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청산수화에서 샌드그래픽으로, 도전은 멈추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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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청산수화에서 샌드그래픽으로, 도전은 멈추지 않는다
  • 글=장나현 기자/사진=김경미 기자
  • 승인 2016.12.01 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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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희망이다>홍성의 인맥-홍성출향인을 찾아서 <20>

성산(城山) 홍병학 화백
▲ 홍병학 화백이 운보의 집 마루에 앉아 있다.

한국 고유의 색깔 정체성 찾아 단청산수화 개발해
은하면 대율리 가라실 고향, 홍성의 큰 산 되고파
달빛아래 오서산 풍경 그려 약대에서 미대로 변경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새로운 작업정신으로 도전해

사찰이나 궁에서 볼 수 있는 단청으로 산수화를 그리는 작가가 있다. 성산(城山) 홍병학(74) 화백의 작품은 산맥이 강렬한 붉은 기운으로 표현된다. 홍 화백의 작품 이후 산수화의 한 분야로 단청산수화 장르가 열렸다. 형태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이 그렸으나 한국의 미와 색채를 화폭에 담으며 끊임없이 새로움을 향해 도전하는 홍 화백을 그가 운영하고 있는 갤러리인 청주의 ‘쌀롱드쎄’에서 만났다. 

“우리나라가 일제의 침략을 받고 문화적으로 침탈이 되면서 미술도 일본화로 변했습니다. 저도 초창기 화조화를 그리면서 다양한 색을 세밀하게 써서 그렸는데 그런 그림은 일본 그림의 아류라고 여겨졌습니다. 일본적인 색채에서 벗어나서 어떻게 한국의 정체성을 찾을 것인가 고민을 많이 했죠. 미술사를 연구해보니 우리나라에서는 색을 귀한 때와 귀한 장소에서 청‧적‧황‧백‧흑색의 다섯 가지를 조합해 단청으로 색을 써왔던 거죠. 학생들을 가르치는 입장에서 한국적인 것을 더욱 가르쳐야겠다고 생각했던 것과 가장 한국적인 색채를 연구하다가 단청산수화를 그리게 되었습니다.”

▲ 홍병학 화백 작품 <가을산>.

1982년 청주대 미술과 교수로 부임할 무렵 홍 화백은 한국의 정체성에 깊은 고민에 빠진다. 산수화는 그동안 색이 없는 수묵화였으며 색깔이 산수화에 들어간 때는 얼마 되지 않았다. 다양한 색깔을 써서 산수화를 그려보니 그것은 한국의 색이 아니었다. 우리민족의 색깔을 연구하던 그는 백의민족이라고 불리는 우리민족이 색깔을 모르는 것이 아닌 색을 무척 귀하게 다루기 때문에 꼭 필요할 때 쓴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돌잔치, 백일잔치, 혼례, 회갑연, 장례의 꽃상여 등에 색이 쓰였으며 사찰, 궁궐에서 오방색이라고도 불리는 단청이 쓰였음을 알았다. 

일본의 산수화가 세밀하고 색도 극사실로 써서 표현했다면 홍 화백은 우리 민족의 직관에 따라 한번에 슥슥 그려냈으며 색 역시 단청을 바탕으로 직관에 따라 색을 올렸다. 홍 화백은 그동안 없던 산수화의 장르를 개척했으며 단청산수화는 그의 이름에 고유명사처럼 따라 붙는다.

▲ 홍병학 화백 작품 <마이산 인상>.

홍 화백은 은하면 대율리의 가라실이 고향으로 고 3때 약대 진학을 준비 중이었다. 홍 화백이 고3이었기에 11남매의 장남이었던 그만 고향에 남고 온 가족이 부산으로 이사를 했다. 광천상고를 재학 중이던 그는 홀로 고향에 남아 대학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초등학교와 중학교 시절 미술을 했지만 상고 특성상 당시에는 미술과목 자체를 가르치지 않았던 때따. 한밤중 공부에 전념하던 그는 창문을 열어 바깥을 쳐다보았다. 그의 눈앞에 오서산이 우뚝 솟아 있었고 충만한 달빛아래 구름이 오서산 상단에서 유유히 흘러가고 있었다. 

“공부를 하다 문득 올려다 본 하늘이 무척 아름답게 느껴져 눈앞에 펼쳐진 풍경을 담아야겠다는 생각으로 창호지에 저절로 손이 갔습니다. 창호지에 먹을 꺼내 달빛에 젖어 유수하게 흘러가는 구름, 그 위에 솟은 오서산을 그려냈지요. 그림을 벽에 붙이고 약대를 목표로 공부에 매진하던 중 제 방에 어느 날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돌이켜보면 그 손님의 말 한마디 덕분에 제 인생이 완전히 바뀌는 계기가 됐지요. 손님은 벽에 붙은 제 그림을 보더니 그림 정말 잘 그린다며 홍대를 가라는 이야기를 했죠. 그 말을 듣는 순간 잊고 있었던 미술을 향한 피가 몸 안에 흐름을 알게 되었죠.”

▲ 홍병학 화백 작품<수덕사 야운>.

대학진학 시험을 한 달 앞둔 시점에서 홍 화백은 약대에서 미대로 진로를 바꿔 무작정 상경해 홍대 근처에 방을 잡았다. 석고상 데셍을 실기로 본다는 이야기는 들었으나 시골에서 석고상을 본적이 없던 터였다. 입학도 안한 시점에서 무작정 홍대 실기실에 들어가 ‘호랑이 잡으러 호랑이굴에 들어간다’는 심정으로 대학생들 그리는 그림을 곁눈질해 가며 석고상을 그렸다. 그는 한 달간의 연습 끝에 그의 바람대로 1961년 홍익대학교 동양학과에 입학한다. 

꿈꿔왔던 미대에 갔지만 실력이 부족하다고 느낀 그는 새벽에 나가 실기실에서 부족한 실력을 보충해 갔다. 부산의 부친은 11명의 자식을 뒷바라지하느라 집안 사정이 풍족하지 못했다. 항상 재료비를 걱정하던 그는 중등학교 미술교사가 되겠다고 결심해 교직과목을 이수한다. 졸업 후 양양의 중학교에 임용되어 미술교사를 시작해 경제문제도 해결하고 학생들과 함께 그림을 그렸으며 1년 후 서울의 충암중학교로 옮겨 12년간 미술교사로 재직한다. 1980년부터 2년 동안 수원공업전문대학 디자인과에서 강의를 하고 1982년 충북대학교 사범대학 미술교육과 한국화 전공 교수로 부임해 25년 간 교수로 재직하게 된다.

▲ 홍병학 화백이 단청산수화를 설명하고 있다.

2009년에는 운보미술관의 관장을 맡아 현재까지 이어오고 있으며 청주의 사랑방이 되자는 소망을 담아 청주시내에 ‘살롱드쎄’라는 작업공간 겸 갤러리를 운영해 오고 있다. 단청산수화로 이름을 알린 그는 현실에 안주할 법도 한데 여전히 새로운 작업을 끊임없이 연구하며 도전 중이다. 그의 갤러리에는 몇 가지 연구진행 중인 작품들이 있다. 그림을 그리고 까만색으로 덮어 표현한 공(空) 사상 그림이 시선을 사로잡으며, 한지를 이용해 유화로 그림을 그려 평면이나 입체 질감을 표한한 그림이 있다. 또한 모래를 이용해 그 위에 그림을 그린 작품도 눈에 띈다. 그는 신진 작가의 등용문이라 불리는 아트페어어 준비도 한창이다. 내년 5월 싱가포르에서 열리는 아트페어에서 새로운 작품들을 들고세계 미술인들을 만날 계획이다.

▲ 홍병학 화백 작품 <제주 산방산 인상>.

“단청산수화를 연구해 이름을 알리고 지금도 작품을 그리면 많은 분들이 찾아주는 만큼 이 분야에서 제 이름을 견고히 굳혔지만 기존 작업을 하다보면 매너리즘에 빠지기도 하고 흥미가 떨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현재 연구 중인 새로운 작업은 호기심이 생기고 작업하려면 신이 나죠. 평생 새로움을 연구 하는 건 작가로서의 숙명인가 봅니다. 요즘은 페교된 법주초등학교에서 모래작업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샌드그래픽을 완성해 우리 고유의 색을 담아 작품 완성에 주력할 계획입니다.”

신념의 마력을 믿고 항상 도전하는 홍 화백. 그의 호는 성산(城山)이다. 그의 성과 홍성의 앞자가 ‘홍’자로 같아 성산으로 지었다고 한다. 비록 고향을 떠나 있지만 ‘홍성의 산’이라는 고향을 향한 그의 마음을 호에 담았다. 그의 새로운 작업들도 산을 추상화한 작업이다. 고향을 떠났지만 마음은 언제나 홍성에 머무는 홍성사람, 홍주인이다.<끝>

▲ 작업 중인 홍병학 화백.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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