 비사와 뿌리를 들추어내며 대학살의 배경과 진실을 밝혀 우리 사회와 국가를 다시 성찰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드는 작업이다. 과거청산은 과거의 진실을 규명하여 사회정의를 구현하고 이를 통해 사회의 도덕적 가치, 국가와 사회의 신뢰를 재정립하는 의의를 지닌다. 그럼으로써 과거의 기억과 고통에 대한 사회 심리적 치유도 가능해지고 사회 전체적으로 민주적 가치를 내면화하는 중요한 계기도 마련될 것이기 때문이다.
 

■경산코발트광산 민간인 집단학살 사건
일제가 군사용 코발트를 확보하려고 1930년대 채광을 시작해 1942년에 폐광됐다는 경북 경산시 평산동의 폐(廢)코발트광산의 동굴 입구는 냉동 창고의 문처럼 철문이 굳게 닫혀 있었고, 폐광 안에는 전구의 불빛만이 동굴의 허공만을 비추고 있었다. 경산코발트광산 민간인 집단학살사건 또는 경산안경공장 학살사건은 6·25 한국전쟁 기간 중에 경산코발트광산에서 보도연맹원들을 학살한 사건이다. 주민들의 증언에 따르면 학살은 1950년 7월 20일 경부터 9월 20일 경까지 계속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곳에서는 민간인 3500명이 군경에 의해 집단 사살된 것으로 추정된다. 희생자들은 1950년 당시 경상북도의 경산, 청도, 영천, 창녕, 밀양지역 등지의 국민보도연맹원 1000여명과 대구형무소 수감자 2500여명 등이다.

피해자 유족들에 따르면 대부분 좌익 사상이나 반공 활동과는 무관한 단순부역자나 농민들이었다고 한다. 코발트광산은 수평갱도와 수직갱도가 있어 이곳에서 학살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인근의 대원골에서도 학살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사건의 피해자는 크게 대구형무소와 부산형무소 수감자와 보도연맹원 두 부류로 나뉜다. 1960년에 이루어진 대한민국 제4대 국회의 양민학살 특위의 조사에 따르면 대구형무소 재소자 1402명이 7월에 학살되었다고 한다. 또한 대구형무소에서 부산형무소로 이감된 것으로 기록된 1404명 중 1172명의 명단이 부산형무소 재소자 명단에 나오지 않아 이 사람들도 학살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경산코발트광산의 갱도는 당시까지만 해도 폐쇄된 상태로 있었으나 지난 ‘2005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이 국회를 통과해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가 설치되고, 2006년 4월 25일 정부 주도로 조사가 시작되었다. 2009년 11월 17일 진실화해위원회는 경산코발트광산 등지에서 발생한 민간인 희생사건은 군·경에 의한 집단 학살이라고 판정했다. 진실화해위원회는 “경산코발트광산 등지에서 발생한 민간인 희생사건은 국민의 생명과 재산 보호라는 일차적 임무를 수행해야 하는 군과 경찰이 관할지역의 국민보도연맹원 등 예비검속자들과 대구형무소에 미결 또는 기결상태로 수감되어 있던 사람들을 불법 사살한 민간인 집단희생사건이다. 비록 전시였다고 하더라도 범죄사실이 확인되지 않은 민간인들을 예비검속하여 사살한 것은 명백한 불법행위”라고 밝혔다.
 
 

▲ 코발트광산의 수평갱도와 연결된 수직갱도 입구.

■지하갱도 탄피·수류탄 흔적 발견돼
지난 2014년 9월 27일 방영된 SBS-TV ‘그것이 알고싶다’에서는 “6·25 한국전쟁이 치열하던 때 지리산 인근이나 주요 산악지역에서는 밤에는 북한군이나 공비들이 인근 마을에 내려와 밥을 빼앗아 먹고 곡식과 가축을 약탈해 산으로 올라갔다. 낮에는 경찰이나 군인들이 들어와 이런 주민들을 찾아내 빨치산이나 북한군을 도왔다며 ‘빨갱이’라 낙인을 찍고 고문하고 두들겨 팼다. 전라도 경상도에서 일어났던 6·25한국전쟁 때의 실상이다. 이후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로 ‘빨갱이’들을 전향시킨다는 의미로 ‘보도연맹’이라는 단체를 만들었고, 보도연맹에 가입하는 사람들에게는 고무신이나 밀가루를 주기도 했다. 그런데 전세가 불리해지자 국군정보사 CIS에서는 이들을 유사시 북한군이나 빨치산에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이른바 ‘잠재적 적군‘으로 간주하게 되었고, 어느 날부터 보도연맹원들을 국군과 경찰을 통해 잡아 들였다. 출산한 아내 옆에서 시중을 들다가 끌려가기도 했고 두엄을 옮기다가, 또는 밥을 먹다가 끌려가 외딴 건물에 하루 이틀 갇혔다가 일정 인원이 모이면 군용트럭에 실려 이곳 경산의 코발트폐광산으로 실려와 7~8명씩 한 조로 손을 묶어 수직갱도 위에 나란히 세운 후, 한두 명에게만 총으로 쏘면 광구 안으로 쓰러지게 되고 손이 묶인 일행은 그대로 딸려 들어가 100여 미터의 바닥으로 떨어지면서 모두 죽게 되었던 것이다.

산 채로 떨어지면서 온 몸이 부서지고 으스러졌지만 목숨이 붙어 있는 사람도 있었는데, 데려 온 인원을 전부 떨어뜨린 후에 위에서 무차별 총격을 가했던 것이다. 또 일정 인원이 죽어 시체가 쌓이면 고폭탄을 투하해 확인 사살까지 해 시신으로 가득 찬 폐광으로 만들었다. 이 시신들이 흘린 피가 계곡을 타고 인근 마을까지 붉은 핏물이 되어 흘렀고 동네가 피비린내로 숨을 쉬기도 곤란할 정도였다”고 전했다. 이와 관련해 경산코발트광산유족회 박의원 대표는 “수직 동굴 저 위쪽에서 6·25전쟁 당시 군인과 경찰들이 사람들을 줄줄이 묶은 채 총으로 쏴 떨어뜨렸다고 합니다. 수직갱도 높이가 100여 미터 정도인데 시체로 가득 차 더는 못 떨어뜨리게 되니까 나중에는 골짜기 이곳저곳에 시체들을 묻었다고 해요. 동굴에서 기관총 탄피나 수류탄 흔적도 발견됐어요. 산 채로 떨어진 사람들을 확실하게 처리했던 모양”이라고 말했다.
 
 

▲ 경산코발트광산 유해발굴 모습.

■수평갱도 폭파 대량의 유골발견 보도
양민 대학살을 자행한 이승만 정권은 민중들의 민주화 열망이 만들어낸 1960년의 4·19혁명으로 무너졌다. 그동안 이승만 정권의 철저한 ‘반공·멸공’정책으로 양민 대학살에 대해 언급조차 할 수 없이 오히려 숨죽이며 살아온 피해자들이 이제 서서히 양민 대학살에 대한 진상규명을 위한 작업을 진행하기 시작했다. 이는 경산지역 역시 마찬가지였다. 대구·경북지역에서는 고(故) 이원식 씨를 중심으로 진상규명 활동을 전개했다. 이로 인해 1960년에 경산폐코발트광산의 제1 수평갱도내에 다수의 유골이 있는 것으로 확인 됐으나 대학살의 참상을 본격적으로 밝혀내기도 전에 5·16 군사정변이 발생했다. 이승만 정권과 마찬가지로 철저한 ‘반공·멸공’을 공약으로 내건 군사정권은 진상규명 활동에 제동을 걸었다. 이에 따라 이원식 씨는 5·16 군사정변 직후 혁명재판과정에서 이적행위라는 죄명으로 사형을 언도 받았다고 한다. 이에 따라 자연적으로 진상규명은 백지화 되었으며 피해자 유족들은 ‘반공’이념의 사회분위기에서 진상 규명에 대한 언급조차 하지 못했다. 그리고 경산 대원골 일대의 대학살에 대해 인근 주민과 학자들의 추측만 있었을 뿐 확인 작업조차 거치지 못하고 그렇게 세월이 흘렀다.

이렇게 세월이 흐르다가 지난 2001년 MBC-TV ‘이제는 말할 수 있다’의 제작진은 제2 수평갱도를 폭파하여 대량의 유골을 발견했다는 보도를 했다. 당시 우리사회에는 6·25 한국전쟁 발발 직후의 ‘보도연맹’문제가 사회적 문제로 떠올랐다. 이후 대원골 일대의 유골 발견 작업도 진행됐다는 설명이다. 2000년대 들어 유족회와 시민단체 등이 유해 발굴에 나섰지만 정부와 경산시는 무관심으로 일관했다. 2005년 비로소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기본법’이 제정되면서 2007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발굴에 나서 440여구를 수습했다. 유족회가 발굴한 유골만도 80여구다. 이후 지난 2007년 8월 경산시 폐코발트광산이 있는 대원골 일대에서 유골 약 100여구가 추가로 발견됐다고 한다. 이 유골의 발견으로 이 일대가 한국전쟁 중 민간인 최대학살지일 가능성이 있다는 주장의 신빙성이 높아지면서 사람들의 관심도 높아졌다. 당시 발굴작업은 영남대 문화인류학과 발굴팀과 충북대 발굴 팀이 맡았다. 당시 발굴에 참여했던 영남대 노용석 연구교수(문화인류학)는 “보도연맹에 가입하면 이전의 좌익활동에 대해 면죄부를 주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처벌 받을 것 이라는 선전 때문에, 보도연맹을 1년 만에 전국적으로 45만 명이 넘는 거대 조직으로 성장했다”고 밝혔다. 국가를 배신하고 국민을 고통에 몰아넣은 친일파들에 대한 정리는 제대로 하지도 못하면서 죄 없고 힘없는 국민들에게는 극악무도한 일을 국가의 경찰과 군인들이 저질렀던 것이다.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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